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Reversal RAW novel - Chapter 51
화산(華山).
오악 중 서악(西岳)으로 유명한 이곳에 며칠 전부터 무림인들이 대거 모여들고 있었다.
바로 화산파 장문인 매화검선의 여식 화산옥녀 악미미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매화검선은 딸의 죽음을 전 무림에 알리며 장례식날 혈교의 음모를 밝히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딸 역시 혈교의 자객에 의해 희생되었음을 미리 밝혔다.
무림인들이 매우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특히 십 년 전 혈교와의 전쟁을 겪은 문파의 경우에는 더욱 관심을 보였다.
혈교가 다시 발호한 게 사실이라면 화산파처럼 자신들도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주 단목군 역시 이번 일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가뜩이나 사사천교의 등장으로 모든 역량을 그쪽으로 쏟고 있었던 때였다. 혈교까지 다시 발호했다고 하니 그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일까.
단목군은 만박서생으로 하여금 무림맹 대표단을 이끌고 장례식에 참여하게 했다.
특히 무림맹 정예 무사 일천 명도 함께 데려가게 해 유사시 전투에 직접 투입할 수 있게 했다.
그 외 수많은 문파도 대표단을 보냈다. 이는 유명무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직간접적으로 화산파와 인연을 맺고 있는 곳이 워낙 많아 조문을 위해 사범들을 보내는 무관이 수두룩했다.
영웅무관에서도 긴급회의 결과 대표단을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구대문파와 평소 큰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라 사범 두 명을 보내는 것으로 결정났다.
사범 두 명이 영웅무관장 위지경덕이 직접 쓴 조의문을 들고 가서 장례식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었다.
문제는 누구를 보낼 지였다.
사범들 모두 수업 때문에 매우 바빴다.
부득이 새로 뽑힌 사범을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사람이 바로 백자안과 김지혜였다.
백자안은 화산옥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줄곧 무거운 안색이었다.
그는 긴급회의 도중 자신이 화산옥녀와 인연이 있음을 알리고 자원했다.
김지혜는 남녀 균형을 맞춰 조문을 하러 가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많아 함께 가게 되었다.
“저기 보이는 것이 화산이지요? 우리 동방에도 동화산(東華山)이라고 해서 중원의 화산과 똑같이 생긴 산이 있지요. 그래서 낯설지가 않네요.”
김지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자안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무심한 듯한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쓸쓸함이 배여 있었다.
악미미의 죽음은 그에게 생각보다 큰 충격을 주었다.
악미미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엄연히 자신의 정혼녀였다.
비록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 사이는 분명 가까워지고 있었다.
특히 상소 신청을 위해 악미미가 동분서주하면서 도와준 사실에 대해 백자안은 무척 고마움을 느꼈었다.
하지만 감사의 인사를 제대로 할 사이도 없이 악미미는 와룡대에 입대해버렸다.
그녀가 신입 와룡대원 훈련을 위해 와룡곡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백자안은 훈련이 끝나면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악미미는 부친의 급한 부름을 받고 화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결론적으로 추방령을 당한 그 날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악 소저와는 첫 만남이 그다지 좋지 못했었지.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나니 허전하기 짝이 없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괜한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남자인 내가 먼저 다가갔어야 했는데. 어차피 파혼을 당할 것 같아 정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었지. 후회스럽구나. 분명 서로 알아가다 보면 좋은 결과를 맺을 수도 있었을 텐데······.’
백자안이 화산을 올려다보며 감회에 젖었다.
이전에 한 번 수련을 위해 관원들과 함께 왔던 추억보다는 악미미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정말 화산옥녀와 친한 사이였나요?”
“네. 하지만 화산파에서 저를 알아볼 사람은 없을 겁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셨던 것 같군요. 저 역시 화산옥녀의 죽음이 안타까워요. 무림삼미 중 아름다움 자체만 보면 천하제일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특히 그녀는 백자안 대협의 정혼녀로 저 역시 무척 만나보고 싶었지요. 이번에 백 대협도 장례식에 참여하겠지요?”
