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87
87화. 뜻밖의 깨달음
“일단 좀 걸을까.”
애써 전전긍긍한 기색을 억누르는 설연호와 달리 내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머지않아 산책로 쪽으로 걸음을 틀면서 한숨을 쏟아 냈다.
“멈춰서 얘기하다가 누가 듣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바람도 좀 쐴 겸.”
초여름에 가까워지면서 한층 미지근해진 밤바람이 살갗을 스쳐 지나갔다.
소란한 속내와 대비되도록 호흡을 고를 때마다 산뜻한 풀 내음이 밀려 들어왔다.
“경고를 보냈다는 건 이미 차진명이 수를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일 거야. 나한테 어떤 손실을 입힐지 미리 정해 두고 가지고 있던 장기 말을 하나씩 움직이겠지.”
“그래, 너라면 거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했을 것 같았어. 하지만 그 내용에 대한 건 아무리 너라도 생각지 못했을 것 같은데.”
염려스럽게 묻던 설연호를 돌아보니 평소와 달리 머리칼이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행색이 망가진 걸 보니 그의 속내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선배 말이 맞아. 하지만 아까도 얘기했던 것처럼 성물 사냥꾼이 바로 움직일 것 같지는 않아. 거기까지 소식이 퍼지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도 있고,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안전할 거야.”
차진명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선 설연호를 조금 더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말까지 듣고 난 설연호는 눈을 깊이 감고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물건을 가진 네 생각이 그렇다고 하니 일단은 알겠어. 그리고 애란이가 너한테 했던 얘기까지 견주어서 생각해 봤어. 그것까지 생각하니까 감이 좀 잡히는 것 같아.”
나는 젖은 흙과 풀 내음이 한데 섞인 바람을 따라서 설연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모양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이어서 그가 하는 말에 마저 귀를 기울였다.
“차진명은 자신한테 오는 공격을 그대로 답습해서 돌려주는 방식을 선호하는구나.”
“정확해.”
내가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정확히 언제쯤이었지. 나는 미간을 슬며시 좁히면서 기억을 되짚었다.
특수 헌터 정예 부대가 설립된 뒤 대규모 길드가 서로 연합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면서부터 이능청 내부에도 길드 소속 스파이가 존재한다는 방증이 하나둘씩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 사실이 차진명에게 보고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색출된 스파이들이 처리됐다. 차진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해당 길드의 마스터 혹은 그에 준하는 주요 인물까지 처치했다.
매스컴에서 그들이 엮인 피습 사건을 연이어 다루었다. 나는 뉴스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사건의 내막을 문제혁에게 보고받는 과정에서 공통점을 몇 가지 발견했다.
죽음을 앞둔 이들의 눈앞에 붉은 액체가 채워진 잔이 있었다는 것.
그 잔을 발견한 이들은 하나같이 저항을 택하지 않고 순순히 들이켰다는 것까지.
언젠가부터는 매번 그 일을 처리하던 강효서를 대신하여 내가 잔을 채운 적도 있었다.
차진명만 알고 있는 방식으로 제조한 독주를 따르는 순간 코끝에 화한 향이 퍼졌다.
고요하고 어두운 공간에서 오감이 한층 예민해진 탓이었을까. 잔을 채울 때마다 스치듯 지나갔던 향이 나의 가장 깊숙한 부분까지 파고드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차진명이 나에게 그런 임무를 내린 것 또한 일종의 압박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다 차진명이 남긴 독주를 눈앞에 둔 이들 중에서 어떤 누구도 저항하거나 반격하지 않고 그 잔을 받아들인다는 이야기가 그의 측근들 사이에서 퍼져 나가기 시작됐다. 그로부터 시작된 은어가 바로 ‘체크메이트’다.
나는 그 이야기를 정도윤의 경우에 빗대어 설연호에게 설명했다. 정도윤은 성문 길드의 후대 마스터가 되고 싶다는 염원을 이루어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차진명과 손을 잡았을 거다.
