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94
94화. 재정립
한도일이 만남을 청해 온 건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몇 주 지났을 무렵이었다.
직접 마주하는 건 겨우 두 번째였으나 오늘 내가 앉아 있는 자리는 의외의 곳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만난 지 두 번밖에 안 된 사람을 집무실로 부르다니.
분명 다른 속내가 있을 듯하지만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아 내부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초록빛과 고동색이 어우러진 공간은 거대한 나무를 연상시켰다.
한도일이 사용하는 책상 맞은편에는 회의를 위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과 맞닿은 벽면에는 광화문 일대의 지도가 걸린 것이 보였다. 외에도 필요한 물건만 간소하게 놓인 공간은 나와 동료들이 사용하는 회의실과 달리 창문은 없었으나 아늑하면서 단단한 인상을 주었다.
머지않아 의자를 하나 끌어 착석한 채로 다시 둘러보니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 생에는 존재하지 않을 총사령관 집무실의 풍경이 문득 겹쳐 보았다.
그곳에 있을 때면 언제나 은근하게 숨이 막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무의식적으로 숨을 길게 내뱉은 나는 현재의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을 계산해 보았다.
S급 헌터의 위상에 걸맞게 꾸며져 있던 집무실을 잃은 것이 아쉽지는 않았다.
현재의 나에게는 용산에 막 자리를 잡은 길드 사무실이 더 중요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회의실만 사용하고 다른 공간은 들어가 보지도 않았던 것 같네.
문득 지금도 용산 사무실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을 세 사람을 떠올리니 한숨이 나왔다. 이전 생에는 차진명이라는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으나 이제는 동료들과 힘을 합쳐 낙하산을 직접 만들어야 할 판이었다.
문제는 그 낙하산을 어떻게 만들지, 무엇으로 만들지 결정해야 하는 게 나라는 거지.
설연호와 취우 길드 헌터의 도움을 받고 있었음에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이 먼저 검토한 사안을 내가 다시 한번 점검하고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려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날마다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게 한도일의 귀에도 들어간 건가.
그게 아니라면 굳이 여기까지 부를 이유가 없을 듯한데.
그렇게 고심하면서 문간을 쳐다보고 있으니 한도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름이 완연해지면서 한층 가벼운 소재의 양복을 입은 그가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저희 측 헌터를 통해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다시 보니 또 반갑네요. 아직 방학이라고 했었죠?”
얇아진 옷차림과 가지런하게 넘긴 머리카락 때문인지 그의 이국적인 눈매와 시원스레 웃는 모습이 한층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일어서서 인사하려는 나를 저지하면서 맞은편에 착석했다.
“인사는 아까 나눴으니 됐습니다. 앉아 있어요.”
그의 권유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자세를 고쳐 앉은 나는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실례일 수도 있습니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거죠?”
“이곳에 저만 두고 자리를 비우신 건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였는지 궁금합니다.”
그러자 다시금 입가에 호선을 그리던 한도일이 대답하는 대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취우 쪽에서 저희에게 과분할 만큼의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인도 없는 집무실에 들어와도 괜찮을 만큼 저와 한도일 마스터의 사이가 막역하진 않은 것 같은데요. 어째서 응접실이 아닌 집무실에서 보자고 하신 건가요.”
에둘러 말했으나 혹여 내가 집무실의 위치를 기억해 두었다가 위험한 일을 저지르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건지 궁금하다는 뜻이었다.
“도해월 학생은 보면 볼수록 신기한 구석이 있어요. 본인이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하기도 전에 길드의 터를 잡고 이것저것 준비하는 것 정도는 수긍했습니다. 준비성이 철저한 몇몇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를 직접 개척해 나가려고 하니까요. 그러다 보니 더불어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생기더군요.”
한도일은 설명을 이어 나가지 않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나에게 생각할 만한 시간을 주고 원하는 대답을 도출하려는 듯했다.
“사무실 자리를 빌려주신 것도 임시로 대여해 주시는 개념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부르신 이유도 제가 어떤 대답을 하는지 우선 들어 보고 앞으로의 지원 여부를 결정하기 위함은 아닌가 싶은데요.”
