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93
93화. 마지막 여름방학
다음 날, 나와 동료들은 환한 정오의 볕이 쏟아지는 회의실에서 다시 모였다.
자리를 채운 김미솔과 고정인은 테이블에 놓인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창가에 서서 남산타워의 전경을 바라보던 나는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대로 고개를 틀어 문간을 바라보고 있으니 따라서 고개를 든 고정인이 말했다.
“연호랑 다른 애들은 언제 와? 오늘은 7학년만 오는 거라고 했었나?”
방금까지 키보드를 두드리던 고정인이 깍지 낀 손을 허공으로 쭉 뻗었다.
곁에서 턱을 괴고 있던 김미솔도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으면서 대답했다.
“맞아. 오늘은 원하랑 애란이만 올 거야.”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이 내가 있는 쪽으로 옮겨 왔다.
간략하게 설명해 두었으나 그보다 더 자세한 걸 원한다는 눈빛이었다.
“서애란은 한참 전에 눈치채고 있더라. 아마 연호 선배가 리호를 이탈한 이후부터 감을 잡았던 것 같던데. 홍원하는 며칠 전에 나를 직접 찾아왔고. 걔한테도 슬슬 컨택이 들어갈 기미가 보이길래 말한 거야.”
범람에서 종종 언급되었던 대로 방학식 이후 길드 관계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직접적으로 컨택 요청을 받은 건 극소수였기에 특정인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홍원하는 범람에서 실명이 거론된 인물 중 하나였다. 반면 서애란은 자신의 부모를 따라 이능단속·관리본부에 입사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탓에 별다른 요청은 없었다고 했다.
그즈음에서 고정인은 노트북 주위로 펼쳐 둔 온갖 장비를 하나씩 집어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 곁에서 입술을 달싹이며 곰곰이 생각하던 듯한 김미솔이 말문을 열었다.
“원하가 유독 힘들어하기는 했어. 준희랑 첫 현장 실습부터 가깝게 지냈으니 속이 말이 아닌가 봐. 그래도 해월이 너랑 연호까지 만나고 온 뒤로는 조금씩 나아지는 게 보여서 그나마 다행이지.”
“그래, 설득하는 대로 넘어오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온다고 하지도 않았을 거야.”
순식간에 지저분하던 주변을 말끔하게 정돈한 고정인이 김미솔의 말에 곧장 대꾸했다.
김미솔의 말대로 며칠 전에 만난 홍원하는 기억하던 것보다 확연히 수척해져 있었다.
“학교에서 다시 만나면 따로 얘기 나눠 볼게. 선배들이 살펴 준 덕분에 길드 관련한 다른 일들은 수월하게 해결했으니까.”
“다른 애들도 한 번씩은 만나 봐. 우리가 걔네보다 한 학년 선배라 의지하는 것도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동아리를 이끄는 너한테 의지하는 마음이 사실상 더 클 거야.”
맞은편에 서 있는 나를 올곧게 바라보는 김미솔의 눈동자가 매끄럽게 빛을 냈다.
김미솔이 언급한 ‘의지’라는 것에 형상이 있다면 그녀의 눈에서 찾을 수 있을 듯했다.
내게는 그 투명하고도 무거운 것이 중심을 잡기 위한 추와 같이 느껴졌다. 강준희의 일로 여전히 심정적으로 소란했으나 나를 짓누르는 무게를 상기하면서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그 너머로 웅성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회의실의 문이 열리면서 설연호와 다른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들어갈게. 이쪽이 회의실이야. 들어와.”
자연스레 문간을 넘어선 설연호의 뒤쪽으로 머뭇거리는 홍원하가 보였다.
그 모습을 흘긋대던 서애란이 앞서 들어서면서 모두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원하랑 애란이 안녕! 다들 회의실에 온 걸 환영해.”
“더운 날에 멀리 오느라 고생했어. 원하 너도 빨리 들어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고정인과 김미솔이 차례로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편하게 구경해.”
그렇게 말한 나는 창문에서 조금 물러서면서 홍원하와 서애란에게 말했다.
그런 나를 묘한 눈길로 바라보던 홍원하가 창가로 서둘러 다가왔다.
