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98
98화. 여름휴가 (4)
마침내 현실과 환시를 구분 짓던 막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문제혁을 데리고 넘어간 나는 곧장 회복 물약을 찾아 그에게 쥐어 줬다.
겨우 다시 만난 이들에게 상황 설명을 듣기도 전에 몬스터가 나타났다.
문제혁과 내가 갇혀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환시에서 넘어온 녀석들이었다.
“다들 괜찮은 거지? 다친 사람은 없어?”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거대한 거미의 몸통 쪽으로 방아쇠를 당기며 말했다.
탕!
머지않아 멀찍한 곳에서 방아쇠를 연이어 당기던 지선일이 소리쳤다.
“우리는 괜찮았어요! 헌터님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 말에 나와 동료들 근처에서 묵묵히 몬스터를 제거하던 헌터를 돌아보았다.
정건후와 비슷한 연배인 것처럼 보이는 그는 날렵한 몸짓으로 장검을 휘둘렀다.
나는 숨을 고를 겸 걸음을 멈추고 지치지도 않는 건지 늪지대를 능숙하게 활보하는 헌터를 그대로 바라보았다.
계속 보고 있으니 그가 어느 길드 소속의 헌터인지 분간할 수 있었다.
특유의 절제된 검술과 서슬 퍼런 칼날에 맺힌 푸른 기운은 분명……,
사양(斜陽) 길드의 사람이구나.
빠른 속도로 몬스터 사이를 누비며 장검을 휘두르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했으나 움직임이 너무 빠른 나머지 기억 속에 남은 얼굴과 대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눈에 담은 것만으로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지금은 눈앞에 있는 것부터 해치우는 게 먼저야.
고개를 내저으면서 마음을 다잡은 나는 곧바로 대열을 뚫고 날아드는 거대한 벌레의 몸통을 향해 방아쇠를 겨눴다.
탕!
사양에서 관광 사업에 뛰어들어 많은 돈을 벌었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던전도 사양 길드의 관리하에 있는 줄은 몰랐는데.
관광 중에는 해변과 멀리 떨어져 있는 시설에서 조용히 머물러 있고 입장 전에도 관리하는 길드에서 안전을 위해 파견 나왔다는 소개만 받았기에 더욱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들이 소속 길드를 밝히지 않게 된 것도 이유가 있었던 듯한데.
기억을 되짚어 보니 몇 년 전에 스치듯 보았던 뉴스가 떠올랐다. 관광 목적으로 개방된 던전에 입장한 비각성자가 길드 소속 헌터에게 자신도 각성할 수 있게 해 달라며 흉기를 들고 위협한 것으로 모자라 관광이 끝난 후에도 해당 길드 사무실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 후로 던전을 담당하는 길드나 헌터의 정보는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
지난 일을 생각하던 것도 잠시, 동료들보다 앞서 있던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몬스터의 몸통이 반듯하게 절단되면서 탄내가 훅 끼쳤다. 칼날에 불꽃 같은 기운이 푸르게 일렁이는 걸 보니 공희찬과 같은 불 속성인 듯했다.
탕!
탕!
상념을 잇기도 잠시 발목에 들러붙은 뱀 형태의 몬스터 쪽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나무뿌리와 늪 사이를 옮겨 다니면서 장시간 전투하려니 거동이 차츰 더뎌졌다.
[저주받은 긴다리거미(D)를 처치했습니다.] [저주받은 긴다리거미(D)를 처치했습니다.] [저주받은 긴다리거미(D)를 처치했습니다.]거친 숨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주위를 둘러볼 즈음 눈앞으로 푸른 활자가 떠올랐다.
[저주받은 비단뱀(E)을 처치했습니다.] [저주받은 비단뱀(E)을 처치했습니다.] [저주받은 비단뱀(E)을 처치했습니다.]눈앞에서 연이어 갱신되는 활자들에서 시선을 거둔 뒤 고개를 틀었다.
전투가 일단락된 건지 대부분 가만히 멈춰서 호흡을 가다듬는 게 보였다.
“급한 상황은 처리했으니 잠시 멈춰서 이야기를 나눠 볼까 하는데. 동의하십니까.”
묵직해 보이는 장검을 손 하나로 쥔 채 검집으로 밀어 넣던 사양의 헌터가 말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 흩어져 있던 동료들에게 손짓했다.
