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89
89화. 행마의 시간
지선일을 떠나보낸 뒤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드문드문 그치기도 했으나 잊을 만하면 먹구름이 짙어지면서 조짐이 보였다.
기말고사가 끝난 뒤 시간까지 비바람에 휩쓸린 것처럼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동안 교정은 생각보다 잠잠했고 나는 길드의 기조를 잡는 일에 열중했다.
날마다 졸업한 세 사람의 보고를 받으면서 이런저런 사안의 결정을 내렸다.
작은 규모로 첫발을 내디뎠으니 그만큼 부지런하게 성장해야 할 것이었다.
어제는 지난 회의에서 언급했던 대로 성문이 맡았던 여러 던전의 관리 권한을 가져오기 전까지 해야 하는 일을 구상했다. 때가 되었을 때 문제없이 권한을 가져오려면 나와 동료들의 존재를 곳곳에 알리고 능력을 입증해야 했다.
그리하여 내가 먼저 지시한 것은 낮은 등급의 던전 명단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차진명이 보유한 정보를 기반으로 한 것인 만큼 던전의 위치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었고, 나서서 찾아내는 이들도 아직 없었기에 수월하게 선점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외에도 졸업한 이들을 수소문하여 지금으로부터 일 년 이내에 길드를 창설할 사람이 있는지 파악했다. 더불어 스카우트할 만한 인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만일의 가능성을 대비하여 던전 공략 전문 헌터로 길드에 입사한 이들의 행방을 알아보았다.
길드 창설을 위해 국가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 작업은 설연호와 한도일 덕에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설연호는 리호에서 길드 경영을 위한 수업을 듣기는 했지만, 실무 경험은 부족한 탓에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그 부분은 한도일이 보낸 취우의 사무직 헌터의 도움을 받았다.
취우의 사무직 헌터는 외에도 길드의 성장 방향성에 대한 설계도 선뜻 도와주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도일과의 친분을 통해 암묵적으로 맺었던 연합 관계가 가시화되는 듯했다.
기존 길드에 대한 인식은 범람을 이용하는 다수의 7학년의 게시물 동향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범람의 규모 또한 차츰 늘어가면서 안정된 입지를 다지는 중이었다.
나름대로 평화로운 시간을 지나는 동안 경계 태세를 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현장 실습 준비 기간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이 터졌다.
“현장 실습 참여 자격 박탈 여부를 논의한다니.”
반쯤 열린 창문 앞에서 입속으로 내내 곱씹던 문장을 소리 내어 읊어 보았다.
몇 번이고 읊조려 보았으나 생각할수록 납득이 불가능한 단어의 조합이었다.
기숙사에서의 근신이 결정된 지도 어느덧 사흘의 시간이 지났다.
종일 창문을 열어 두고 그 앞에 서 있었으나 답답한 속내를 게울 길이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술수를 꾸린 작자는 차민훈과 강현욱이었다.
그와 나의 답안지 내용이 모조리 일치한다는 주장이 불거진 것이 나흘 전의 일이다.
예상대로라면 이번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하는 건 내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전교 석차 발표가 미뤄지면서 차민훈이 나를 소환했다.
제대로 된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한 차민훈은 내가 제출한 답안지와 강현욱의 것을 눈앞에 대고 비교하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도리가 없었으나 내 이름이 적힌 답안지에 나의 필체로 적힌 활자들은 강현욱이 적어 낸 것과 일치했다. 자신만의 의견을 전개해야 하는 서술형 문제의 답안조차도 흡사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강현욱이 움직였다. 차민훈도 그와 오랫동안 합을 맞춘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더니 나의 기숙사 근신 처분까지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그 모든 과정이 마치 미끼를 물기만을 기다렸다가 그물로 덧씌워 사냥감을 생포하는 과정을 연상시키는 듯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요란스러운 방식으로 발을 걸고 넘어뜨릴 줄은 몰랐지.
흐릿한 하늘과 빗방울이 섞인 서늘한 바람을 한껏 들이마시고자 심호흡을 했다.
냉기에 살갗이 식어 갈수록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면서 생각을 정돈했다.
아무리 허접하고 요란한 술수라고 해도 내가 걸려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 없었다. 전생의 이맘때에 벌어졌던 용산 던전 브레이크를 막아 냈으니 미래가 다른 형태로 엉키게 되리라는 사실 또한 짐작하고 있던 것이었다.
