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Reversal RAW novel - Chapter 204
서약의 돌이 파괴되면서 서약봉까지 무너졌을 때 백자안은 온몸이 부서지는 통증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일만여 반선들과 마신들의 비명이 난무했지만, 그것을 끝까지 들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당장 그의 목숨이 끊어질 위기였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잃기 전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바로 서약의 돌의 저주였다.
어떤 이유이든 서약의 돌이 파괴되는 것은 바로 만년서약을 위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 맞은 안배가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백자안의 경우 사실 만년서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저주의 영향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 끝인가.’
정신을 잃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그 순간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처음 무림맹 무사 시험에 합격해 기뻐하던 일.
마적 떼에 의해 가족을 잃고 슬퍼하던 일.
무저곡에 떨어진 후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기적적으로 반로환동하며 시간회귀까지 한 일.
회귀 이후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었다.
고난도 있었지만 성장도 있었다.
이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천하제일인이라는 명성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두가 사라질 상황이었다.
정신을 잃고 무의식의 세계에 접어든 백자안은 마치 캄캄한 어둠의 감방에 갇힌 것 같았다.
그때 매우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분명 정신을 잃었는데 한 가닥 생각이 살아났다.
‘이상한 일이군. 하지만 지금쯤 내 몸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겼을 것이다. 서약의 돌의 파편들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호신강기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한 가닥 생각 덩어리로 변했다고 할 수 있는 백자안이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의 몸을 볼 수 없었다.
마치 허깨비처럼 육신을 벗어나 혼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군. 이렇게 생각이라도 할 수 있으니. 아니 이것이 바로 사후세계가 아닐까. 나는 이미 죽은 것인가.’
백자안이 의아해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자신의 실체를 알 수도 없었다.
백자안은 주위를 살펴보고 싶었지만 아무 감각도 없었다.
육신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꿈을 꾸고 있을 수도 있다. 외적 변화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생사는 이미 내 손을 떠났다. 그보다 너무 심심하구나.’
백자안이 정신을 집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그래, 지성자에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무명심법에 이어 구중천심공도 대성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지성에 도달하는 것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형검 최고의 경지에 도전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백자안은 매우 진지했다.
자신의 생각이 일부라도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깨달음의 성과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생각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면 육신 역시 깨어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지성을 이룰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벗어던지고 오로지 깨달음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백자안이 희망을 발견한 듯 설레는 마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육신이 천 갈래 만 갈래 찢겨 나갔을 것을 생각하자 절망감이 밀려왔다.
‘육신을 보존해야 부활할 수 있을 텐데, 아마 지금 내 육신은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을 것이다.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도 몸을 다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백자안은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는 현실을 다시 깨닫게 되자, 조금 전의 무공 연마에 대한 결심도 급격히 무너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육신이 사라졌다면 그동안 모은 내공 역시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혼백의 일부가 남아 생각은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지에 대해 아무런 확신이 없었다.
‘어쩌면 이 상태 그대로 영원히 시간이 흐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일종의 원귀(寃鬼)가 된 것인가.’
백자안이 허탈해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성자에 대한 열망 역시 하나의 집착이 아닐까. 지성자가 되어야만 망부곡에 있는 사람들을 되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너무 지나쳤던 것일까.’
망부석에 대한 생각까지 미치자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특히 부친인 백청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천마신에게 몸을 빼앗긴 백청이었기에, 지금 상태가 염려스러웠다.
‘천마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능력이라면 아마도 살아남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백자안은 내심 천마신이 살아있기를 바랐다.
물론 이는 오직 부친 때문이었다.
천마신이 죽는 것은 환영할 바이지만 그 바람에 부친의 몸이 사라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망상에 불과했다.
백자안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비우자. 이미 억지라도 비워졌으니 남은 일부의 마음만 비우면 되지 않겠는가.’
백자안이 모든 것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관조(觀照)였다.
관조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보는 것을 의미했다.
백자안은 그 진리가 바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건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이전부터 알고 있던 법문이었다.
하지만 마음으로 체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록 지성자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지만 깨달음에 있어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백자안이 처음으로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조금 서늘한 감촉이었다.
‘바람이다. 아니 이것은 바로······.’
그랬다.
지금 느껴지는 감각은 바로 이전에 그를 몇 번 다른 장소로 이동시켜주었던 그 회오리바람이었다.
순간, 백자안이 의념을 내었다.
‘이왕이면 무림으로 데려다주었으면 좋겠구나. 무림으로 가서 나로 행세하고 있다는 반야마신 그자를 꼭 제거하고 싶다.’
그때였다.
남아있던 생각의 일부마저 완전히 사라지며 모든 것이 암흑에 잠겼다.
* * *
어느 순간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생겼다.
