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Reversal RAW novel - Chapter 226
무저곡.
끝 모를 깊이의 이 계곡에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색이 뛰어난 소녀였다.
한데 그녀는 바로 방일화가 아닌가.
백자안의 제자인 그녀가 이곳 무저곡에 찾아온 것이다.
“이곳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무저곡인 것 같구나. 웬만한 무공으로는 이곳에 내려오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 같군.”
다소 초췌한 안색의 그녀였다.
아닌 게 아니라 입고 있는 옷 군데군데가 떨어져 있는 데다 핏자국도 여러 군데였다.
방일화가 계곡 위를 쳐다봤다.
까마득한 높이였으나, 오히려 그 점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놈들이 이곳까지 쫓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십만혈군 그자가 무림을 장악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방일화가 탄식했다.
백자안과 제남에서 헤어진 지도 벌써 반년이 흘렀다.
그동안 무림은 급변했다.
먼저 백자안이 태음동에 들어가 마계로 끌려갔을 때 제남에 있던 십만 무림인들은 혈교의 공격을 받았다.
삼만 병력을 지닌 혈교 잔당을 수괴인 십만혈군이 직접 이끌고 가 기습 공격을 가해온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기 때문에 무림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남성 외곽에 경계 병력이 있었지만, 그들은 적들의 공격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혈교 잔당의 이동은 마계에서 제공한 특수 이동대법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십만혈군의 술법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십만 군웅 모두를 돌로 만들어버렸다.
양생술사가 급히 술법에 대항할 방어진법을 펼쳤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그를 비롯하여 제남지부장 모용곽, 제남지부 총관 산동선생 등 지휘부 고수들마저 제대로 대항을 못 하고 당하고 말았다.
지휘부 고수들이 당하자 그 수하 및 일반 무림인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마치 급류에 휩쓸리듯 모두 돌로 변하고 말았다.
방일화가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만변술사 덕분이었다.
그나마 만변술사의 술법이 조금 통해 그녀가 도주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방일화가 제남을 빠져나온 것은 혼자 힘으로 역부족을 느끼고 하루빨리 백자안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태산에 도착해 백자안을 찾아봤지만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이는 태음동 입구가 완전히 무너진 것을 봤을 때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였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흘간 태산 일대를 샅샅이 뒤졌을 때 살수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혈교 잔당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무공은 실로 대단했다.
방일화는 그들이 마계에서 직접 조련한 살수들임을 알았다. 이후 계속 쫓기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살수들의 무공은 막강해 절세무공을 익히게 된 그녀로서도 한번 싸울 때마다 두세 명 정도만 겨우 처치할 수 있을 뿐이었다.
문제는 살수들이 원래는 무림인이란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진성마신 등 마계에서 직접 보낸 고수들이 아니라 그들 중 누군가가 무림인들을 훈련시켜 만든 살인병기들이었다.
마계살수(魔界殺手).
무림에서 그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이름이었다.
이 마계살수들은 비단 방일화만 공격하지 않았다.
지존맹 무사 중 백자안을 따르던 고수들을 표적으로 삼아 암살을 시도했다.
그렇게 지존맹의 지휘체계가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단 한 달이었다.
더욱더 가공할 사실은 마계살수들의 수였다.
놀랍게도 그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수백 명 정도였으나, 며칠마다 두세 배씩 불어났다.
그 결과 반년이 지난 지금 마계살수 병력은 백만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 때문일까.
언젠가부터 그들 대부분의 정체가 지난날 백자안에 의해 토벌된 삼혈맹 무사들이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말은 마계살수들이 실은 살아있던 사람이 아니라 시체들이란 말과도 같았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근거들도 있긴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들이 쓰고 있는 귀면탈이었다.
그 때문에 마계살수들의 얼굴은 알 수 없었다.
방일화 역시 그 점을 궁금하게 생각해 마계살수들 몇 명의 얼굴을 확인하려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귀면탈 뒤에 숨겨져 있는 얼굴은 하나같이 망가져 있었다.
마치 용암에 담긴 듯 형체를 알 수 없었다.
특이한 것은 그렇다고 일반 강시처럼 말을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말을 자유롭게 했다.
한편 그동안 십만혈군이 이끄는 혈교 잔당들은 거침없이 낙양을 향해 진군했다.
마계살수들의 지원을 받은 그들을 막아낼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이전처럼 십만혈군이 백자안으로 역용해 그로 행세하려는 시도를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방일화가 달아나는 데 성공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십만혈군은 끝내 최후까지 저항하던 만변술사마저 돌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끝내 그녀를 놓치고 만 것이었다.
그 결과 방일화는 태산으로 이동하면서 지존맹 총단에 있던 부맹주 무명노승에게 제남 상황을 전서구를 보낼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십만혈군은 전면전을 벌이기로 하고 낙양을 향해 진군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렇게 석 달이 흐른 후 낙양 지존맹 총단에서 대격전이 벌어졌다.
무명노승이 이끄는 지존맹 결사대와 혈교 잔당과의 전면전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 병력은 십만 대 십만 정도였다.
지존맹 무사들의 수는 마계살수들의 공격으로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반면 혈교 병력은 많이 늘어났다.
삼만 정도이었던 병력이 세 배 이상 늘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혈교 무사들이 믿고 있는 것은 바로 마계살수들이었다.
이제 소문이 퍼져 그들이 마계에서 조련한 살수들임이 알려져 있었다.
전면전의 결과는 지존맹의 참패였다.
지존맹 무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당연히 지존맹 역시 해체되었다.
