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97
97화. 여름휴가 (3)
검붉은 비는 눈길에 닿는 모든 것을 척척하게 적신 뒤에야 그쳤다. 알 수 없는 액체가 온몸에 들러붙은 탓에 숨을 쉴 때마다 속이 역해졌다.
비가 그친 사이 문제혁을 늪지대에서 빼내고 해변에 있을 아이들을 찾아 걸어온 지 한참.
본능적으로 치미는 욕지기를 삼키면서 주먹을 힘껏 쥐고 앞을 내다보았다.
굵은 나무뿌리가 한껏 두드러진 곳을 확인한 뒤 보폭을 힘껏 넓히며 뛰었다.
“아까도 이 뿌리를 똑같이 밟았던 것 같은데. 계속 원점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드는 건 내 착각일까.”
먼저 징검다리를 건너듯 훌쩍 뛰는 사이 문제혁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뒤쪽에서 기다리던 그가 나무뿌리를 건너왔다.
나와 문제혁이 고립된 숲은 순식간에 늪 지형으로 변모해 버렸다. 귓가를 간지럽히던 풀벌레 소리도 고막을 찢을 것처럼 사나워졌다. 간신히 문제혁을 빼낸 뒤에는 섣불리 걸음을 내딛지 못하게 되었다. 어두워진 숲에선 적당히 넘어설 수 있는 길목과 아닌 곳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고안해 낸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먼저 안전한 지대인지 확인한 뒤 걸음을 뗐다. 그 뒤로 문제혁이 내가 지나왔던 궤적을 되밟아 나아왔다.
이윽고 훌쩍 넘어오느라 상체가 앞으로 쏠린 문제혁이 내 어깨를 쥐었다.
힘껏 쥐고 있는 손아귀가 미약하게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착각이 아닌 것 같아. 저기 있는 저 나무는 아까도 봤던 나무가 분명해. 만약 지금 우리가 환시에 갇혀 버린 거라면 아까 밟은 그 열매 때문이 아닐까.”
차츰 차오르는 갈증으로 인해 마른 입술을 축이면서 말했다.
내 뒤에 바짝 붙어서 거친 숨을 고르던 문제혁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내가 형한테 매달리다가 귀환석을 놓치지만 않았어도 이러진 않았을 텐데.”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걸 들으면서 시선을 떨구었다. 문제혁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놓쳐 버린 귀환석은 늪지대에 빠져 사라지고 말았다.
“여기서 나가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해변 쪽에 있던 사람들을 찾거나, 아니면 최종 보스를 찾아서 공략하면 돼. 되도록 전자의 방법으로 해결해야겠지.”
나는 문제혁을 돌아보지 못하는 대신 팔을 뒤로 뻗어 그의 손등을 다독였다.
한숨을 다 삼키지 못한 건지 끝내 숨을 길게 쏟아 내던 문제혁이 이어서 말했다.
“미안해, 형. 내가 그 열매를 밟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야.”
뒤쪽에서 간신히 내뱉는 소리가 한없이 처량했다.
아마 한참 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문 나는 앞을 내다보았다. 발을 얹고 있을 만한 나무뿌리가 한참 떨어져 있는 채였다.
나는 근처에 있던 자갈을 주워서 정면으로 힘껏 내던졌다.
그대로 가라앉지 않고 질퍽하게 내려앉는 걸 보니 늪은 그리 깊지 않아 보였다.
“사과하지 마. 사과가 필요한 일이었으면 진작 말했을 거야.”
가볍게 숨을 고른 나는 발을 뻗어 진흙 더미를 지나 나무뿌리를 밟았다.
내 말을 듣고 망설이고 있는 건지 문제혁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여기서 나가면 훈련을 좀 더 열심히 해야겠어.”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던 나는 그 말을 듣는 즉시 문제혁을 돌아보았다. 돌아볼 걸 예상한 건지 고개를 수그린 탓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전생의 내가 유스티티아의 검을 습득했던 때가 떠올랐다.
이미 틀어져 있던 문제혁과 나의 사이는 그날을 기점으로 영영 돌이킬 수 없게 됐다. 남은 기억을 한사코 돌아보지 않던 나와 달리 문제혁은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내가 그에게서 돌아선 이유가 문제혁 자신에게서 있는지 점검하려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유나를 떠올리는 서애란처럼.
전생의 부대원을 상기하는 나처럼.
문제혁도 계속해서 생각했을까. 그때의 내가 그에게 했던 모진 말들을.
“이보다 더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상관없어. 얼른 이쪽으로 와.”
나는 말문을 맺으면서 문제혁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사이의 거리가 꽤 넓은 탓에 지지대가 필요할 터였다.