처음 그 빛은 매우 작았으나 이내 공간 전체를 가득 채웠다.
백자안이 깨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으으······.”
정신이 든 백자안이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기화이초와 수목이 우거진 계곡이 눈에 들어왔다.
한데 그곳은 바로 오랜 세월 그가 갇혀 지냈던 무저곡이 아닌가.
비록 반로환동을 하고 시간 회귀까지 했지만, 그 기억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
백자안이 매우 놀라며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그 결과 몸에 아무런 상처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내공 역시 최상이었다.
서약의 돌의 기운을 흡수해 구중천심공을 대성했을 때의 내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지고 있던 물건도 모두 그대로였다.
특히 천마신으로부터 어렵게 회수한 지존검과 천마검 역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상황보검 또한 그대로였다.
백자안은 소지품과 병장기들을 확인한 후 다시 몸속에 넣어두었다.
비상시에 자동으로 무영신투술이 작동되도록 한 것이 다행이었다.
다만 신선계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답답했다.
특수 이동대법으로 신선계로 가는 것이 가능한지 한번 살펴봤으나, 어찌 된 일인지 특수 이동대법 자체가 불가능했다.
‘으음, 서약의 돌 파편을 맞고 특수 이동 능력이 사라진 것인가. 일시적인지 영구적인지 모르겠구나. 신선계로 통하는 문이 다시 열린 지도 알 수 없게 되었군. 정심회 반선들과 마신들의 생사도 알 수 없구나.’
백자안이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렸다.
일단 지금 상태에서 확인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잠시 집착을 버리기로 했다.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도 의문을 품지 않기로 했다.
신비로운 회오리바람이 천계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느낌은 있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낙양으로 간다. 특수 이동대법 시전이 안 되는 것이 아쉽지만, 내 경공 실력이라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일단 이곳을 나가도록 하자.’
백자안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이전과 달리 독 안개는 보이지 않았다.
백자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내가 모두 흡수를 했었지.’
백자안이 경공을 펼쳐 계곡을 빠져나가기 전 역용을 다시 했다.
이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으로 일단 자신이 백자안이라는 사실을 숨기기로 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아직 무림의 사정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자신 대신 지존맹주로 있는 반야마신 외에 다른 적이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 어쩌면 마계 고수가 무림에 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구천마녀라고 했던가. 마계사자라고 했었지. 비록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구천마녀라는 그 마녀는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황궁의 동향도 파악할 필요가 있겠구나. 전대 황제께서 복위하셨는지 궁금하다. 일단 일화를 만날 때까지 신분을 숨기는 것이 여러모로 나을 것이다.’
스스슷.
백자안의 얼굴이 평범한 이십 대 중반 청년의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저곡에서 나가는 것이었다.
슈우우우!
벡자안의 신형이 그대로 위로 솟구쳤다.
얼마 후 절벽 위로 올라온 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혹시 다른 문제가 있을까 걱정했는데, 특수 이동대법 외에는 정상이구나. 아니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일단 이곳까지 온 김에 고향 마을에 잠시 들러야겠다. 혹시 가족들 소식을 알 수도 있으니까.’
백자안이 내심 기대감을 보였다.
물론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일단 부친인 백청의 경우 천마신에게 몸을 빼앗긴 상태에서 서약봉 전체가 무너져 전망이 어두웠다.
다른 가족의 경우는 중간지대 망부곡에 망부석으로 변해있을 거로 예상하지만, 그래도 알 수 없었다.
혹시 한 사람이라도 무림에 남아 있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인촌에 들르려는 가장 큰 이유는 혹시 다시 과거로 돌아왔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백자안은 여러 정황상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 가보면 알겠지. 나의 고향이라 의외로 마을 사람들이 내 소식을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휙휙.
백자인이 빠르게 경공을 펼쳤다.
그가 향한 곳은 물론 선인촌이었다.
* * *
선인촌의 풍경은 이전과 큰 변화가 없었다.
낯익은 마을 사람들을 보니 백자안 역시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와 가족들은 낙양으로 갔지만,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남아 있었다.
물론 이전처럼 시간 회귀를 한 것은 아니었다.
마을 어귀에서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나서 몇 가지를 물어봄으로써 그 사실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말로는 백자안의 명성이 매우 높아 외지인들이 자주 방문한다고 했다.
문제는 바로 반야마신이 백자안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역시 우려대로구나. 내가 낙양에 지존맹주로 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니.’
백자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새 촌장 집으로 갔다.
그 집은 바로 이전에 자신의 가족들이 살던 곳이었다.
백청이 식속들과 함께 낙양으로 올 때 그 집도 팔아버린 것이었다.
‘가족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촌장 댁에 무림인들이 몇 명 있다고 하니 그들에게 무림과 황궁의 상황에 관해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