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96
96화. 여름 휴가 (2)
반나절 동안 이어진 물놀이는 하늘이 짙은 보랏빛으로 물든 뒤에야 끝을 맺었다. 나와 동료들은 포말이 얕게 가라앉는 쪽에 다리를 두고 누워서 하늘을 보았다.
쏟아질 것처럼 빼곡한 천체의 행렬이 느릿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밤이 깊어질 무렵이었으나 환하게 쏟아지는 빛으로 인해 주위는 조금 어둑하기만 했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으니 바람이 밀려왔다.
이곳의 바람은 습기를 머금지 않은 것인지 닿기만 해도 살갗이 보송해져 쾌적했다.
“이렇게 누워만 있으니까 진짜 꿈만 같다.”
홍원하의 목소리가 넌지시 울리자 그쪽을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란히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는 얼굴을 하나씩 살피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게. 이런 곳에 들어오려면 서류 절차도 복잡하고 돈도 많이 든다고 해서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 같은 사람도 마음 편히 들어올 수 있는 던전이 있다니. 진짜 천국이다.”
어느새 두 손바닥을 겹친 채 그 위에 뒷머리를 얹고 있던 고예성이 말했다.
내 곁에 누워서 느릿하게 호흡하던 문제혁의 얼굴에도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하잖아요. 솔직히 그렇게까지 할 만큼 좋은가 싶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돼요.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어요.”
상체를 세우고 앉아서 낮게 밀려오는 파도에 손끝을 적시던 지선일이 웃어 보였다. 지선일의 바람과 달리 쉼 없이 흘러가는 은하수를 지켜보던 나도 숨을 길게 쉬었다. 다들 던전 바깥에서 있었던 다른 일들은 전부 잊고 휴식하는 듯해 실로 다행이었다.
머지않아 맞은편에서 저벅거리며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서애란이었다.
“근처에 있는 벌레는 내 스킬로 전부 내쫓았으니까 편하게 있어도 돼. 그나저나 다들 계속 누워 있을 거야?”
누운 자리에서 서애란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꼬르륵―
“방금 소리 낸 사람이 오늘 제일 열심히 논 것 같은데. 누구야? 솔직하게 고백해도 안 놀릴게. 약속해, 진짜로.”
모래사장을 짚고 벌떡 일어나서 양심선언을 하듯 가슴에 손을 얹은 홍원하가 말했다.
“누구긴 누구야. 원하 너겠지.”
“어? 나 아닌데?”
따라서 주섬주섬 일어난 고예성이 홍원하의 등을 툭 치고 서애란 쪽으로 걸어갔다.
뒤이어 대꾸하면서 따라가는 홍원하를 보다가 나도 누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곁에 있던 문제혁과 지선일의 팔을 당겨 차례로 일으켜 주고 옷을 털었다. 이내 팔다리와 손바닥에 남아 있던 모래를 털던 나는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배고플 텐데 캠핑 짐은 이따가 풀고 저녁부터 먹자.”
* * *
그로부터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일련의 흐름이 순서대로 이어졌다.
다시 물에 들어간 홍원하가 물거품 그물을 활짝 펼쳐 놓는 것이 보였다.
지선일이 그물 안쪽으로 미끼를 형상화하자 순식간에 물고기가 모여들었다.
저 둘은 다시 가까워진 건가. 나중에 따로 물어봐야겠어.
한편 모래사장에서는 고예성이 간이 식탁에 색색의 과일을 내려놓고 손질하고 있었다. 곁에 있던 문제혁은 조각난 과일과 얼음 결정을 한꺼번에 갈아서 스무디를 만들어 냈다. 그 옆으로 서애란이 텐트 근처에 모닥불을 지핀 채 근처에 의자를 세팅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있던 나는…….
고예성이 다져 둔 모래 안에서 강제로 찜질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동안 동아리장으로서 고생했으니 오늘만큼은 쉬라면서 억지로 앉혀 둔 탓이었다.
앉은 자세에서 허리춤까지 모래에 파묻힌 채 가만히 있으니 바람이 불어왔다. 마찬가지로 고예성이 스킬로 엮은 꽃목걸이의 꽃잎이 흔들리면서 향기가 훅 끼쳤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피식거리면서 웃음이 나왔다. 과거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영영 느끼지 못했을 순간이 유난히 귀하게 느껴졌다.