그러나 결국 정도윤의 염원은 무자비하게 꺾여 버렸고 그가 몸담았던 성문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유학을 빌미로 모습을 감춘 정도윤은 지금도 무너진 성문의 잔해 아래에 짓밟힌 절박함을 곱씹어 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들으니까 확실히 알겠어.”
그리고 이제는 내가 차진명의 방식을 답습하여 돌려줄 생각이다. 그가 성물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경고했음에도 일단 차분하게 움직이려는 건 그가 내게 어떤 타격을 입히게 될지 계산해 보기 위함이다.
놀란 마음에 섣불리 움직이며 애꿎은 사람을 의심했다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화를 불러올 수도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설연호의 말에 대답을 이었다.
“맞아. 상대가 무엇을 바라고 꿈꾸는지 간파한 다음 그걸 이루어 주겠다는 명목으로 포섭하고, 더는 필요하지 않으면 염원 자체를 꺾다 못해 뿌리까지 뽑아 버리는 거야.”
염원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발음하고 있으니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오래된 예언’에 관한 힌트를 얻기 위해 도서관을 뒤적거리던 날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중간고사가 끝난 지 얼마 안 지났을 무렵이었고.
그러다가 성물의 역사를 다룬 책을 펼쳤을 때 ‘염원’이라는 단어를 본 듯한데…….
“고결하고 정의로운 상성을 지닌 염원, 이었나.”
나도 모르게 에 적혀 있던 문장을 나지막하게 읊조리자 무의식이 그에 반응한 듯 기억의 행렬이 ‘오래된 예언’으로 뻗어 나갔다. 동시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모했다.
잠시만, 왜 또 이러는 거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
스스로 묻기도 전이었으나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기울어지는 나를 발견한 설연호가 당황하는 게 보였으나 손을 쓸 수 없었다.
* * *
다시, 과거의 어느 날.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됐다고 했어…….”
눈앞에서 빛이 하얗게 번졌으나 밑창을 딛고 선 감각만큼은 또렷했다.
“언젠가 스치듯이 들어도 본 것 같은데, 착각일까…….”
귓가에 닿는 음성은 여전히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하게 들리지만, 거슬리지 않는다.
“분명 나도 접해 본 적 있는 익숙한…….”
모서리에 빛이 한가득 묻어난 장면들이 끝없이, 반복적으로 들이닥친다.
날이 선 바람 소리와 함께 눈앞의 풍경이 뒤바뀌면서 낯선 음성이 귓가에 얽힌다.
창문 너머로 도시의 야경이 선명하게 비치는 이능청 전략 회의실.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관없으니까 반드시 막아…….”
통창으로 휘영청 뜬 달빛 한 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집무실.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서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고 또…….”
던전 브레이크 현장에 닿기 위해 헬기에서 뛰어내리며 맞닥뜨린 밤하늘.
“우리는 꼭……. 목표한 것을 이룰 때까지…….”
커다란 잔해가 어지럽게 얽힌 길바닥과 그 위로 내린 어둠을 가르고 퍼지는 한숨.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으니…… 끝끝내 내 염원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한데 모여 휘몰아친다.
출처가 불분명한 장면이 단편적으로 끊어져 들이닥친다.
단지 ‘오래된 예언’을 떠올렸을 뿐인데 또다시 이렇게…….
의문하는 순간 새하얀 빛이 들이닥친다.
* * *
“헉!”
나는 깊은 물에 빠졌다가 건져 올려진 것처럼 헛숨을 쏟아 내며 눈을 떴다.
식은땀으로 젖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심장의 박동 또한 거세지고 있었다.
“해월아, 너 괜찮은 거야? 갑자기 왜 이래?”
이번에도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가로등 밑에서 휘청거리던 나를 붙잡은 설연호가 걱정스레 안색을 살폈다.