이번에는 에둘러 말하지 않고 그의 속내를 짐작한 대로 꺼내 놓았다.
내 대답이 곧 한도일이 바라던 것이었는지 그가 선선해 주억이며 입을 열었다.
“네, 정확합니다. 이때까지 설연호 헌터와 취우 소속 헌터가 상의한 내용을 꾸준히 전해 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도해월 학생이 길드를 창설하려는 이유가 단순한 돈벌이나 마음 맞는 사람들과 일해 보려는 의도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더군요.”
취우가 우리를 돕는 데는 한도일이 나에게 품은 호의도 있겠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이 한층 명확해졌다. 그가 나에게 또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은 한참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대로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들과 소규모 길드를 꾸려서 운영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드는 규모를 넓히는 대신 생계를 넉넉하게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의 안정만 유지한다고 하죠. 하지만 그 정도에서 그칠 거였다면 도해월 학생은 취우의 도움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말은 일부러 나와 동료들이 부담스러워할 만큼의 호의를 제공했다는 뜻이 된다. 그동안 나를 시험해 보려는 의중도 영 없지는 않았나 보네.
“지금까지 확인한 여러 사항의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한 가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도해월 학생과 학생의 길드가 바라보는 지향점이 무엇인지 먼저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사무실을 대여해 드리는 건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니 부담은 갖지 말고 편하게 얘기하시면 됩니다.”
한도일이 굳게 다문 입술로 호선을 그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한가득 쌓인 서류에 눈길을 잠시 두었던 나는 금세 고개를 들었다.
“작년 겨울에 진행한 현장 실습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가능성을 막는 동안 내내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막아 내기는 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나는 언젠가 한도일이 물어볼 것을 대비하여 내내 곱씹었던 말을 차분하게 전달했다.
“성장하고 싶습니다. 위험이나 한계에 부딪히더라도 기껍게 넘어설 수 있을 만큼 강해지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한도일은 나에게 궁금한 것이 더 생긴 건지 이런저런 질문을 거듭했다.
그는 내가 졸업한 이후에 어떤 헌터로 활동하고 싶은 것인지 상세하게 물어봤다.
이건 꼭 내가 동료들을 보던 관점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한도일의 눈에는 내가 알을 막 깨고 나온 병아리처럼 보이는 듯했다. 어쩐지 조금 떨떠름했으나 이어지는 그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어서는 한참 전부터 쌓여 있던 각종 서류를 한도일과 함께 점검했다.
길드 사무실 대여 관련 계약서부터 신규 길드 창설 신고를 위해 어떤 서류를 준비해야 하는지 점검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거 진짜 쉽지 않네…….
나도 모르게 탄식하거나 헤매는 순간에도 그는 언성을 높이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어쩌면 그도 정건후처럼 나를 자신이 가르쳐야 하는 제자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이어서 한도일은 나에게 길드 소속 헌터와 이능단속·관리본부 소속 헌터의 차이점부터 시작해 길드 마스터의 마음가짐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조언해 주었다.
“지금 기거하는 사무실은 계약 기간이 지난 뒤에도 계속 사용하셔도 됩니다. 관련해서는 때가 되었을 때 다시 상의해 보도록 하죠.”
“네.”
“이제 굵직한 것들은 대부분 해결했으니……. 던전 공략 헌터와 사무직 헌터의 비율을 조정해 볼까요?”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뜨면서 숨을 고르니 한도일이 차가운 음료가 담긴 잔을 내 앞쪽으로 밀어 주었다.
“벌써 지치면 안 될 텐데요.”
그리고 그 말이 무색하지 않게 직접 확인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부에서 활동하던 헌터를 스카우트하여 데려올 경우의 협의 사항과 계약 조건을 살필 즈음부터는 가만히 있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길 원한다면 어느 정도 규모가 확장되었을 때부터 사업을 시작해 보는 게 좋을 겁니다.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노트에 한도일의 말을 적어 넣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면서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 이능단속관리본부 내부에 알고 지내는 헌터가 있나요?”
음, 떠오르는 이름이라고 해 봤자 차진명이나 강효서밖에 없는데.
