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90
90화. 보답
서애란은 9층 필드의 중앙에서 광장처럼 드넓은 검은 공간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휴대전화를 꺼내 도해월에게 받은 메시지로 시선을 낮추었다.
[괜찮아] [계획대로 움직여 줘]짧은 활자의 나열을 한참 바라보던 서애란은 문득 머릿속으로 셈을 해 보았다.
자신이 도해월의 동아리에 합류한 지도 어느덧 반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선뜻 그녀를 받아들인 도해월은 자신을 불편해하거나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언제나 인간적인 호의를 가지고 자신을 대하는 것이 느껴졌다.
서애란은 문득 2학기 현장 실습에서 도해월이 살린 것이 고정인의 가족과 그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도해월은 정건후 선생님과 나까지 살린 거야.’
차진명이 현장 실습을 빌미로 몇 년 전부터 거슬린다고 하던 정건후와 서애란을 처리할 것이라는 사실은 학교에 그녀와 관련한 소문이 퍼지게 될 무렵부터 직감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가 퍼뜨리는 소문은 안개처럼 살갗에 흡수되어 숨통을 서서히 옥죄어 온다. 그러다 보면 목덜미를 붙들린 상태로 벼랑 끝으로 떠밀리게 된다.
그 과정은 몇 년 전에 소식이 끊긴 이유나도 똑같이 겪었을 것이다. 끝없이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죽음이 다가왔음을 실감한 순간 서애란이 가장 또렷하게 떠올린 것 또한 이유나였다.
‘이대로 내가 죽으면 이유나가 느꼈을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을까.’
눈더미에 파묻힌 채로 간신히 숨만 고르고 있으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많고 많았던 기억 중에 이유나의 이름만 남게 되었다.
그 순간에 떠오른 것이 하필 이유나였다는 짧은 푸념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을 무렵부터는 이토록 깊고 깊은 환멸을 더는 견디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욕망만 짙어지던 그때…….
툭 끊겼던 의식이 되돌아오면서 눈을 뜬 서애란이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은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스스로 설명할 수 없었으나 무엇인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깨끗하게 거둬 간 느낌만은 명징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감정을 느꼈을까?
구태여 묻지 않고 반응을 지켜보니 모두가 설산에 파묻힌 뒤의 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도해월이 최종 보스를 처치하기 직전에 무엇인가 한 것 같았으나 그와 관련하여 무엇도 알아낼 수 없었다.
‘뭐가 됐든 도해월도 나와 목표가 같다는 건 분명해.’
그보다 자세한 내막은 청해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같은 방향으로 달려간다는 감각만 공유하면서 최선을 다해 달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서애란이 눈을 감았다 뜸과 동시에 딛고 선 자리에서부터 붉은빛의 파동이 퍼지기 시작했다. 파동은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면서 파도처럼 굽이치는 빛의 행렬이 넓은 공간을 채웠다.
한참을 공간을 채웠던 붉은빛이 부드럽게 가라앉는 포말처럼 흩어져 사라질 즈음 서애란은 숨을 골랐다.
“연극의 소품들은 준비됐어.”
문제혁을 통해 정건후의 연락처를 알아낸 서애란은 그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 * *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능한 방법을 전부 동원해서 도해월을 구할 거예요.”
상담실 의자에 앉은 정건후가 서애란을 보는 눈길이 어딘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필드에서 벌어진 사고 당시부터 서애란을 의심하던 것이 아직도 이어지는 듯했다.
“계획이 어떻게 되지?”
“이걸 구했습니다.”
서애란은 파일 하나를 정건후의 앞에 내려놨다.
[녹취록]제목을 읽은 정건후의 눈이 크게 띄어졌다.
“대체 네가 그걸 어떻게……. 그걸 네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너까지 추궁당할 거다. 설마 이걸 직접 밝힐 생각은 아니겠지.”