“이래서 여기 오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했구나……. 난 해월이가 다른 길드 사람 못 만나게 하려고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보고 놀라서 턱 빠지는 줄 알았어.”
여과 없이 솔직한 홍원하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한쪽 입꼬리가 부드럽게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해서 마음에 들어. 건물 규모나 위치만 보면 다른 길드의 도움을 받은 것 같은데. 리호는 아니지?”
홍원하와 창가에 나란히 서서 바깥 풍경을 내다보던 서애란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을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설연호가 대신 대답했다.
“리호는 대신 다른 걸 제공하기로 했어. 자세한 건 회의 시작하고 나서 해월이가 마저 얘기해 줄 거야.”
설연호에게 가벼운 눈짓을 보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었다.
느슨하게 힘을 풀어 둔 자세로 창문 앞에 선 두 사람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와 줘서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부터 전할게. 오늘 두 사람을 부른 건 길드에 대해 전하려고 했던 것도 있지만 다음 학기부터 동아리 모임을 재개할 때 어떻게 하면 서로를 잘 다독이면서 분위기도 회복할 수 있을지 같이 얘기해 보고 싶어서였어.”
입속에서 내내 굴리던 말을 차근히 내뱉으니 홍원하와 서애란이 몸을 틀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이내 수긍하면서 앉은 자리를 찾아갔다.
“그럼 더 늦기 전에 회의 시작해 볼까.”
* * *
한 시간 남짓 동안 길드를 만들게 된 경위와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을 전달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던 서애란은 언제나처럼 차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반면 홍원하는 김미솔과 나를 번갈아 보면서 놀란 표정을 짓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홍원하의 곁에 앉은 김미솔이 그를 다독이면서 진정시키는 것 같았다.
“해월이 너도 나랑 똑같은 7학년이잖아. 근데 이걸 어떻게 다 준비했어? 애란이 넌 이미 알고 있던 눈치인 것 같았는데. 너는 또 어떻게 안 거야? 선배들이랑 미솔 누나는 왜 나한테 말 안 해 줬어요?”
설명을 마무리할 즈음 빠른 속도로 쏟아낸 홍원하가 모두를 돌아보았다.
특히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이전과 사뭇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다.
“범람에서 소문이 돌 때도 설마 싶었지. 졸업도 안 했는데 길드를 만든다니. 나 말고 다른 애들도 같은 생각이라서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을 거야. 근데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너…….”
탄식하듯이 말끝을 흐리는 홍원하를 지켜보던 고정인이 풉, 하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 곁에서 입술을 앙다문 채 웃음을 참던 김미솔도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 대단한 해월이가 어제는 리호 길드에서 이야기도 나누고 왔다고 하더라. 우리 길드 얘기는 얼추 마친 거면 그것도 설명해 줘.”
선이 뚜렷한 눈매를 부드럽게 휘면서 웃던 설연호가 홍원하를 토닥이면서 말했다.
그런 홍원하에게 눈길을 두고 잠자코 관찰하던 서애란이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연호 선배 말대로 전날 리호 길드 사무실에 방문해서 설연리 헌터랑 몇 가지 협의를 거치고 왔어.”
공연히 어깨를 들먹거리며 홍원하를 지켜보던 내가 재차 말문을 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취우 길드와 마찬가지로 리호도 우리랑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로 약속했어. 내년 초에 길드가 공식적으로 창설됐을 때 연호 선배가 여기에 속해 있다는 걸 알아챈 사람들이 관련해서 헛소문을 퍼뜨릴까 봐 미리 대비한 거야.”
나는 모두의 시선이 한데 모이는 중앙을 거닐면서 이야기한 뒤 반응을 확인했다.
노트에 무언가를 받아 적던 김미솔까지 주억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말을 이었다.
“선배들한테는 미리 얘기했던 대로 앞으로 리호 길드에 제공한 무기를 사용하기로 했고. 혹시라도 나만 받았다고 해서 서운해하는 사람은 없었으면 해. 또 하나 중요한 건 각자의 길드에 심복을 심어 두지 않기로 했다는 거야.”
이 사항을 협의할 때의 설연리는 순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으나 선선히 수락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누나를 설득하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협의한 거야?”