무명노승은 실종되었다. 그가 심각한 중상을 입은 것을 목격한 사람이 많아 지금쯤 죽었을 거라는 말이 많았다.
방일화는 당시에도 마계살수들의 집요한 추적을 받고 있었으나 어떻게든 낙양으로 가려 했었다.
하지만 낙양 인근에서 저지를 당하고 그만 총단 함락 소식을 듣고 말았다.
혼자서는 역부족임을 느낀 그녀는 이후 석 달 동안 다시 백자안을 찾는 데 주력했다.
마계살수들의 추적은 계속되었다. 내상이 깊어진 그녀가 최후로 선택한 곳이 바로 이곳 무저곡이었다.
혹시나 해서 백자안의 고향까지 찾아온 그녀가 문득 백자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무저곡 안에 일단 들어오면 그 흔적이 끊어지기 때문에 추격을 따돌릴 수 있을 거라고 하셨지. 과연 직접 와 보니 그런 것 같다. 계곡 안에 뭔가 신비한 기운이 가득한 것 같다. 이곳에서 내상을 치료하면서 향후 계획을 세워야겠다. 일단 계곡 안을 살펴봐야겠군. 사부님께서 기거하던 동굴은 무너졌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방일화가 천천히 무저곡 내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 * *
방일화가 무저곡으로 들어온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는 계곡 안을 살펴봤지만 별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이전에 백자안이 기거했던 동굴이 무너진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점은 내심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무너진 동굴 앞에 모옥을 한 채 지어 그곳에서 지냈다.
이후 그녀는 회복운공에 매진했다.
그래서일까.
심각했던 내상도 이제 거의 완쾌되었다.
이는 무명심법의 효능이기도 하지만, 무저곡 내부의 신비한 공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치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은 그런 편안하면서 상쾌한 느낌이 회복에 큰 도움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이전처럼 고립무원의 상태가 된 그녀였다.
무림 상황 역시 최악이었다.
한 달 전에도 무림인들은 혈교의 지배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무림인들은 처형을 당하거나 돌로 변했다.
하지만 무림인들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바로 마계살수들의 존재였다.
백만에 달하는 마계살수.
그들은 무림 전체를 보이지 않는 쇠사슬로 꽁꽁 묶어놓았다.
지존맹을 무너뜨리고 무림혈맹(武林血盟)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든 무림혈맹주 십만혈군 역시 마계살수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오히려 수하들에게 명을 내려 어떤 경우에도 마계살수들에게 협조하게 했다.
“휴우! 앞일이 막막하구나. 사부님이 안 계신 상황에서 나 혼자 현 상황을 타개할 자신이 없다. 무명노승님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방일화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혼자 지내다 보니 최근 들어 부쩍 혼잣말이 늘었다.
그녀의 근심은 내상이 거의 회복된 지금 더 늘어났다.
지금까지는 회복운공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애써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계곡 밖으로 나가서 계속 백자안을 찾아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무명노승이라도 찾아서 백자안이 돌아오기 전에 저항세력을 정비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곳을 나가도록 하자. 되든 안 되든 부딪혀보는 것이다.’
방일화가 결단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모옥 밖으로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십장 정도 거리에 토끼 한 마리가 보였다.
무저곡에는 기화이초도 많았고 수목도 우거졌지만, 동물은 보기 힘들었다.
간혹 이름 모를 새들이 와서 울어대곤 할 뿐이었다.
“저 녀석이!”
방일화가 미소를 지으며 토끼가 달려가는 방향을 봤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토끼의 움직임이 빨라지더니 절벽 밑에 난 구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구멍은 풀들에 가려져 그녀도 알지 못했던 곳이었다.
“저런 곳이 있었군. 혹시 뭔가 숨겨둔 물건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백자안의 흔적이라면 그 어떤 사소한 것도 찾고 싶어 하던 그녀가 아니던가.
곧바로 그 구멍이 있는 곳으로 갔다.
가까이 가서 풀을 벌려 보니 제법 큰 구멍이었다.
어린아이라면 몸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
방일화가 손을 넣어보려다 흠칫했다.
‘아! 이것은 사부님 냄새다.’
방일화는 이전에도 임요요처럼 백자안의 체취를 잘 맡았다.
한데 뜻밖에도 이곳에서 그 냄새를 맡게 된 것이었다.
그녀의 두 손에서 장력이 발출된 것은 그 직후였다.
콰콰쾅.
구멍 주위가 파괴되며 한 사람 정도 들어갈 공간이 만들어졌다.
토끼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시 튀어나왔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얼마 후 먼지가 걷히고 구멍 안의 광경이 보였다.
뜻밖에도 구멍 안에는 석실이 하나 있었다.
석실 중앙에는 바위 하나가 있었다. 그 바위가 바로 방일화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람 모양의 바위였다.
한데 그 모습이 바로 백자안과 비슷하지 않은가.
마치 금지된 술법에 당해 돌로 변한 것처럼 석상이 그곳에 있었다.
다만 그들과 다른 점은 그 얼굴 형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사부님!”
방일화가 석실 안으로 들어가 석상을 끌어안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반가움과 슬픔이 교차하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흑흑! 정말 사부님이신가요? 아니면 그냥 석상인가요?”
방일화의 눈물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석상은 아무 말도 없었다.
‘사부님을 이대로 둬서는 안 돼.’
방일화가 석상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였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석실 전체가 무너져 버렸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파묻혀버렸을 것이었다.
“휴우! 계획을 변경한다. 이 석상의 비밀부터 풀어야 한다. 왜 석상에서 사부님 체취가 느껴지는지 알아내야 한다.”
방일화가 석상을 들고 모옥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