지독할 만큼 강렬하게 쏟아지는 햇빛 대신 기나긴 장마가 이어지는 이번 생의 여름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만한 수를 다시 궁리해야 했다.
창문 너머로 바람에 흩날리듯 날리는 투명한 빗방울에 눈송이의 형상을 겹쳐 보던 나는 가볍게 숨을 고르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귓가에 대고 잠시 기다리니 서애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슬슬 내 도움이 필요해졌나 보네.
간단한 인사도 없이 본론부터 꺼내는 것이 나와 다를 것이 없었다.
“바깥 상황은 좀 어때.”
곧바로 받아치자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이어지더니 머지않아 대답이 돌아왔다.
―범람에 올라온 그대로야. 강현욱이 강효서 선배의 사촌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작정하고 너를 물 먹이려고 꾸민 짓이라는 건 다들 간파하고 있더라.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너의 억울함을 풀어 주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어. 아직 정확하게 규명된 게 없는데도 근신이라는 처분을 내렸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의견은 좀 있어도 나설 생각은 하지 않고 말만 얹는 수준이고.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한숨을 삼키고 있으니 서애란이 말을 이었다.
―아마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건 네가 졸업한 뒤에 창설할 길드 때문인 듯한데. 이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지? 참나, 길드 하나 만드는 게 뭐라고 이 난리인지.
서애란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어조였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나면서 설연호가 리호를 이탈했다는 소식이 슬슬 퍼지기 시작했고 범람에도 말이 나오고 있으니 그녀가 예상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내가 길드를 만들 거라고 확신하고 있나 보네. 언제부터였어?”
그렇다고 해도 서애란이 알아차린 시점은 분명히 해 두는 게 좋았다.
―얼마 안 됐어. 기말고사를 치르다가 생긴 문제를 현장 실습이랑 엮어서 처분하려는 그림 자체가 억지스럽잖아. 애초에 연호 선배나 미솔 선배의 행방에 대해 알려진 게 없다고 했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어. 그 두 사람을 한꺼번에 설득할 사람이 너밖에 없기도 하고.
설연리가 학교에 찾아왔을 때도 김미솔의 행방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던 일이 떠올랐다.
―강효서 선배도 나랑 같은 생각이었나 봐. 강현욱을 움직인 걸 보니 네가 세운 계획에 어떻게든 제동을 걸어 보려고 한 것 같은데. 아마 그 선배는 지시만 하고 계획은 강현욱이 구상했을 거야.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쓰임이 결정되겠지.
“왜 이렇게까지 무식하게 부딪혔는지 이해가 되네.”
서애란이 더는 차진명의 측근이 아니게 되면서부터 강효서는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한 다음 장기 말을 물색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낙점된 것이 강현욱인 듯했다.
―내가 어떤 식으로 도왔으면 할지 생각해 봤어?
“강현욱과 차민훈을 한꺼번에 보내 버릴 만한 방법이 필요해.”
내내 거슬리던 것이 기어코 발목을 움켰으니 이제는 치워 버릴 때가 되었다.
나는 줄곧 궁금했던 것을 상기하다가 서애란이 침묵하는 사이 재차 말문을 열었다.
“현장 실습 담당 길드가 성문으로 교체되는 데는 차민훈의 입김도 작용했을 거야. 그런데도 차민훈과 성문 사이의 유착 관계가 없다는 결론까지 어떻게 다다를 수 있었던 건지 궁금했어.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할 수 있어?”
―물론. 언젠가 네가 그게 필요하다고 말할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하고 있었어. 다만…….
서애란은 그즈음에서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걸 풀게 되면 그에 따른 결과를 치르게 될 거야. 차진명 선배 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이번 공격에 대한 너의 반격일 테니까. 강현욱을 앞쪽에 세워서 교란하다가 네가 수를 제시하면 그쪽에서도 숨겨 둔 진짜 패를 꺼내 보이겠지.
에둘러 말하고 있었으나 강현욱과 차민훈을 처리하면 서애란이 이전부터 언질을 남긴 대로 차진명이 나에게서 누군가를 데려갈 것이라는 뜻이었다.
―우리 쪽에서 사람을 빼앗기면 생각보다 타격이 크다는 것도 알고 있지?
“알고 있어.”
―현장 실습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 결정해 줘.
그 말을 끝으로 서애란과의 통화는 종료했다.
나는 반쯤 열려 있던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근신 이전에 지선일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던 공원에서의 일을 다시금 상기했다.
