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92
92화. 새로운 수
팔월의 어느 날.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나는 계속해서 생각하면서 눈을 떴다.
무릎에 놓인 주먹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그대로 눈길을 틀어 차창 밖을 내다보니 바깥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어느덧 두 번째로 탑승하게 된 리무진은 이전과 달리 한적하고 고요했다.
내내 침묵하고 있으니 강준희가 앉았던 자리가 눈에 밟혔다.
리호 길드의 사무실을 향해 가면서 그가 했던 말과 행동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지잉―
그 순간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발신인은 김미솔이었다.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운전석 근처를 살피자 윤해리가 곧장 반응했다.
“통화하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면서 눈인사한 뒤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내내 한숨을 쉬고 있던 건지 연결되는 동시에 숨이 길게 이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애들은 좀 어때.”
―비슷하지, 뭐. 어디쯤이야?
“도착하려면 좀 남았어. 얘기해.”
현장 실습 직전에 동아리를 이탈한 강준희는 어느 날 자취를 감췄다.
이후 사정이 생겨 더는 학교에 재학할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만 남게 되었다.
―그래도 현장 실습은 문제없이 마무리돼서 다행이야. 대부분 실습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는지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게 보여. 이번 실습은 서로 다른 조로 흩어져서 진행했던 게 도움이 됐나 봐.
“다행이네.”
염려 어린 김미솔의 음성을 듣고 있으니 마음으로 빚을 지는 기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방학식까지 마무리했으나 동료들의 얼굴을 보는 게 쉽지 않았다.
의외로 강준희의 이탈을 가장 의연하게 받아들인 건 지선일이었다.
당분간 동아리 활동을 쉬어 가면서 각자의 시간을 갖자고 제안한 것도 그녀였다.
이번 방학에는 던전 공략을 진행하지 않기로 추가로 합의하면서 휴식이 길어졌다.
그동안 김미솔과 설연호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모두의 안위를 살펴 주었다.
“동아리에서 나가고 싶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어?”
―전혀. 다들 크게 충격받은 건 맞지만 그런 의사를 보이는 사람은 없었어. 혹시 몰라서 연호랑 나랑 번갈아서 확인했으니까 그 부분까지는 마음 쓰지 마.
“그럴게. 고마워, 선배.”
김미솔은 평소보다 가라앉은 어조로 내가 알아야 할 사항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불법 마석 가공물에 대한 건 어느 순간부터 실마리가 막히더래. 이건 애들 말고 우리가 마저 알아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자세한 건 다 모였을 때 얘기할게.
“그래.”
―성물에 대한 소문은 완전히 잠잠해졌어. 정인이 말대로 그냥 때가 돼서 꼬인 어그로였나 봐. 어디가 됐든 자리가 덜 잡힌 커뮤니티에 분탕 치러 오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고 들었어.
입술을 굳게 다문 채 탄식을 삼키던 나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차민훈 선생님 소식은……. 뉴스에서 봐서 알겠지? 성문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같이 붙잡고 늘어질 것 같던데. 아, 애란이한테 들어 보니까 다음 학기부터는 정건후 선생님이 너희 반 담임 맡는다며. 내가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쭉 역사 과목이랑 현장 실습만 담당해서 그런지 뭔가 낯설다. 넌 어때?
“2학기는 조용히 다닐 수 있겠다 싶어.”
―소감이 그게 다야? 시시하긴.
“공희찬 선배는 선배가 잘 살펴 줘. 내 연락은 받지도 않더라.”
강준희의 이탈 소식에 가장 격하게 반응한 건 소식이 뜸하던 공희찬이었다.
크게 분노하면서도 허탈해 보이던 그는 이 사태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마지막으로 김미솔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통화를 종료했다.
때마침 차창 너머로 리호 길드 사무실로 향하는 길목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눈을 감은 나는 강준희와의 마지막 통화를 떠올렸다.
마지막까지 눈을 뜬 채로 천칭의 심판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았단 말이지.
그토록 강력한 신성력이 던전 전역에 퍼졌으니 의식과 기억이 남아 있었다면 내가 성물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어렴풋하게 눈치챘을 것이다. 어쩌면 범람에 성물에 관한 소문을 퍼뜨린 것도 강준희였을 테고.
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질문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내 곁에 남은 이들이 있었다.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몇 가지 일을 해결한 뒤 동료들을 다시 만나야 했다.
“도착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저 혼자서 안내하겠습니다.”
건물 내부로 진입한 리무진이 정차하자 윤해리가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그 호의를 구태여 거절하지 않으면서 윤해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날이 꽤 더워졌어요. 그렇죠?”
일 년 전 이맘때에도 방문한 적 있는 응접실은 여전히 쾌적했다.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설연리가 내게 음료를 권했다.
나는 예의상 차가운 얼음을 띄운 커피를 몇 모금 마신 뒤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설연리는 살가운 미소를 드리우며 재차 말을 걸었다.
“먼 길을 달려와 준 걸 보면 마음의 결정은 끝냈나 보네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전에 도해월 학생에게 궁금한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말씀하세요.”
그녀가 레몬 슬라이스가 가라앉은 투명한 잔을 내려놓자 표면에 띄운 박하 잎사귀의 향기가 맞은편으로 밀려왔다. 이어 경쾌한 음성이 잘게 부딪히는 얼음 소리를 갈랐다.
“얼마 전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헌터 아카데미의 차정주 이사장이 정건후 헌터를 포섭했다는 것 같던데. 알고 있었나요?”
그 부분에 대해서라면 나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날 교무실에서 나를 두둔하고 차민훈의 만행을 알린 정건후는 방학식을 마칠 때까지 내게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설연리까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걸 보면 이미 헌터 아카데미를 주시하는 다른 이들에게까지 소식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따로 전해 들은 건 없습니다. 제가 아직 학생인지라 어른들의 사정 같은 건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리는 게 적합할 듯하네요.”
