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Reversal RAW novel - Chapter 107
늦은 밤.
백자안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군사부에서 마련해준 방에서 조용히 묵상에 잠겨 있는 그.
내일 영웅대회에서 무적세가주 독고승과 맹주 자리를 놓고 대결을 벌일 예정인지라, 그 대결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독고승 그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역시 어떤 이유이든지 무공이 급상승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나 역시 상상을 초월했을 정도로 높아졌으니까. 문제는 중원삼성 그자들의 의도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너무 여유가 있는 것 같구나. 마교 교주 자리를 다시 찾은 불패마왕을 그대로 두는 것도 그렇고. 어쩌면 독고승의 배후 역시 중원삼성일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역시 삼혈맹과 진짜로 화친을 맺을 생각은 없고 일종의 위장 화친을 맺을 것 같지만, 문제는 중원삼성 그자들이다. 만약 내 예상대로 배후에 중원삼성이 있다면 나중에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백자안이 조용히 생각을 이어갔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중원삼성이 예측했을 수도 있을 터. 그렇다면 그들이 결국 중원무림을 다스릴 대리자로 바라는 사람이 혹시 내가 아닐까.’
백자안의 안색이 굳어졌다.
중원삼성이 내일 자신이 독고승을 이기고 새 맹주가 될 것까지 예측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다.
중원삼성이 자신을 대리자로 지목할 이유가 없었다. 현재 역용 중이라 진짜 신분을 알 리도 없었다.
‘이런 것을 기우(杞憂)라고 하는 것이겠군. 미래의 일을 모두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신일 것이다. 나는 그저 현재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설령 이 모든 것이 함정에 빠지는 일이라 해도 정신을 하나로 모으면 어찌 살길이 없겠는가.’
백자안이 마음을 다스렸다.
벌써 새벽에 다되었지만, 비로소 잠이 조금 밀려왔다.
대결을 위해서라도 잠시 눈을 붙이고 가는 게 좋았다.
아무리 무공 고수라도 잠을 안 잘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상승고수의 경우에는 쪽잠을 자도 그 효과가 대단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잠이 들었던 백자안은 뭔가 무거운 느낌에 눈을 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각.
잠든 지 반시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라도 잠을 잤기 때문인지 활력이 넘쳤다.
그래서 기지개를 한번 켜려 했다.
한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닌가.
백자안의 안색이 굳어졌다.
‘혈도를 찍혔다.’
그랬다.
소리도 없이 마혈을 찍힌 것이었다.
절대고수라 할 수 있는 그로서 이렇게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스스슷, 하는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나타났다.
모두 노인이었다.
각각 백의와 흑의, 청의를 입은 그들은 신선과도 같은 풍모였다.
나이는 추측하기 힘들 정도로 많아 보였다. 눈빛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백자안은 가슴이 철렁함을 느꼈다.
자신의 혈도를 찍은 장본인들임을 깨달은 것이다.
직감적으로 그는 노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중원삼성?”
세 명 중 수장으로 보이는 백의노인이 말했다.
“허허허. 그러하네. 우리는 중원삼성이라고 하네. 만나서 반갑네. 풍운검객이라고 했나?”
“그렇소. 내 혈도를 찍은 사람이 그대들이오?”
“그러하네. 미안하네.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어쩔 수 없었네. 우리의 제의를 한번 들어보겠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소. 이미 혈도를 찍힌 몸이니.”
“허허허. 너무 상심하지 말게. 자네 혈도를 찍은 것은 우리 무공이 높아서가 아니라 법보의 위력 때문이니까.”
“법보?”
“그러하네. 점혈종(點穴鐘)은 우리 신선계(神仙界)의 법보 중 하나네. 점혈종을 흔들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지만, 상대의 혈도를 찍을 수 있지. 설사 상대가 무형검의 고수라 해도 예외가 없네. 아, 물론 무형검의 최고봉인 지성에 달한 지성자(至聖者)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지. 지성자는 그야말로 절대자이니까.”
“신선계라 함은?”
“우리가 수도하는 곳을 말하네. 우리 수도자들은 따로 모여서 살고 있거든. 하지만 신선계는 일종의 거대한 진법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쉽게 말해 천외천(天外天)으로 생각하면 쉬울 걸세.”
“은자림 같은 곳이오?”
백자안 담담히 물었다.
그러면서 천천히 몸 상태를 점검했다.