그녀가 돌아서서 떠나던 순간 안갯길을 밝히던 환한 푸른 빛의 형상이 떠올랐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미개방 스킬의 해금 조건이 무엇인지 절반쯤 이해할 수 있었다.
한 가지만 더 확인해 본다면 비로소 그 기준을 확정해 볼 수 있을 터였다.
조만간 기회를 잡으려면 이놈의 근신부터 해결해야 하는데.
슬슬 문제혁이 돌아올 때가 된 듯해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머지않아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면서 문제혁이 기척을 냈다.
“형, 나 왔어.”
서둘러 귀가한 것인지 숨이 달뜬 문제혁은 들어오자마자 짐을 풀었다.
그가 돌아올 즈음 미리 떠다 놓았던 물을 건네자 천천히 들이켜면서 눈짓했다.
“표정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넌지시 말을 붙이니 문제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형이 얘기했던 것처럼 대놓고 수상하게 구는 사람은 없었어. 엊그제 얘기를 미리 듣지 않았다면 전혀 생각지 못했을 거야.”
누군가 동아리를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문제혁에게도 알려 둔 상태였다.
조심스럽게 소식을 전했을 무렵의 문제혁의 반응은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았다.
뒤늦게 합류하기는 했어도 서로를 살갑게 살피며 마음의 벽을 허물던 세월을 부정당하는 기분이었겠지. 그러다가도 마음을 다잡고 의연하게 구는 것을 보고 있으니 안쓰러웠다.
“원하 선배한테 들었는데, 이번 일은 정건후 선생님조차도 손을 못 쓰고 있대. 사실 선생님들은 다 차민훈 선생님이랑 연결된 차정주 이사장의 편이라서 더 그런가 봐.”
나는 선선히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형이 이렇게까지 몰리는 건 처음이라서 그런지 분위기가 유독 안 좋았어. 다들 마땅한 해결책을 떠올리지 못해서 답답해하더라고.”
이후로도 문제혁은 동아리 구성원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면서 그들이 했던 말을 집약해 들려주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이따금 고개를 주억여 보였다.
“그러다 강현욱 선배가 찾아와서 동아리 모임 금지령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우리를 내쫓았어. 그러면서 분위기가 더 험악해졌고.”
아직까지 열려 있던 창문 너머로 찬바람이 들이닥쳤다.
따라서 일렁이던 커튼을 바라보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누군가 우리를 배신한다면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내 고심하던 내가 문제혁에게 겨우 꺼내 놓은 말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이때껏 잃었던 부대원과의 관계에 좀 더 열중하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잃게 될 줄 알았다면 좀 더 두루 살폈어야 하는데.
아직 잃지도 않았건만 그 가정 하나로 이렇게 마음이 소란스럽다.
같은 삶을 두 번 반복한다고 해서 모든 방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이번 생에서 만난 동료를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부대원을 잃었을 때와 다른 차원의 괴로움이 밀려왔다.
“난 그냥……. 계속 생각하게 될 것 같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일부러 문제혁을 돌아보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니 한참 뒤에 대답이 돌아왔다.
그대로 돌아보는 대신 창문 너머로 흐릿하게 펼쳐진 교정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마치 판을 내다보던 것처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골똘히 생각을 이어 나갔다. 차진명에게 버림받은 이후 ‘폰’으로 격하된 나는 나와 같은 이들을 모아서 그에게 맞서고 있다.
패배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걸 알면서도 모든 것을 바꾸겠다고 덤벼든 것은 나였다.
그리고 지금은 차진명이 자신의 수를 전개하는 행마의 시간이다.
지금의 나는 발이 묶인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체스의 규칙이니까.
누군가 우리를 배신하고 나면 문제혁만큼이나 힘들어하는 다른 동료들을 지켜봐야겠지.
나 또한 그 누군가가 나를 왜 떠났는지 계속해서 생각하고 끊임없이 곱씹을 것이다.
그 전에 내가 해야 할 건 내 몫으로 주어진 행마의 시간이 돌아오기 전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나는 문제혁을 돌아보지 않은 채로 휴대전화를 꺼내 서애란에게 연락을 남겨 두었다.
[한번 결정한 이상 되돌릴 수 없어] [그래도 괜찮다고 하면 내일부터 움직일게]머지않아 서애란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 메시지를 확인하는 즉시 긍정의 뜻을 담아 다시 회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