대규모 길드 혹은 이능청을 비롯한 곳곳에 각자의 심복을 심어 두는 건 헌터 사회에서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작정하고 뜻을 함께한다고 해도 상대방을 온전히 믿는 쪽이 손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는 설연호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잠시 고심했다. 그와 관련하여 설연리와 합의한 지점이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한참 미래의 일을 대비하기 위해 구비한 패라고 볼 수 있었다.
당장 꺼내는 것보다 때를 기다리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줄게. 당장은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라서.”
잠시 허공을 응시하면서 고민을 끝마친 나는 정중한 어조로 모두에게 양해를 구했다.
“얘기 잘 들었어. 어쨌든 리호 쪽에서도 이득이 되는 거래를 하고 싶었을 테니 해월이 너한테만 무기를 제공한 것도 이해해.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리고……. 음, 원하랑 애란이는 오늘 이야기 들었으니 됐고, 예성이는 어떻게 할 거야?”
이야기가 얼추 정리될 즈음 김미솔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곁에서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던 고정인이 대꾸했다.
“사실 예성이도 눈치챈 것 같았어. 걔는 내가 혼자서 재미있는 걸 한다 싶으면 귀신같이 알고 따라오거든. 어릴 때부터 그랬어. 아무튼, 이제 7학년까지 돼서 철이 든 건지 내가 말하기 전까지 아는 척 안 하려고 애쓰는 것 같더라.”
“이미 알고 있는 거라면 선배가 적당하다고 생각할 때 대신 전해 줘. 그렇게 얘기했을 때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그때는 내가 다시 얘기해 볼게.”
허리춤에 한쪽 손을 얹은 채 창문을 내다보니 어느새 낮이 지나가 있었다.
차츰 어둑한 빛이 새어 드는 상공에 시선을 두고 있으니 고정인이 말을 이었다.
“알았어. 그러면 7학년들도 수월하게 데려올 수 있게 됐고……. 이렇게 모인 김에 준희 얘기도 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동안 소식만 접하고 모여서 제대로 얘기해 본 적은 없었잖아. 다들 어떻게 생각해?”
그래, 그 이야기가 남아 있었지.
* * *
밤이 깊어져 유리창에 회의실 내부의 모습이 반사될 때까지 대화가 이어졌다.
강준희의 이탈과 행방을 두고 저마다 가지고 있던 의구심은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우리를 떠난 건 강준희 본인의 선택이었을까?
그에 더하여 강준희에게 누군가 강요한 건 아니었을지, 어째서 그 사실을 짐작하지 못했는지 되풀이해 묻던 동료들은 서애란의 말을 듣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건 분명 강준희의 선택이었을 거예요.’
그와 동시에 나를 올려다보던 동료들의 눈빛에서 어째서 이런 사실은 예측하지 못한 거냐는 질문이 읽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건 내가 손을 뻗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나조차도 어찌할 수 없었기에 더욱 분하고 답답했다. 그와 동시에 차진명이 나에게서 강준희를 데려간 이유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홍원하의 질문이 목울대에 가시처럼 박혀 따끔거렸다.
‘그런데 우리가 준희를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적으로 만나면 어떡하죠?’
어머니의 국수 가게까지 정리하고 사라진 강준희가 차진명의 세력에 포섭되었으리라는 예측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홍원하가 했던 질문을 변주하면서 전생에서 나를 떠났거나 내가 떠나보냈던 사람들까지 떠올려 보았다. 특히 차진명의 분부를 받고 내 손으로 처리해야 했던 사람들이 아직도 눈에 밟혔다.
나는 그들을 언제쯤 다시 만나게 될까?
헌터 아카데미에서 만난 강준희를 잃은 것과 별개로 나에게는 앞으로 찾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살려 내야 하는 사람은 정건후와 서애란 말고도 수두룩했다.
그러므로 지금의 좌절을 내내 머금고 살 수는 없었다.
다음 계절이 오기 전까지 온몸으로 밀고 나가면서 강준희의 부재를 극복해야 한다.
나는 그제야 걸터앉은 테이블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홀로 남은 회의실의 적막 속에서 남은 여름날의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