엉겁결에 당했지만, 정신이 들자마자 혈도가 저절로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막힌 혈도 대부분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는 몸의 정화작용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웬만한 혈도는 한두 시진 안에 풀리게 되는 것이다.
백자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효과는 매우 빠르게 진행하고 있었다.
백자안이 중원삼성을 보니 그들은 이런 상황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은자림과는 전혀 다르네. 은자림은 깊은 산속에 있지만, 우리 신선계가 있는 곳은 공간 자체가 다르네. 거대한 환상진법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라 끝도 없이 광활하지. 그보다 우리 제의를 이제 말하겠네.”
“말씀해보시오.”
“우리를 대신해 무림을 다스려 주게. 다만 조건이 하나 있네. 무림을 다스리는 방식에 대해 우리가 가끔 조언할 것이네. 그 조언에만 따라주면 되네. 그렇게만 약속해주면 자네의 무공을 지금보다 수백 배 이상 높여주겠네.”
“이해가 안 가오. 그런 제의는 나 말고도 여럿에게 한 게 아니오?”
“물론이네. 각자에게 기회를 준 것이지. 하지만 진정으로 우리가 기다린 사람은 바로 자네이네. 자네가 내일 독고승을 이긴 후, 삼혈맹의 수장까지 제거하게 되면 가히 천하제일인이 될 터. 이후 마교와 동방무맹까지 차지하게 되면 중원과 동방무림을 함께 다스릴 수 있을 것이네. 부족한 힘은 우리가 보충해주겠네. 어떤가?”
“거절하겠소.”
“이유는?”
“내가 보기에 그대들이 미쳤기 때문이오. 수도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터무니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소. 신선계에 그대들 같은 수도자들이 얼마나 있소?”
“허허허. 용기가 가상하군. 이런 상황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다니. 우리 제의를 거절하게 되면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네. 혹시 우리가 무림 지배에 대한 야심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해라 할 수 있네. 이미 속세를 떠나 우화등선을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는 우리가 왜 이런 하찮은 무림을 노린단 말인가?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다만 실험일 뿐이네. 무림의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것이지. 다만 속세를 떠난 몸이라 직접 다스리지 못해 그 대리자를 구하는 것뿐이네. 또한 이미 정사마를 초월했기 때문에 그 대리자가 누구든 상관없네. 혈교주, 사사천교주, 마교주, 대인자문주, 무적세가주 누구든 상관이 없네. 하지만 풍운회주 자네만큼은 정말로 탐이나 이렇게 간곡한 제의를 하는 것이네. 자, 우리 제의를 받아들이면 이 단약을 복용하게. 이미 마교주 불패마왕을 제외하고 네 사람은 복용했네.”
“혈교주와 사사천교주, 대인자문주, 무적세가주 네 명이 순순히 그대들의 제의를 수락했다는 말이오?”
“그러하네. 물론 약간의 편법은 있었지.”
“세뇌를 시켰군.”
“허허허. 역시 총명하군. 아마도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스스로 판단해 우리 제의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네. 하지만 점혈종에 당한 사람은 그런 착각을 할 수밖에 없지. 우리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게 되기 때문인데, 강압적이란 생각이 들지 않도록 우리가 적절히 세뇌를 시켰지. 물론 그 역시 점혈종의 효능 중 일부이지만 말이네.”
“불패마왕의 경우 예외를 둔 것은 흡수대법 때문이오?”
“허허허. 그것까지 알고 있나? 대단하군. 바로 그러하네. 흡수대법의 특성상 세뇌가 어려워 스스로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고 있었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탈출을 하다가 죽은 줄 알았는데, 뜻밖에 금제까지 풀고 복권을 했지.”
“불패마왕을 어떻게 할 생각이오?”
“두고 보고 있네. 외부 도움을 얻었지만 우리 예상을 뛰어넘어 교주 자리에 복귀했으니, 최종 대리자로서의 자격 요건이 조금씩 충족되고 있지. 무공 역시 계속 늘어나고 있어 좀 더 지켜볼 생각이네. 솔직히 말해 자네와 불패마왕 두 사람 중 한 명에게 최종 대리권을 맡길 생각이네.”
“황당하군. 더는 그대들의 미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소. 제의를 거부할 것이니,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오.”