“아마 그럴 겁니다. 내일 정오에 장례식이 열리니, 그때까지는 오겠지요.”
“네. 화산에 오르기 전에 저기 객잔에 들러 식사나 하지요.”
“네.”
백자안이 김지혜와 함께 산기슭에 자리한 객잔에 들어갔다.
매화객잔(梅花客棧)이란 이름의 이 객잔은 지금 몰려드는 손님들로 정신이 없었다.
좌석이 모자라 야외에도 탁자를 설치해 손님들을 받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언뜻 봐도 백 명이 넘는 무림인이 객잔에 모여 있었다.
백자안과 김지혜는 운이 좋아 객잔 안에 있는 탁자 한 곳에 합석할 수 있었다.
음식을 시킨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객잔 중앙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한 사람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지금 하는 말은 악미미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모든 손님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 글쎄 악 소저가 죽기 전에 이상한 말을 했다고 하오.”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이오? 혈교 자객에게 암습을 당해 죽은 게 아니오?”
“자객의 암습을 받은 것은 사실이오. 매화검선을 비롯해 화산파 고수들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자객은 사라진 후였소. 악 소저는 치명상을 입고 죽음 직전에 있었다고 하오.”
“아, 혈교의 짓이란 것을 어떻게 알았소?”
“그것은 악 소저가 당한 수법 때문이오. 지금까지 암습을 당해 죽은 화산파 고수가 열 명이 넘는데, 악 소저는 자객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고 격투를 벌였다 하오. 그 결과 놈이 부득이 혈교 무공을 사용한 것이오. 혈옥수(血玉手)라는 것으로 격중당하면 심장이 정지해 사망하는 무서운 무공이오.”
“악 소저가 혈옥수에 당했단 말이오?”
“그렇소. 하지만 악 소저는 옥녀심공을 연마했기 때문에 바로 숨이 끊어지지 않았소. 하지만 끝내 버티지 못하고 심장이 멈춰버린 것이오.”
“그럼 죽기 전에 남긴 이상한 말이란 무엇이오?”
문답식으로 진행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로 일종의 정보 상인이었다.
먼저 화산파로 가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고 와 객잔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사람들이었다.
“갑자기 목이 막히는구려. 술이나 한잔 했으면 좋겠소. 노자도 떨어져서 영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오.”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점소이가 술병을 가져왔다.
손님들 역시 품속에서 은자를 꺼내 사내에게 줬다.
“어서 말해보시오. 궁금해 죽겠소.”
“대체 무슨 유언을 남겼단 말이오?”
질문이 쏟아졌다.
백자안과 김지혜 역시 대답을 기다렸다.
특히 백자안의 관심은 컸다.
이야기 사내의 답변은 충격적이었다.
“악 소저가 남긴 유언은 다름 아니라 그녀의 정혼자에게 한 것이었소.”
“백자안 대협 말이오?”
“그렇소. 무림맹 지휘부의 시기를 받아 맹에서 쫓겨난 백 대협에게 유언을 남겼다 하오.”
“무슨 내용이었소? 두 사람은 정혼 관계를 서로 먼저 파기하지 않겠다고 했다던데······.”
“악 소저가 죽기 전에 백 대협의 이름을 부르면서 약속을 지켜 달라고 했다고 하오. 그 한마디를 하고 바로 숨이 끊어졌다고 하오.”
“아! 약속이라면 바로 혼인 약속을 지키라는 뜻이겠구려. 소문과 달리 백 대협께서 혼인을 거부한 모양이군요.”
“그렇소.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하기야 백 대협 입장에서는 이제 화산옥녀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될 상황이니, 혼인을 거부했을 가능성이 높소.”
“목을 매지 않아도 될 상황이라면?”