“됐다. 다들 와서 밥 먹어요!”
모닥불에 얹은 철판에 한가득 쌓인 물고기를 굽던 지선일이 모두에게 손짓했다. 홍원하도 동조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불에 그을린 건지 둘의 뺨이 거뭇했다.
“고예성, 나 좀 꺼내 줄래.”
부지런하게 음식과 식기를 나르던 고예성을 부르자 그제야 팔을 당겨 꺼내 주었다. 모래사장에서 잠시 휘청이던 나는 식사가 마련된 곳으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노릇하게 구운 생선과 알록달록한 스무디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맛이 좋았다. 몇 번 씹기만 해도 부드럽게 녹는 흰살생선의 살점은 삼삼하면서도 중독성이 있었다.
문제혁이 따라 준 다홍빛 스무디를 몇 모금 마시니 갈증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마시는 동안 코끝에 상쾌한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것도 꽤 매력적이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가득 채워져 있던 잔을 단숨에 비운 홍원하가 눈을 빛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문제혁이 새로운 잔을 건네자 냉큼 받아 들었다.
“오, 잘 마실게. 고마워.”
“배탈 안 나게 천천히 마셔.”
젓가락과 접시를 겹쳐서 정돈하던 나는 홍원하를 보며 한마디 보탰다.
한바탕 이어지던 식사 자리도 차츰 정리되면서 모닥불 타는 소리만 짙어졌다.
“생각해 보니까 단체로 놀러 온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아요.”
일렁이면서 타오르는 불길에 시선을 두고 한참 바라보던 지선일이 말했다.
“그래? 나는 늦게 들어왔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제혁이랑 선일이까지 포함해서 놀러 온 게 처음이라는 말 맞지?”
“맞아요. 저랑 선일이는 동아리에 늦게 들어오기도 했고, 그 전에 선배들끼리도 이렇게 노는 시간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네요.”
고예성이 넌지시 묻는 말에 문제혁이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슬슬 자리를 정돈했다.
“다 먹었으면 정리할까? 아까 원하가 마시멜로 구워 먹자고 했던 것 같은데.”
사용한 물건들을 하나씩 집으면서 이야기하자 서애란이 근처에서 대꾸했다.
“저쪽에 초콜릿이랑 비스킷도 준비해 뒀어. 가져와서 먹기만 하면 돼.”
나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던 서애란이 고갯짓으로 근처를 가리켰다.
그러자 잠시 앉아 있던 지선일이 훌쩍 일어나 준비해 둔 간식거리를 챙겨 왔다.
“마시멜로도 제가 구울게요.”
* * *
식후 간식까지 챙겨 먹은 뒤에는 다시 휴식 시간이 이어졌다. 고예성이 만들어 준 대로 비스킷 사이에 초콜릿과 녹인 마시멜로를 넣어 먹고 있으니 문득 설연호가 떠올랐다.
설연호나 다른 졸업생들도 같이 왔으면 좋아했을 텐데.
혀끝이 마비될 만큼 강한 단맛에 눈가를 찡그리면서도 손에 쥔 것은 천천히 먹어 치웠다. 속을 채우고 나니 기력이 보충된 건지 어둑해진 바닷가를 활보하는 이들이 보였다.
어느새 손을 비운 나는 소화도 시킬 겸 주위를 천천히 거닐었다. 모래사장에서 이어지는 섬의 안쪽에는 숲이 자리한 듯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숲의 형상을 눈에 담아 보니 익숙한 장면이 떠올랐다. 작년 1학기 현장 실습에서 성물이 보관되어 있던 숲도 대강 이런 모양새였는데.
그때는 오로지 성물 하나만 생각하느라 다른 풍경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정해진 구역 내에서만 움직인다면 위험할 것도 없으니 산책을 나가 볼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바닷물에 씻은 손을 털면서 다가오는 문제혁이 보였다.
문제혁은 내가 바라보던 숲의 안쪽을 잠시 내다보더니 선뜻 말문을 열었다.
“저쪽으로 들어가 볼래? 산책도 할 겸.”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서 넌지시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와 마주 보고 있으니 문득 여름 내내 제대로 휴식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해변 근처에 놓인 작은 컨테이너를 돌아보았다.