문제혁은 머리카락과 얼굴이 온통 검붉게 물들어 엉망이 된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꼿꼿하게 마주하면서 손을 조금 더 내밀었다.
조금 더 고민하던 그가 내가 밟았던 궤적을 그대로 지나쳐 나아왔다. 진흙에 발목이 빠지기 전에 다시 도약하면서 내 손을 잡고 나무뿌리를 밟았다.
문제혁의 손을 힘껏 붙잡은 나는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해 주었다.
나지막한 소리에 끄덕여 보이던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다시 정면을 보았다.
“아무래도 가망이 없는 것 같지.”
나는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걸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혹시 모르니 좀 더 걸어가면서 길을 찾아보자고 한 건 문제혁이었다.
귀환석은 사라졌어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 가정하는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그를 잘 알고 있는 나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문제혁은 실제 던전에 입장한 경험이 극도로 적었다. 그리고 지난 실습에서도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실수했다는 걸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필 그 실수로 조원들 전부가 위험에 휘말렸다고 했었지. 하필 같은 학년의 지선일이 최우수 조장으로 선발된 터라 자신과 그녀를 비교하면서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해서 가만히 구조를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문제혁을 재촉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의 반응을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형 앞이니까 솔직히 말하는 건데, 지금 너무 무섭고 긴장돼.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다가 우리가 많이 늦으면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겠지. 그리고 또 나한테는 형이 있으니까…….”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리던 문제혁이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여기서 나갈 수 있는지 확인해 줘.”
나는 그런 문제혁을 구태여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사용자가 지정한 ‘천리안’ 스킬이 발동됩니다.]그 순간 오감이 열리면서 늪지대의 축축한 공기가 살갗에 닿는 감각이 극대화되었다.
간신히 숨을 고르는 동안 손바닥을 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행렬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이 던전의 전경과 앞으로 벌어질 전투를 대비한 전법까지 계산한 뒤 눈을 떴다.
“계속 원점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어. 이대로 계속 걷는다면 최종 보스가 만든 환시에 갇혀서 영영 고립되어 버릴 거야.”
굵직한 나무뿌리를 고쳐 밟으면서 내가 가리킨 건 먼 곳에 서 있던 나무였다.
지금까지 문제혁과 함께 밟고 있던 뿌리를 그대로 따라가면 저것과 이어진다.
수평선처럼 아득하게 먼 곳에 서 있던 나무는 그저 묵묵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저것에 다가가려고 한다면 계속해서 뒤로 물러날 것이다.
“우리가 갇힌 환시가 최종 보스에 의해 만들어진 거라고? 여기서 보스라고 할 만한 게……. 저 나무를 말하는 거지?”
“그래, 맞아.”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선 문제혁이 절로 탄식했다.
나는 그를 흘긋거리면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계속 밟고 온 나무뿌리가 섬 전체를 감싸고 있는 상태야. 지금 우리를 멀리서 바라보면 거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것 같겠지.”
“해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 거야?”
문제혁의 질문에 대답을 유예한 나는 머릿속으로 이상적인 미래에 다다를 수 있도록 설계를 이어 나갔다. 이대로 환시에 고립되어 최종 보스의 먹잇감이 되지 않으려면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잠시 입을 굳게 다문 채 말을 고르던 나는 한 발자국 나아가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걸 확인하려면 여기서 얼른 빠져나가야겠지.”
“그러면 우리가 뭘 하면 돼? 뭘 해야 사람들이랑 다시 만날 수 있어?”
이어서 대꾸하는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으나 마음을 다잡은 듯 어조만큼은 명확했다.
나는 가볍게 숨을 고르면서 밟고 서 있던 나무뿌리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지금까지 우리를 현혹한 건 이 뿌리였어.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 결국에는 원점으로 돌아오게 유도한 것도 이것 때문이었고.”
“그렇지만 이걸 밟지 않으면 그대로 늪에 미끄러져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텐데. 설마 이 자체가 함정인 건가?”
내가 하는 설명을 들으면서 혼란스러워하던 문제혁이 신중하게 되물었다.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재차 말했다.
“그런 거라면……. 뿌리를 계속 공격하면 더 이상 현혹할 수 없지 않을까.”
그즈음에서 나는 허리춤에 손을 얹은 뒤 백색 권총에 손가락을 감았다.
이어서 처음 사용하는 무기를 느슨하게 감싼 채 낯선 촉감을 익히면서 대꾸했다.
“지금부터 네가 할 일은 얼음으로 빚은 창으로 나무뿌리를 내리찍는 거야. 깃발을 꽂는 것처럼 우리가 지나온 길목을 표시하면 돼. 할 수 있겠어?”
권총을 쥔 채 손끝에 마나를 응집하면서 문제혁에게 말했다.