* * *
사방에 드리운 거미줄을 헤집으면서 천천히 걷던 우리는 늪이 얕은 곳에 멈췄다.
드문드문 솟아난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하는 채로 잠시 고개를 젖혔다.
문제혁과 고립된 지 얼마 안 되었을 즈음에는 빼곡했던 것 같은데.
전투 과정에서 가지가 함께 꺾인 건지 이제는 어둑한 하늘이 보였다. 최종 보스가 변경되기 전에는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하늘에 붉은 달이 떠 있었다. 쏟아질 것처럼 무한하던 은하수마저 자취를 감추고 달빛만이 대지를 밝히는 상태였다.
“어, 애란 선배 일어났어요.”
그나마 습기가 덜한 곳에 몸을 눕혔던 서애란이 지선일의 부축을 받아 상체를 세웠다.
전투 도중 뱀에게 발목을 물렸던 그녀는 회복 물약을 마시고 이제야 의식을 되찾았다.
불가피한 부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상황에서는 다른 동료들이 떠올랐다.
공연히 식물을 다루는 김미솔이나 힐러인 설연호의 이름을 곱씹다 고개를 저었다.
“몸은 좀 어때.”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나는 훌쩍 일어나 서애란과 지선일의 근처로 다가갔다.
아직 안색이 창백한 서애란을 살피고 있으니 사양의 헌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상자도 의식을 차렸고, 휴식도 어느 정도 취했으니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장검에 눈길을 두었다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와 함께 근처에서 숨을 고르던 다른 동료들도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관광용으로 개방된 던전의 등급이 상승하는 일은 종종 있지만, 이번 일은 그중에도 희귀한 사례라고 했다. 방금 처치한 몬스터의 등급을 확인하니 아마도 D급 정도로 상승한 듯한데.
“최종 보스의 환시에 고립되어 있던 두 분이 들어갔던 숲도 저희가 관리하는 관광 영역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정체불명의 열매가 발견된 건 어쩌면 그 안에 숨어 있던 다른 몬스터의 짓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한데, 자세한 건 조사를 거쳐 봐야 확실해질 것 같습니다.”
그즈음에서 설명을 마무리한 그가 한 걸음 다가와 모두를 둘러보며 덧붙였다.
“그럼 귀환석을 다시 배분해 드릴 테니 던전에서 퇴장하시면 됩니다.”
“저기, 조사라면 정확히 어떤 걸 조사한다는 말씀이시죠?”
예상외로 전투 내내 꿋꿋하게 버티던 고예성이 손을 들고 말했다.
“담당 직원이 좀 더 자세히 안내할 예정입니다만, 해당 던전의 등급이 갑작스럽게 상승한 건을 계기로 당시의 상황과 피해 규모를 파악하게 될 겁니다. 여행자 보험과 관련한 사항도 해당 직원과 상의하시면 됩니다.”
사양의 헌터가 관광객을 응대한 세월이 느껴지는 간단명료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수긍한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 일어나 그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죄송하지만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러다 목소리를 낸 건 서애란을 힐긋거리며 살피던 문제혁이었다.
“말씀하시죠.”
“혹시 저희도 공략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내내 쥐고 있던 권총을 허리춤에 꽂으려던 나는 그 말에 멈칫했다.
다른 이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 건지 움직임을 멈추고 문제혁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누군가는 다시 들어와서 공략해야 하는 거라면 저희가 해도 충분할 것 같아서요. 공략에 필요한 인원은 충분히 확보된 상태니까요. 귀환석을 불필요하게 소모하지 않으면 돈도 아낄 수 있을 거고, 시간도 절약될 거예요.”
“현실적인 것까지 따져 본다면 이대로 공략을 진행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기는 합니다. 다만 던전 공략에 관여하신다면 귀가한 후에 작성하셔야 하는 서류가 늘어날 겁니다.”
말문을 맺은 사양 소속 헌터의 눈길이 나에게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아까부터 내가 소지하고 있던 권총을 힐긋거리고 있는 듯했다.
설연리가 내게 제공한 권총은 상당히 유명하고 비싼 물건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왜 이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거지. 저 사람도 눈여겨보던 물건인가.
“다른 사람들만 괜찮다면 공략까지 진행해 보고 싶어요.”
허락이 떨어진 뒤 문제혁이 모두와 눈을 맞추면서 말했다.
