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86
86화. 파문 (4)
자세히 파악해 볼 테니 기다려 달라던 고정인은 다음 날 정오에 소식을 전해 왔다.
나는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식당으로 향하는 행렬을 거슬러 9층으로 향했다.
혹여 누군가 들이닥칠 수 있는 화장실 대신 구 필드 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여전히 열려 있는 육중한 문을 밀면서 들어선 뒤 느릿하게 중앙으로 향했다.
“이제 얘기해 줘.”
텅 비어 있는 광장처럼 광활한 공간에서 입술을 떼자 소리가 근처로 울려 퍼졌다.
휴대전화 너머의 고정인은 한숨을 내쉬더니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면서 말했다.
―내가 보여 준 글이 올라온 건 범람의 접속자 수가 가장 낮아지는 시간대였어. 정확히는 새벽 3시 12분. 정말 스치듯 올라왔다가 바로 사라진 거라서 나 말고 확인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아.
“그리고.”
―그리고 또……. 시험 끝난 뒤에도 화력이 떨어지진 않아서 그런지 평균 사용자 수가 점점 늘고 있어서 문제의 글을 올린 게 기존의 이용자인지 새로 추가된 이용자인지 감이 잘 안 잡히기는 해. 만약 같은 논조의 글이 또 올라온다면 그때는 꼭 잡아서 확인해 볼게.
이따금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고정인의 말 사이로 섞여 들었다.
고개를 반쯤 기울인 나는 한숨을 간신히 삼키면서 대답할 말을 골랐다.
“번거롭겠지만 고생 좀 해 줘. 부탁할게.”
―이 정도는 괜찮아. 수상해 보여서 너한테 바로 연락 남긴 거기는 한데 이것도 우리랑 관련이 있는 거야? 반사적으로 캡처 남기면서도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싶었거든. 아니면 누가 시험 점수 나온 거 보고 상심해서 헛소리 중인가 했어.
“음.”
나는 말끝을 흐리면서 고정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듣고 있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필 또 7학년이 가지고 있다느니 어쩌느니 하니까. 헌터 아카데미 애들은 보통 7학년 중간고사 점수가 나오는 타이밍을 기점으로 나뉘게 되잖아. 이대로 현장 실습에 사활을 걸고 졸업 전에 나오는 최종 점수를 올릴지, 아니면 그대로 이론 공부에만 매진할지. 해월이 너랑 다른 7학년한테도 슬슬 압박이 오지 않아? 난 그랬는데.
쉼 없이 쏟아 내면서도 발음만큼은 정확하게 구사하던 고정인이 잠시 침묵했다.
이제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해 마른 입술을 축이면서 말문을 열었다.
“시험 점수 나온 뒤부터 담임이 한층 유난스러워졌어. 분위기만 보면 1학기 현장 실습이 끝나기도 전에 나랑 접촉해 보려는 길드 관계자들이 좀 있는 것 같더라.”
―진짜? 하긴 나랑 예성이 같은 E, F급 애들 사이에서도 해월이 네 얘기는 계속 돌았으니까. 그때 우리도 네가 졸업하고 나서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고 얘기한 적 있었거든. 아무튼, 그거 알고 나서 민훈이가 무진장 질색했겠다.
“그런 것 같더라.”
간결한 어조로 대꾸하고 있으니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고정인이 말을 이었다.
―나 그것도 들었어. 이번에 올라온 전교 회장 강현욱이라며. 걔 강효서 사촌이잖아. 잠깐만. 그럼 너희 반에 애란이랑 너랑 강현욱까지 같이 있는 거야? 와, 듣기만 해도 싫어. 강효서 걔는 이제 졸업했다고 대놓고 감시를 붙이는구나.
이미 예상하고 주시하던 것이었으나 고정인의 입을 빌려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직은 보안이 철저하게 유지되고 있는 건지 강현욱은 범람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맞다, 지금 점심시간이지? 내가 괜히 시간 뺏은 것 같아서 미안하네. 아무쪼록 커뮤니티는 내가 종일 주시하고 있을게. 새벽까지만 해도 흔한 어그로인 줄 알았는데 그러기엔 내용 자체가 심상치 않아 보여서. 어그로 끄는 수준을 보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어.
“그렇게 해 줘. 고마워.”
고정인과의 통화를 마친 나는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집어넣은 채 잠시 근처를 서성였다.
느린 속도로 넓은 공간을 배회하면서 전날 올라온 게시물의 내용을 곱씹어 보았다.