마른 입술을 축이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들을 연결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뭔가 떠올리니까……. 아니야, 괜찮아.”
분명 작년 이맘때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때는 문제혁이 앞에 있었고.
그때의 나는 멸망 직전의 내가 읊었던 예언이 회귀와 관련되어 있다고 심정적으로 확정했었다. 그 이후로 미개방 스킬의 해금 조건을 달성했다는 시스템의 안내 문구가 떠올랐었지.
얼마 전에는 모든 일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까지 확정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오래된 예언’이 존재한다.
방금까지 차진명의 수를 예측하고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지 고심했을 뿐인데…….
“대체 뭘 떠올렸길래 그래? 진짜 괜찮은 거야? 지금 상태만 보면 전혀 괜찮은 것 같지 않아서 그래.”
나는 곁에서 내 팔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던 설연호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아직 호흡이 거친 탓에 가슴팍이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일이 이렇게 되니까 그때 무리해서 그 물건을 가져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네가 위험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가정부터 해야 했는데. 하필 차진명이랑 엮여 버릴 줄이야.”
심호흡을 몇 번 잇는 동안 설연호에게 이끌려 벤치에 겨우 착석했다.
이따금 흐릿해지면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를 다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눈앞에 빛이 들이닥치면서 나타난 건 지난 생의 기억이었어.
지난번에는 헌터 아카데미가 배경이었고 이번에는 이능청이었던 듯한데.
하지만 그중에는 나의 것이 아닌 기억도 섞여 있었다.
같은 시간대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내가 겪은 일은 아니었다.
“해월아, 너 내 말 듣고 있긴 한 거지?”
상념이 더 길어지기 전에 설연호가 말을 붙이면서 내 안색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듣고 있어. 괜찮으니까 계속 얘기해.”
이전보다 한층 나아진 채로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안도하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성물을 습득했던 사람 얘기를 무심코 했을 때부터 마음이 좋지 않았어. 언젠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고.”
잠시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설연호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던 그는 머지않아 나를 돌아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야. 이런 푸념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때 네가 섬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마지막으로 남은 포션을 건넸던 게 나였으니까, 나도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이 있는 거지. 너를 공격하려는 게 차진명이 아니라 다른 누구였어도 곁에서 돕는 게 당연해.”
회귀한 직후부터 지금까지의 나의 목표는 한결같다. 전생의 내가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는 것. 회귀 직후 가장 먼저 되찾고 싶었던 설연호는 예측대로 나와 함께하게 되었다.
내가 설연호와 그토록 함께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면모 때문이다. 설연호는 자신에게도 위험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내 곁에 있기를 선택했다.
예의 그 부드러운 어조를 듣고 있으니 한참 소란하던 내 속내가 차분하게 정리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에 반응하는 것처럼 눈앞에서 푸른 활자가 떠올랐다.
[미개방 스킬 ‘준비된 설계자’의 해금 조건을 일부 달성하였습니다.]나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곁에 설연호가 있는 나머지 크게 내색할 수 없었다.
대신 차분하게 숨을 고르면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선배만 두고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벌써 걱정하지 마.”
그는 잠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토닥였다.
설연호가 문제가 되는 게시물을 올린 사람이 아니라는 확인은 이쯤이면 충분하다.
그래, 우선은 이걸로 되었다.
“우리가 예측한 대로 이게 다 차진명이 꾸민 일이라면 조만간 범람에도 성물에 대한 소문이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할 거야. 학교에서도 몇 번 겪어 봤으니 어떤 식으로 퍼지는지 선배도 알겠지. 우선 좀 더 지켜보고 도움이 필요해지면 선배한테도 얘기할게.”
설연호가 팔을 거두는 동시에 등에 미묘한 온기가 감돌았다. 온기는 바람결에 스쳐 금세 사라졌으나 그가 나를 얼마나 염려하고 있는지는 오래도록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