“하하하. 아직 모르고 있소? 무림삼미 중 나머지 두 분이 모두 백 대협을 흠모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오. 첫째 대륙표국 소국주 백리 소저는 공공연히 백 대협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고 있소. 두 번째 맹주님의 여식인 단목 소저 역시 부친이 백 대협과의 혼사를 추진하려고 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하오.”
“단목 소저는 맹주님의 대제자인 영호광과 약혼한다고 하지 않았소?”
“약혼 일정이 취소된 지 언제인데 그런 소리를 하시오? 단목 소저는 약혼 취소를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하오. 그게 바로 백 대협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이야기 사내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자안은 그 이야기를 듣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과장된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설아나 단목 소저 두 사람 모두 나와 혼사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눈 적이 없거늘. 그나저나 악 소저가 내게 약속을 지켜달라고 했다니, 정말 혼인 약속을 말한 것일까. 아니면······.’
백자안이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한 약속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귀면탈 소녀에게 빼앗긴 옥비녀를 찾아준다는 약속이었다.
‘아니다. 죽는 마당에 그까짓 옥비녀가 무슨 소용이 있다고. 하지만 이왕 약속했으니 반드시 회수해 악 소저에게 돌려주어야겠다. 직접 머리에 꽂아줄 시간은 없을 테니 나중에 무덤가에라도 꽂아 주어야겠군.’
백자안이 다시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코웃음을 치던 그녀의 얼굴. 그리고 재판정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이 빠르게 교차하며 만감을 자아냈다.
그때였다.
그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말이 들렸다.
이번에도 이야기 사내의 말이었다.
“한 가지 더 기이한 일이 있소. 악 소저가 유명을 달리한 지 벌써 닷새가 넘었는데 시신이 전혀 부패하지 않고 있다고 하오. 생전에도 옥녀심공 때문에 피부가 옥처럼 맑고 깨끗하지 않았소? 아마 그 때문에 죽어서도 그런 것 같소.”
“아, 그런 일이? 그러면 내일 장례식 후 시신을 어떻게 할 거라고 하오?”
“생사신의께서 내일 장례식장에 오신다고 하니 그분께 문의 후 결정한다고 하오. 이상이외다.”
사내의 말이 끝나자, 손님들은 각자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물론 그 내용은 악미미의 죽음과 혈교의 움직임 등이었다.
사사천교에 대한 이야기도 화제가 되었다. 물론 지금 최고의 화제는 역시 악미미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었다.
김지혜가 말했다.
“시신이 부패하지 않는 이유가 정말 옥녀심공 때문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직접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얼마 후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서둘러 산 위로 올라갔다.
화산파에 미리 가서 위지경덕의 조의서신을 매화검선에게 전달해야 했다.
화산파로 가는 길에는 무림인들로 가득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혈교 준동에 대한 대책을 세울 영웅대회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장례 후 곧바로 매화검선이 군웅들을 이끌고 혈교 본거지로 쳐들어갈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것이 딸에 대한 복수가 되고 화산파를 지키는 방안도 되기 때문이었다.
“조금 불길한 예감이 들긴 해요. 혈교 소행이 사실이라면 놈들도 무슨 대책을 세우고 있지 않을까요?”
“일리가 있군요. 하지만 놈들의 속셈을 미리 알기는 힘든 상황인 것 같습니다. 정말로 혈교의 소행이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기야 조사를 위해 만박서생께서 직접 오신다고 하니까 확실한 결론이 나겠지요.”
“만박서생도 아시오?”
“네. 만박서생께서도 이전에 우리 동방에 잠시 계셨지요. 아, 저기 본산이 보이네요.”
김지헤가 백여 장 앞에 보이는 전각들을 가리켰다.
바로 화산파 총단이었다.
곳곳에 꽂혀 있는 검은 깃발들이 악미미의 죽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백자안이 깊은 한숨을 내쉰 후 김지혜와 함께 화산파 총단 안으로 들어갔다.
끝
ⓒ 행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