내가 성물을 습득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설연호와 정건후뿐이다.
고정인이 보낸 게시물을 확인한 순간 그들의 이름을 떠올렸으나 금세 고개를 저었다.
의심할 가치조차 없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 보는 게 좋겠지.
설연호한테는 곧바로 얘기하고, 정건후는 잠시 보류해야겠어.
문제의 글은 학생들만 확인할 수 있는 커뮤니티에 올라왔으니 교사인 정건후에게 소식을 전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건 때 이른 처사였다. 만에 하나 S급 헌터인 그가 일을 꾸몄다면 진작 일이 일어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경고하는 건 분명 차진명의 방식이다.
다만 그 경고가 단순히 성물만을 가리키는 건지, 서애란이 예측한 대로 나의 세력에 있던 사람을 포섭하려는 건지 확정할 수 없었다. 정확한 건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마침 오늘 오후에는 동아리 모임 시간이 마련되어 있으니 좀 더 고민해 봐야겠네.
* * *
중간고사가 끝나고 몇 주의 시간이 흘렀으나 동아리 모임은 간만이었다.
그사이 이런저런 학교 행사가 진행되면서 다른 시간으로 대체된 탓이었다.
칠판 근처 자리에서 모두를 한눈에 담아 보던 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저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근황을 나누던 모습을 보면서 골몰해 보았다.
아직 게시물을 올린 사람이 동아리 내부 인원이라고 확신할 수 없어.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 자리에서 내색하지 않겠지. 일은 뒤에서 꾸몄을 테니까.
이따금 말을 걸어오는 이들에게 간단하게 대꾸하면서 이들을 주시했다.
눈에 띄게 수상한 행동을 하는 인물은 없는 듯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목을 모았다.
“밀린 안부는 얼추 나눈 것 같으니 그동안 모은 정보부터 나눠 볼까.”
칠판 근처에 서서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순순히 수긍하면서 바르게 앉았다.
커뮤니티가 무사히 첫발을 뻗은 것과 별개로 정보 공유는 계속해서 진행해 볼 생각이었다.
“오늘은 내가 먼저 얘기할게. 강현욱이 요새 차민훈 선생님이랑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횟수가 늘었다고 하더라.”
홍원하가 목을 축인 뒤 텀블러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창가 근처에 앉은 그의 눈가로 볕이 쏟아지면서 밝은 갈색의 눈동자가 한층 투명해졌다.
“그 선생님이 학기 초반까지도 성문 길드랑 유착 관계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계속 받았던 것 기억하지. 그때도 해결해 준 게 강현욱이라고 들었어. 정확히는 강현욱이랑 연결된 강효서 선배겠지만.”
“그래도 연결 고리를 남겨 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겠네요. 그 선생님이 강현욱 선배만 싸고도는 건 한 학년 아래인 저희들 사이에서도 유명하거든요.”
말문을 맺은 홍원하에 이어 지선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덧붙였다. 언제나처럼 긴 머리카락을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내려 묶은 모양새가 단정했다.
“요새 자주 접촉하는 건 다른 이유인 것 같더라. 현장 실습 담당 교사를 정건후 선생님이랑 공동으로 맡을 생각인 것 같았어.”
홍원하의 말을 듣던 문제혁이 소리 없이 질색하면서 고개를 젓는 게 보였다.
“진짜 생각만 해도 싫다……. 저번 학기 실습 끝난 뒤에도 그 선생님이 편애하는 사람들이 몰린 조에 점수를 잘 줬다는 얘기를 들었어. 아마 이번에도 점수 책정에 관여하려는 건가 봐…….”
현장 실습이라는 단어만 언급하면 안색이 창백해지는 강준희가 말했다.
넓은 어깨를 한껏 웅크리면서 고개를 젓는 모습에 눈길을 두었다가 금세 거뒀다.
그로부터 잠시 찾아든 고요를 비집고 말소리를 낸 건 서애란이었다.
테이블 어귀에 시선을 두었던 그녀는 고개를 들고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강효서 선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 선배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주시할 거야. 성가시다고 생각하던 공희찬 선배가 이쪽으로 넘어왔을 때도 지켜보기는 했으니까.”
음, 이 자리에 공희찬이 없어서 다행인가.
나는 반사적으로 공희찬이 항상 앉았던 자리로 눈길을 틀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심정인 건지 헛기침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공희찬 선배 얘기하니까 생각났어. 다른 선배들은 요새 어떻게 지낼까.”