나는 대답을 유예한 채로 다른 이들의 의견을 기다렸다.
“음, 왜 다들 나부터 쳐다보는 거야? 난 괜찮아. 봐서 알겠지만 타고난 능력치는 낮아도 머리가 좋아서 피하는 건 잘하거든. 다들 의견 있으면 편하게 얘기해.”
고예성이 선뜻 대답한 뒤 남은 이들이 저마다 고심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서애란이 슬그머니 웃으면서 엉킨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번에는 나야? 나도 괜찮아. 다들 지금 눈이 어떤지 알아? 이대로 나간다고 하면 미련을 못 떨쳐서 꿈에서라도 공략할 것 같아.”
마지막으로 모두의 눈길이 나에게 향했다.
미어캣처럼 같은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 걸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대로 다문 입술을 늘리던 나는 문제혁을 잠시 돌아보았다.
나와 함께 환시를 벗어나면서 용기를 얻은 건지 자신감이 붙은 게 보였다.
“저희의 존재가 거슬리지 않는다고 하신다면 동참하고 싶습니다.”
* * *
사양의 헌터가 선선히 수락한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가 이어졌다.
어느새 수평선처럼 멀게만 느껴지던 최종 보스와 거리를 좁힐 수 있게 되었다. 눈앞에서 맞닥뜨린 나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기괴했다. 굵직한 몸통에 불규칙하게 새겨진 빗금에서 검붉은 액체가 흘렀다.
그와 동시에 나무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부터 전투 내내 절규가 이어졌다. 누군가 저 나무에 대고 도끼질을 하는 것만 같은 소리도 함께 뒤섞였다.
최종 보스와의 대치 또한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문제혁과 홍원하가 합을 맞추며 거대한 나무의 근간을 흔들어 놓았다.
잠시 뒤 문제혁이 얼음 창으로 나무의 몸통과 이어지는 굵은 뿌리를 힘껏 짓눌렀다.
푹―!
콰직.
문제혁은 함께 살아 있는 것처럼 날뛰기 시작한 뿌리를 억누르면서 버텼다.
그 곁에서 홍원하가 눈을 감았다가 뜨니 늪지대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차오르는 거센 물줄기에 썩어 버린 나무뿌리가 들뜨더니 문제혁이 퍼뜨린 냉기로 인해 나무 몸통까지 거뭇하게 물들면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쩌적.
쩍.
콰드득.
탕!
탕!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와 지선일이 나란히 방아쇠를 당겼다.
각자의 목적지로 향한 탄환이 몸통을 관통했다.
“마지막으로 처리해 줘.”
이어서 서애란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녀가 숨을 고르면서 눈을 감았다.
동시에 그녀의 발치로 붉은빛이 퍼지더니 나무를 서서히 집어삼켰다.
쿠궁.
쿵.
쾅―!
붉은 궤적이 나무를 다 집어삼키기도 전에 순식간에 썩어 버린 나무가 고꾸라졌다.
“다들 뒤로 피해!”
근처로 물러나 있던 고예성의 경고를 따라 모두가 뒤로 내달렸다.
범람한 늪지대 사이로 거대한 나무가 형편없이 처박히던 그 순간.
[던전 의 최종 보스를 처치하였습니다.] [던전 공략이 완료되었습니다.]눈앞으로 푸른 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됐다, 됐어!”
“하, 우리 이제 집에 간다!”
옹기종기 모인 이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었다.
나는 그 사이에 섞여 홀가분하게 웃는 문제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사양의 헌터가 서 있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내 시선을 느낀 그와 눈이 마주치자 겨우 진정시켰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전생에서도 마주한 적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내게 남아 있던 참혹한 기억이 무의식 속으로 파편처럼 날아들었다.
‘너 같은 새끼는 언젠가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될 거야.’
그 목소리가 불과 며칠 전에 들었던 것처럼 귓가에서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붉은 독주가 담긴 잔을 사이에 두고 핏발이 잔뜩 선 채 나를 바라보던 익숙한 얼굴.
온몸을 경련할 만큼 분노하면서도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잔을 쥐었던 손길.
그가 거칠게 잔을 들이켜는 순간 나의 코끝에 닿던 특유의 화한 향기…….
눈앞으로 어둑하면서도 익숙한 공간의 풍경이 펼쳐지려는 찰나.
그 모든 것을 뒤덮을 만큼 환한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