“허허허. 생각보다 대단하군. 특수 체질인지 세뇌도 되지 않고 말이야. 좋아. 아주 마음에 드네. 좋네. 자네 패기를 높이 사서 좀 더 지켜보겠네. 자네 실력으로 경쟁자들과 대적해보게. 우리는 그 승자를 최종대리자로 삼겠네. 다만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네. 특히 삼혈맹 수장들은 지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으니까. 아니 내일 당장 붙을 독고승부터 이기는 것이 우선이겠군. 우리가 주는 신선단(神仙丹)을 지금이라도 복용하면 문제없이 이길 수 있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나?”
“거절하겠소.”
“어쩔 수 없군. 무운을 비네. 자네가 최종 승자가 되어 우리 대리자로 확정된다면 매우 기쁠 것이네. 그럼, 다음에 보세. 우리는 일단 신선계로 돌아가 있겠네. 혈도는 한 시진 후 저절로 풀릴 것이네. 그럼.”
스스슷, 하는 소리와 함께 중원삼성이 사라졌다.
그때였다.
백자안이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혈도를 풀었다.
중원삼성의 말대로라면 한 시진 후에나 풀릴 혈도가 곧바로 풀린 것이었다.
하지만 내공을 극도로 소모한 터라 중원삼성을 쫓아갈 수 없었다.
백자안은 즉시 회복운공을 시작했다.
* * *
둥둥둥.
“지금부터 신임 맹주를 선출하는 영웅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중원무맹 총관 중원군자(中原君子)의 말에 군웅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단순히 구경하러 온 사람들까지 합쳐 거의 백만이 넘는 군웅들이었다.
물론 위기 상황을 맞이하여 참석한 사람들 대다수가 자신의 무공에 맞게 적과 싸울 마음이 있었다.
그래도 정예 병력으로만 보면 오십만 정도로 보는 게 맞았다.
중원무맹 무사 이십만, 정의련 무사 이십만, 동방무맹 십만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중 정의련은 어제 전격적으로 해산해 중원무맹 무사가 사십만으로 불어난 상태였다.
삼혈맹 무사가 모두 칠십 만임을 고려하면 아직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마교가 아직 혈교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없구나. 하기야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 아직 공격을 개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삼백여 명의 지휘부 고수와 함께 단상 위에 앉은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새벽에 중원삼성의 방문에 당황했던 그는 지금은 비교적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잠깐이지만 나름대로 무공의 진전을 본 덕분이었다.
처음 혈도를 찍혔을 때는 중원삼성과의 무공 격차를 실감하고 낙심이 컸었다.
하지만 점차 혈도가 풀린 후 회복운공을 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혈도가 풀린 것이 단순히 무형공력의 효능이 아니라 무명부록에 있던 한 가지 비술 때문이었다는 것을.
무명점혈(無名點穴).
암기하고 이해까지 했지만 아직 실제 펼쳐보지는 않았던 비술이었다.
그 이유는 현재 백자안의 무공 경지 상 설사 점혈을 당했어도 기존의 이혈대법으로 충분히 풀 수 있었다.
하지만 위기 상황이 되자 무명점혈술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무명점혈은 점혈법뿐만 아니라 해혈법까지 수록된 비술이었다.
궁극의 경지에 이르면 점혈만으로도 수천 명을 한 번에 사망하게 만들 수 있었다.
점혈종이란 법보에 의해 백자안의 혈도가 찍혀 마비되자, 이 무명점혈술이 저절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백자안은 회복 운공 중 이 무명점혈술을 완전히 터득했다.
그 결과 이제는 불시에 기습을 받아도 사후 회복이 아니라 사전 방어가 가능해졌다.
이는 마치 호신강기를 두른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점혈종이란 것에 다시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중원삼성의 본신 무공이다. 자신의 무공이 아니라 법보를 사용해서 아직 진짜 실력을 파악하기 힘들구나.’
백자안이 새벽에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생각했다.
사실 얼마 후 독고승과의 대결에 나서야 할 상황이지만, 그는 중원삼성에 대한 경계심이 더 강해진 것으로 보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신선계란 곳에서 왔다는 중원삼성 그자들이 중립을 지켜준다면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다. 문제는 천하를 평정한 이후의 일이겠지만, 그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자신이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 중원삼성의 의도대로 따라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천하를 평정해 그들에게 고스란히 바치게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마도 조만간 내가 신선계란 곳에 가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때가 되면 모든 비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초조해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