“없는 것 같네요. 이제라도 조금씩 인맥을 넓혀 보는 게 좋을 겁니다. 이능단속관리본부에서 뜬금없이 내려온 지시로 인해 길드 구성원 전체가 곤란해질 만한 일을 겪지 않으려면 미리 창구를 만들어 두는 게 중요하거든요.”
일리 있는 조언이었다. 과거의 차진명이 이능청의 승격과 함께 헌터 특수 정예 부대를 창설한 것도 외부 길드의 권위를 억누르고 나아가 제멋대로 주무르기 위함이었으니까.
차진명과 강효서를 제외하고 당장 떠오르는 건 서애란의 부모 정도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없으니 좀 더 알아봐야 할 터였다.
“지금까지 고생했으니 잠시 환기할 겸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줄까요?”
음, 뭐 굳이……. 라고 생각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리하게 간파했으니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이곳은 제 집무실이 아닙니다.”
그럼 그렇지. 참 정성스럽게도 꾸며 놨네.
짧은 고민 끝에 그럴 줄 알았다는 대답을 하는 대신 남아 있던 서류를 끌어 그의 눈앞에 내려놓았다.
* * *
밤이 깊어질 무렵 용산의 사무실로 복귀했으나 내부는 온통 캄캄했다.
약속과 말이 달라졌나 싶어 의아했으나 회의실은 불을 밝힌 상태였다.
한층 무거워진 발과 그보다 더 무거운 서류 더미를 안고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다가오면서 차례로 목소리를 냈다.
“왔어? 낮에 만난다고 하더니 밤이 다 돼서 왔네. 고생 많았어.”
“가장의 무게라는 게 원래 그런 거야. 힘들어도 견뎌야 돼, 도해월.”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네오는 김미솔의 곁에서 홍원하가 말을 얹었다.
그 두 사람과 연이어 눈을 마주치던 나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무거울 텐데 우리한테도 줘. 이 많은 걸 오늘 다 보고 온 거야?”
앉은 자리에서 고정인의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설연호가 일어섰다.
곧바로 내 근처로 다가오더니 서류 더미에서 일부를 가져가 내려놓았다.
“어, 해월이 왔구나! 정신이 없어서 온 것도 몰랐네. 수고했어, 진짜.”
내내 노트북 화면이 뚫릴 것처럼 쳐다보던 고정인이 손을 흔들었다.
“이제 온 거야? 생각보다 늦었네.”
잠시 밖에 다녀오는 건지 뒤이어 들어선 서애란을 돌아보면서 눈인사를 건넸다.
“근데 사무실 불이 왜 다 꺼져 있는 거야? 무슨 일 있어?”
서류를 차례로 내려놓고 한쪽 어깨를 돌리던 내가 물었다.
그러자 서로를 힐긋거리던 이들이 김미솔을 바라보았다.
“어른들이 왜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 하잖아. 우리 집에서 내 지분은 화장실밖에 없고 다른 건 다 은행 거라고. 따지고 보면 우리도 비슷한 것 같아서.”
테이블에 한쪽 손을 얹으며 느슨하게 기대어 선 김미솔이 말했다.
순간 회의실 내부에 측은한 분위기가 감돌면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무실이 이렇게 넓다고 해도 사실 우리 지분은 여기 이 회의실 정도밖에 안 되니까. 당분간 이렇게 지내기로 우리끼리 먼저 합의했어. 사무직 헌터들 몫으로 준 물건들은 포장지도 하나 안 건드렸고. 아무튼, 해월이 너도 괜찮지?”
“물론.”
선선히 수긍하면서 대답하자 한가득 쌓인 서류 근처로 모여들었다.
머지않아 나를 두고 자기들끼리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 이것부터 확인해 볼까? 다 보려면 밤새야 할 것 같은데.”
“그러게. 어떤 것부터 보면 되지? 이건가?”
“이거부터 보면 되겠다. 다들 앉아서 마저 보자.”
나는 그들의 어깨 너머로 탁 트인 창문에 시선을 옮겼다.
어김없이 찾아온 여름날의 환한 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