“저희 반 교실을 연극 무대처럼 꾸며 볼 생각이에요. 무대는 교실의 안쪽, 관객석은 복도가 되겠죠. 주인공은 강현욱이 될 거예요. 선일이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저를 의심하시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저는 해월이를 진심으로 돕고 싶어요. 이 마음을 선생님께선 알아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희는 준비됐어요 선생님. 허락만 해 주세요.”
그 말을 듣던 정건후는 눈을 깊이 감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짧은 탄식과 함께 손짓이 더해지는 걸 바라보던 서애란이 말을 이었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선생님께서는 강현욱과 차민훈 선생님이 도해월의 답안지를 건드린 정황을 확보해 주셨으면 해요. 가능할까요.”
“대답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다.”
“말씀하세요.”
“차민훈 선생님과 성문 사이의 유착 관계에 대한 건 좀 더 일찍 터뜨릴 수도 있었던 사안이다. 그걸 이제야 꺼내는 이유가 뭐지?”
사실상 이 정도는 서애란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렇게 요란스러운 무대를 꾸밀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직접 나서는 걸로 모자라 다른 사람의 손까지 빌리려고 하는 이유는…….
“보답하고 싶거든요, 도해월한테.”
역시 도해월 때문이었다. 서애란은 다른 무엇보다 도해월이 지향하는 바를 따라서 움직이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사실 서애란은 범람을 이용하는 보이지 않는 청자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목적은 이유나를 비롯하여 직접적으로 피해를 미친 이들에게 사죄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도해월이 근신을 마치고 나왔을 때 그가 기뻐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의 뜻에 맞춰서 정진하는 것이 자신을 살린 도해월에게 할 수 있는 보답이라고 믿었다.
정건후는 서애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내 서애란의 계획을 진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 * *
어느덧 오후 수업이 한창이었다.
칠판 앞에 선 차민훈은 듣기 싫은 소리로 계속해서 떠들어 댔다.
범람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강현욱이 저지른 만행]동시에 이십 분 이내에 수백 개의 댓글이 쌓였다.
비슷한 내용을 담은 게시물도 수도 없이 파생했다.
잠시 눈길을 낮추고 고정인이 전해 온 메시지를 확인한 서애란은 마지막으로 지선일이 남긴 대답까지 확인한 후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서애란은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언령’이 발동됩니다.] [‣ 언령 (B)언(言)에 잠들어 있던 령(靈)이 깨어나 대상의 정신을 지배하여 시전자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됩니다. 묵언으로 시전할 경우 효력이 저하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붉은빛이 파도처럼 넘실대면서 강현욱의 자리 나아가기 시작했다.
“윽.”
바른 자세로 수업에 집중하던 강현욱이 순간 움찔거렸다. 예고도 없이 뒷덜미를 덮친 통증과 함께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강현욱의 팔이 서랍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강현욱은 그 안에 가득 쌓여 있던 종이 무더기를 들고 교탁으로 다가갔다.
뻣뻣하게 굳은 무릎은 강현욱의 의지와 관계없이 멋대로 움직였다. 교탁과 가까워질수록 눈이 마주쳐 오는 차민훈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차민훈! 이 미친 새끼야! 녹취록 당장 해명해!”
이윽고 강현욱의 의지와 다르게 목에서 기괴한 목소리가 나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어느 순간부터 시종일관 창백하게 질려 있는 얼굴과 대비되도록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강현욱의 상념이 끼어들기도 전에 종이 무더기를 교탁에 힘껏 내리치며 소리쳤다.
“해명하라고 이 개새끼야! 해명해! 해명해! 해명해! 해명해!”
이내 일정한 박자로 교탁을 걷어차면서 내는 목소리에 힘을 실렸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강현욱은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차민훈을 노려보았다.
“이, 이 새끼가 근데! 너 당장 안 들어가? 당장 들어가라고!”
강현욱보다 한참 키가 작은 차민훈이 그의 어깨를 밀어붙였으나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해명하라고 외치던 강현욱은 차민훈을 노려보더니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 무더기를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그……. 얘기했던 대로 처리해 뒀어요. 우리 도윤이 들어가는 조에 보급품 수량을 좀 더 늘리고, 도해월이 그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들어가는 조에는 고장 난 귀환석 배분하고. 이거면 내가 할 건 다 한 거지?”