사무실처럼 개조한 공간에 이 던전을 관리하는 길드에서 파견 나온 헌터가 대기하고 있을 터였다.
“우리 산책 다녀올게.”
물가에서 한창 물놀이 중인 이들에게 외치자 크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함께 어울려 놀고 있는 모습에 눈길을 두고 오래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모래사장과 이어지는 숲길을 따라서 걷고 있으니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곳곳에 선 나무와 길게 뻗은 잎사귀가 사락거리는 소리까지 더해졌다. 저벅거리며 걷는 동안 나와 문제혁 사이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몇 걸음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나무를 손끝으로 짚어 보던 문제혁이 말했다.
“이번 기회로 다들 마음이 어느 정도는 풀린 것 같아.”
“그러게. 다행이야.”
간결하게 대꾸하면서 마른 흙을 밟고 나아가던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묵묵히 걷다가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드는 문제혁이 갸웃거렸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음, 각성자로 지내는 건 어때? 예전의 삶이 그립지 않은가 싶어서.”
내가 건넨 질문에는 나만 알 수 있는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문제혁의 대답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나 그래도 묻고 싶었다.
전생의 나와 현재의 내 모습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전의 삶에서 나를 알던 이들이 지금의 나를 보면 뭐라고 얘기할까.
문제혁이 대답을 유예하는 동안 풀벌레 소리가 짙어졌다.
계속해서 걷다 보니 숲의 가운데까지 다다른 듯했다.
“그래도 나는…….”
그가 무어라 대답을 하려던 순간 걸음을 우뚝 멈췄다.
“형, 잠시만.”
나지막하게 내뱉는 목소리에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해 있었다. 섣불리 대답하는 대신 마른 입술을 축이면서 눈길을 낮췄다. 문제혁의 밑창이 무른 열매를 짓밟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주위로 과육이 짓이겨 나오면서 썩은 내가 서서히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밟으면 안 되는 걸 밟은 것 같아.”
그대로 거동을 멈춘 채 신발을 내려다보던 문제혁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 던전은 등급이 상승할 가능성이 없다고…….”
기억나는 대로 중얼거리다가 말끝을 흐렸다. 불현듯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관광지로 개방된 던전이라고 해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니 매 순간 경계를 유지하도록 해. 특히 관광 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은 곳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거다. 그 너머에 있는 걸 잘못 건드렸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귓가에 되살아나는 정건후의 목소리를 따라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을 뒤덮을 만큼 울창하게 자란 나무 그늘로 인해 어두워져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분명 숲의 초입까지는 관광 가능하다고 했는데. 문제가 있었으면 같이 들어온 헌터가 먼저 막았을 거야.”
눈가를 찡그린 채 계속해서 돌아보았으나 특별히 남아 있는 표시가 없었다.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힌 건지 벅차게 호흡하던 문제혁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열매가 문제인 것 같아. 아까 애란 선배랑 돌아다닐 때는 이런 열매를 본 적이 없었어. 밟자마자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는 것도 이상해.”
툭.
투둑.
투두둑. 툭.
“이건 또 뭐야.”
문제혁의 말을 듣고 열매를 다시 보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살갗에도 들러붙는 끈적한 액체를 손끝으로 쓸어 내려다보니…….
“설마, 피?”
주위가 어둑한 탓에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으나 검붉고 끈적한 것이 혈흔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검붉은 액체가 소나기처럼 내리기 시작한 순간 문제혁이 비명을 질렀다.
“악!”
그와 동시에 내 어깨를 강하게 밀친 문제혁으로 인해 뒤로 밀려났다. 지면으로 툭 불거진 굵은 나무뿌리에 주저앉자마자 일어서려 했으나.
방금까지 메말라 있던 흙이 축축해지더니 발목이 푹 빠졌다.
맞은편에서는 열매를 밟은 자세 그대로 굳은 문제혁이 늪지대에 가라앉고 있었다.
“형! 나 다리가 안 움직여!”
다급하게 몸을 내던져 문제혁의 팔과 어깨를 붙들었다.
어느새 무릎까지 진흙에 빠진 그를 힘껏 잡아당기려던 그 순간.
[알 수 없는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알 수 없는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알 수 없는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해당 던전의 최종 보스가 변경되었습니다. 던전 등급이 상승합니다.] [던전 이름이 변경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