무덤덤한 얼굴로 앉아 있던 고예성이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말했다.
“정인 선배도 아무 말 없어요? 그래도 정인 선배랑은 연락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갸웃거리던 지선일이 묻고 나니 저마다 한마디씩 얹기 시작했다.
“다들 바빠졌다면서 연락이 빈도가 줄어들기는 했어요. 학교 바깥의 정보를 얻는 건 쉽지 않으니 선배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겠네요.”
“때가 되면 소식을 전해 주겠지……. 아니어도 어쩔 수 없고. 그렇지만, 음, 잘 지내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동안 졸업한 선배들 보면 졸업 직후가 제일 바쁜 것 같기는 했어.”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마지막으로 덧붙이던 서애란과 눈이 마주쳤다.
굳이 내색하지 않았으나 서애란이 이전부터 나를 주시하는 게 느껴지던 참이었다.
서애란이 내게 당부한 뒤로 시간이 제법 흘렀으니 슬슬 자신이 알아야 하는 소식은 없는 건지 궁금해진 듯했다. 고정인과 통화를 마친 뒤 서애란에게도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싶었지만 오늘은 설연호부터 확인해야 했다.
“더 나눌 만한 정보가 없으면 모임은 이쯤에서 마무리할까.”
자연스럽게 벽면으로 눈길을 옮긴 나는 시간을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러자. 다들 고생했어.”
“네, 누구든 선배들한테 연락 오는 사람 있으면 알려 주세요. 궁금하니까.”
“맞아. 다들 조심히 들어가고…….”
웅성거리며 자리를 정돈하는 소리가 내부를 울리는 동안 서애란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왜 남아 있어. 너도 가야지.”
하나둘씩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배웅한 뒤 자리를 정돈하던 내가 물었다.
칠판지우개를 들고 돌아보자 의자 등받이에 팔꿈치를 걸치며 서애란이 말했다.
“혹시 차진명 선배가 움직였어?”
나는 그 말을 듣는 즉시 고개를 들고 문간을 내다보았다. 다행히 닫힌 상태였다.
“먼저 얘기하지 않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조금이라도 낌새를 보인 게 맞다면 차진명 선배의 계획은 한참 전부터 시작됐을 거라는 사실만 알려 주려고 남은 거야.”
“우선 지켜보려고. 섣불리 방어할 수를 고를 만한 사안은 아닌 것 같아서.”
느릿하게 고개만 까딱인 서애란은 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문간을 넘어섰다.
“먼저 갈게. 내 도움이 필요해지면 얘기해.”
* * *
기숙사를 몰래 빠져나와 교정 근처의 공원으로 향한 건 밤이 깊었을 무렵이었다.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설연호가 가로등 근처를 서성이는 모습이 보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정인이는 뭐라고 해?”
인사도 하지 않고 다급하게 묻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셔츠에 슬랙스를 차려입은 그는 소맷단을 팔꿈치까지 접어 올린 상태였다.
“괜찮으니까 놀랄 것 없어. 정인 선배 말로는 잠깐 지나가는 어그로 같다고 하더라. 애초에 내용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더라고. 우선 좀 더 지켜보기로 했어.”
긴 한숨을 내쉬면서 허공을 응시하던 설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내 입술을 달싹이던 걸 보니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혹여 이 소식이 성물 사냥꾼 귀에 들어가면 어쩌나 싶어 걱정인 거지?”
이쯤 되니 설연호가 나를 보면서 속내를 읽는 것처럼 나도 그의 속내가 읽혔다.
내 말을 부정하지 않고 단번에 고개를 끄덕인 그가 자세를 틀고 나와 마주 보았다.
“만에 하나 그쪽에서 알아챈다고 해도 내가 졸업하기 전까지 쉽게 움직이지 않을 거야.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상태에서 건드렸다가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조심해.”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면서 내 말을 듣던 설연호가 나지막한 소리로 덧붙였다.
“그럴게. 선배를 여기까지 부른 건 차진명 선배가 어떤 식으로 수를 구상하는지 설명해 주고 싶어서야.”
“그 게시물을 누가 올렸는지 찾는 게 먼저가 아니고?”
“그건 그쪽에서 보낸 경고장에 불과해. 체스로 가정한다면 폰이 한 칸 전진해서 공격한 수준일 뿐이고. 크게 요동할 필요 없어.”
고로 지금부터 내가 얘기하려는 건 차진명이 체크메이트를 선언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