대답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설연리 또한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건후에 대한 건 조만간 이야기를 청해 듣기로 하고, 다음 제안을 꺼내 볼까.
오늘 내가 설연리에게 만남을 요청한 건 지난 제안을 수락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어느덧 졸업까지 한 학기를 앞둔 시점이 되었으니 다가올 미래를 대비해 두어야 했다.
“처세술이 수준급이네요. 안부는 충분히 나누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그 전에 제안하고 싶은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현장에서 추가된 제안이라면 목적부터 분명히 해야겠네요. 리호에게 하는 건가요, 아니면 저에게 하는 건가요?”
설연리는 찰나의 머뭇거림 없이 곧바로 되물었다.
“설연리 헌터에게 제안하고 싶은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난 설연리는 잔을 쥐고 있느라 물기가 맺힌 손가락을 손수건에 닦았다.
이윽고 자세를 가다듬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어서 이야기해 보라는 듯 손짓했다.
근래에 들어 동료들과 정건후의 도움을 얻어 불필요한 인물을 제거하는 일이 많았다.
한동안 그들의 손을 빌렸으니 이제는 내가 그들을 대신하여 선두에서 나설 차례였다.
지금부터 내가 설연리에게 하고자 하는 제안도 그 이후의 일을 가정한 것이다.
“작년 겨울, 저와 함께 현장 실습을 참여한 조원들이 입장한 던전에서 벌어진 일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다소 뜬금없는 감이 있지만,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네요. 리호 측에서도 성문을 상대로 한 소송에 가담하여 헌터 아카데미에 도움을 제공하기로 약속한 것도 도해월 학생의 질문과 연관이 있어요.”
잠시 말을 멈춘 설연리는 내 반응을 지켜보다가 한층 진지해진 어조로 덧붙였다.
“리호에서는 한참 전에 해당 던전에서 도해월 학생과 다른 조원들이 투지를 발휘하지 못했다면 그날 용산에서는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 위험천만한 사태가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하도록 리호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보태고자 소송에 관여한 거라고 하면 이해가 수월하겠죠.”
이번 생에서는 용산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은 전생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차민훈과 성문 길드와의 유착 관계가 새롭게 밝혀진 이후 언론에서 날마다 성문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이 벌인 비리를 만천하에 밝히는 것이 그에 대한 방증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재차 불거진 논의가 내가 기억하는 방향대로 흘러간다면 일각에서부터 현재의 이능단속·관리본부의 입지와 규모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 차진명과 강효서가 이능단속·관리본부에서 온전히 자리를 잡는 이듬해 겨울부터 논의가 시작되겠지. 그리고 그들이 내부에서 세력을 만들고 차정주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즈음부터 이능청 승격에 관한 논의가 거론될 테다.
“제가 개인적으로 제안하고 싶은 것 또한 당시의 일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한 가지 더 묻고자 하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 * *
설연리와의 거래는 긴 시간의 논의 끝에 마무리되었다. 리호 길드 사무실에 방문한 것이 정오 무렵이었으나 용산에 자리한 사무실로 되돌아온 지금은 밤이 깊어져 있었다.
김미솔에게 별다른 언질 없이 방문한 사무실은 인적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날마다 방문하는 건지 사소한 흔적들이 남아 있는 공간을 가로질러 회의실로 다다랐다.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는 회의실을 밝힌 건 창밖에서 들이닥치는 도시의 불빛이었다.
나는 창문과 마주 보는 곳에 놓인 테이블에 걸터앉아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았다.
짙푸른 벨벳으로 감싼 상자에는 리호 측에서 준비한 무기와 보증서가 들어 있었다.
그 위로 손끝을 얹은 나는 부드럽고 딱딱한 감촉 아래에 자리한 것을 상기했다.
예상했던 대로 리호에서 준비한 건 전생의 내가 사용하던 것과 같은 무기였다.
그동안 버프 전용 백색 권총을 임시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고른 듯했다.
이로써 확실해진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이번 생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이나 사소한 부분은 전생과 달라질 수 있어도 미래로 향하는 큰 줄기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흐름에는 특정한 분기점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리고 지금은 지나온 시간을 토대로 내가 가정한 것이 맞는지 확인할 차례다.
숨을 길게 내쉬면서 옆에 놓여 있던 직사각형 상자를 무릎에 내려놓았다.
그대로 간단한 잠금장치를 해제한 뒤 뚜껑을 들어 올리면서 내용물을 확인했다.
어둠 속에서 전생에 내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백색 권총이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그 모습을 한사코 내려다보다 꺼내서 쥐어 보자 손아귀에 알맞게 감겼다.
놀랍도록 익숙했다. 생을 반복해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감촉이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무기 ‘레우코테아의 권총’을 획득하였습니다.] [‘레우코테아의 권총’이 사용자에게 귀속되었습니다.]어둠 속에서도 은근한 광채를 덧입은 권총은 이전 생엔 내가 직접 고른 물건이었다.
물보라의 여신 레우코테아에게 얽힌 이야기를 듣고 확실하게 결정했던 기억이 났다.
이윽고 다시 한번 어둠 가운데 푸른 빛을 품은 활자가 떠올랐다.
[미개방 스킬 ‘선택된 예언자’의 해금 조건을 일부 달성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솟치며 탄식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번 생에서 특정한 물건을 습득하거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미개방 스킬의 해금 조건일지도 모르겠다는 가설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획득한 권총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나는 불빛이 쉼 없이 산란하는 도시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날이 밝은 뒤 다른 사람들과 나눠야 할 이야기를 순서대로 정리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