언제든 그를 향해 방아쇠를 겨눌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으니 답이 돌아왔다.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은 못하지만 그래도 해 볼게. 형이 걸어 주는 설계를 따라가면 되는 거지?”
문제혁은 지난 실습에서 벌인 실수로 인해 한 달이 지난 지금도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문제혁은 다시 해 보겠다고 말하고 있다.
전생의 내가 문제혁을 끝내 내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섣불리 먼 곳을 내다보는 대신 눈앞에 있는 뿌리부터 처치하고 다음으로 넘어간다고 생각하면 훨씬 수월할 거야. 이런 상황에서는 눈앞에 보이는 설계를 속도감 있게 따라가는 게 중요해. 긴장하지 말고, 준비됐을 때 얘기해 줘.”
나는 두 손으로 권총을 그러쥐고 방아쇠를 지면에 겨눈 상태로 잠시 기다렸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숨을 고르던 문제혁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준비됐어.”
탕!
그와 동시에 레몬 빛 탄환이 어둠을 가르고 날아가 문제혁의 어깨에 흡수됐다.
머지않아 한층 결연해진 얼굴로 눈을 뜬 그가 손아귀 사이에 얼음 창을 빚었다.
콰득.
콰드득.
날카롭게 벼린 얼음의 창날을 나무뿌리에 꽂아 넣는 순간 얼음처럼 새하얀 빛이 번지더니 어디선가 거대한 벌레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탕!
탕!
팔목만 한 벌레들이 검붉고 투명한 날개를 펼치면서 군집을 이루며 모여들었다.
나는 문제혁에게 다가서는 것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며 단숨에 처치했다.
“저것들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넌 뿌리를 관통하는 데만 집중해!”
이전처럼 나무뿌리 사이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면서 문제혁에게 소리쳤다.
뒤이어 훌쩍 뛰어온 문제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새로 빚은 창을 꽂아 넣었다.
* * *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전진했을 무렵이었다.
어느새 숨을 허덕이기 시작한 문제혁이 걸음을 멈추고 상체를 숙였다. 곤충 형태의 소형 몬스터에 의해 다친 팔을 감싼 채 나지막하게 신음했다.
“형, 나 잠시만.”
그보다 한 걸음 앞서 있던 나는 문제혁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정면을 내다보았다. 수평선처럼 아득하게 멀기만 했던 나무가 아주 조금씩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대로 뒤를 돌아보니 지금까지 나아온 길목마다 얼음 창이 꽂혀 있었다.
두꺼운 뿌리를 관통한 것들이 은은한 빛을 내뿜는 것을 보던 나는 시간을 계산했다. 이쯤이면 해변에 있던 사람들도 우리를 찾기 위해 나무 근처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나무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걸 보면 최종 보스가 만든 환시에도 틈이 생겼다는 뜻인데.
한쪽 눈가를 미약하게 찡그린 채 허공을 들여다보던 나는 문제혁에게 다가갔다. 그의 팔뚝을 쥐어 부축하면서 안색을 살핀 뒤 맞은편을 가리켰다.
“좀 어때. 괜찮은 거야?”
“괜찮아. 버틸 수 있어. 이제 어떻게 하면 돼?”
내 손길이 닿자마자 허리를 곧게 세우던 문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나는 손끝으로 허공의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저기, 나뭇가지 사이가 조금씩 흔들리는 거 보여? 저 틈으로 창을 던져 넣으면 틈이 벌어지면서 맞은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나타날 거야. 할 수 있겠어?”
내 손끝이 향하는 곳과 발을 딛고 선 곳의 거리를 가늠하던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돼. 다른 건 내가 도와줄게.”
문제혁이 대꾸하기 전에 총을 고쳐 쥐면서 덧붙이자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까지 불편해진 건지 느릿하게 움직이던 문제혁이 얼음으로 창을 구현했다.
이윽고 숨을 가다듬은 뒤 내가 가리킨 허공을 향해 창을 내던졌다.
그 뒤로 나는 총구에 확률 스킬을 덧입힌 채 방아쇠를 당겼다.
쉬익―!
탕!
희게 빛을 발하던 창살에 뒤따르던 레몬 빛 탄환이 흡수되면서 더욱 환해졌다.
콰득.
콰지직.
창날이 내가 가리킨 지점에 정확히 꽂히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쿠궁.
쿵!
맞은편에서 둔중한 소음이 밀려오더니 투명한 막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어, 애들 저기 있어!”
“하, 다행이다.”
“제혁이랑 선배 찾았어요! 저쪽에 있어요!”
그 너머에서 익숙한 얼굴이 삼삼오오 모여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탄식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문제혁을 등을 가볍게 토닥이면서 속삭였다.
“잘했어. 고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