강현욱은 차민훈의 말투를 고스란히 답습하면서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이왕 들어가는 김에 콱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아주 싸가지 없는 새끼라니까.”
듣다 보니 강현욱이 읽고 있는 것이 성문 길드 관계자와 차민훈의 통화 녹취록이라는 것을 알게 된 학생들이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계속 얘기했지만 난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에요. 성문에서도 이번 일로 나한테 큰 빚을 졌으니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알잖아요? 나 차씨 일가 사람인 거.”
그 순간 교실을 이탈하려던 누군가 꽉 닫힌 문 앞에서 넘어지더니 모든 창문이 활짝 열리면서 눅눅한 비바람이 들이닥쳤다. 창가 근처에서 누군가의 인영이 얼핏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 이, 미친 새끼가! 너 당장 안 멈춰! 야, 인마! 선생 말이 말 같지도 않다 이거야?”
머리끝까지 새빨개진 채 강현욱의 등을 두드려 패던 차민훈이 도망가기 위해 문으로 달려갔으나 여전히 문은 꽉 닫힌 상태였다.
강현욱이 계속해서 차민훈과 성문 길드 관계자를 차례대로 모사하는 동안 다른 반에서 이탈한 학생들이 창문에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해명부터 하라고 이 개새끼야!”
어느새 문가에 달라붙은 차민훈의 등에 매달려 악을 쓰던 강현욱은 곁눈으로 간신히 서애란을 돌아보았다. 서애란은 우스운 몰골로 문간에 엉켜 넘어진 강현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네가 어떻게.’
여전히 의지와 정신은 서애란에 의해 지배된 상태였으므로 강현욱이 서애란을 노려볼 수 있었던 것도 잠시였다.
고개를 돌리던 그 순간 서애란이 웃는 것도 같았으나 팔다리에 실이 묶인 듯 팽팽하게 당겨진 탓에 자세히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잠시 뒤 강현욱은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서애란을 원망하기도 전에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다.
* * *
도해월에게 근신 처분이 내려진 뒤로 한동안 우중충하던 동아리실이 떠들썩해졌다.
오후에 있었던 일을 알게 된 이들은 범람의 반응을 주시하며 기쁘게 웃었다.
그 가운데 우두커니 있던 서애란은 누군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들 중 누군가 배신할지 감으로 눈치채고 있는 상태였다.
‘도해월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겠지만.’
서애란이 그 인물을 짚어 낼 수 있었던 건 도해월이 아닌 이들에게 별다른 애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음 깊이 신뢰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한마음으로 도해월을 구하겠다며 애쓰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해졌다.
도해월이 어째서 이들을 신뢰하는 건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너도 정말 고생했어. 범람에 올라온 동영상 보니까 내 속이 다 시원해지더라.”
넌지시 말을 붙여 오는 홍원하를 마주하던 서애란의 귓가에 문득 강효서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자신이 도해월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가 조소하던 소리까지 생생해졌다.
‘그쪽으로 넘어가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 넌 그냥 네가 저지른 짓을 다 끌어안고 망망대해에 버려진 거야.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정신 차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 바다의 수평선에 이유나가 있다면 거기까지 헤엄쳐서 도달할 각오도 얼마든지 되어 있었다.
강효서의 말대로 서애란이라는 사람 자체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곁에서 함께하는 이들이 달라진 이상 이전과 다른 마음가짐으로 모든 일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틈 없이 닫힌 창문 너머의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하고 흐렸다. 그래도 도해월이 기숙사 밖으로 나올 즈음에는 먹구름이 걷히면서 차츰 맑아질 것이다.
‘도해월이 돌아오면 헤엄치기 훨씬 좋은 날이 되겠네.’
서애란은 한껏 들뜬 얼굴로 자신의 활약상을 늘여 놓던 지선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곁에서 경청하는 이들의 얼굴까지 둘러보던 서애란이 비로소 홀가분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