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Reversal RAW novel - Chapter 65
다음날 새벽.
안개가 짙게 깔린 복주의 한 포구에 쾌속선 한 대가 정박해 있었다.
수십 명이 탈 수 있는 중형 배였다. 하지만 배 위에는 사공 한 명이 있을 뿐이었다.
백자안이 일부러 해남도까지 가는 뱃길을 아는 사람 한 명만 부탁한 때문이었다.
쾌속선 안에는 작은 나룻배 한 척도 있었다. 그것은 해남도 근처에 가서 백자안이 혼자 타고 갈 배였다.
다시 말해 쾌속선은 해남도 인근까지만 갈 목적으로 빌린 배였다.
검 한 자루를 다시 장만해 허리에 차고 있는 백자안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공이 천천히 일어났다.
덩치가 컸다.
죽립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백자안이 무심결에 사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뚱뚱한 몸이 한 사람을 완전히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백자안이 뱃머리에 오르지 않고 서 있자, 사공이 죽립을 벗었다.
한데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아닌가.
그리고 처음 본 여자가 아니라 지난번 악양에서 헤어졌던 설중화였다.
백자안이 놀랄 만도 했다.
물론 남해검파로 오면서 설중화의 근황에 관해 궁금하긴 했다.
그래서 단목수련과 통성명할 때 물어보니, 그녀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백자안은 더욱 영문을 몰랐으나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해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왜구 문제로 급박한 상황이라 그럴 여유가 없기도 했다.
한데 이렇게 뜻밖의 장소에 설중화와 재회를 하다니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백자안이 아니라 무정공자여야 했다.
설중화를 처음 보는 사람으로 행세해야 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무정 사범님. 남자가 아니라 놀라셨나요? 설중화라고 해요. 제가 사범님을 해남도까지 모셔드릴 겁니다.”
“아, 반갑소. 무정공자라고 하오. 한데 설중화 소저라고 하면 단목 소저의 사저 되시는 분이 아니오?”
“저를 아시나요?”
설중화가 미소를 지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유가 있는 표정이었다.
백자안이 그녀의 눈빛을 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눈빛이 다른 한 사람의 것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단목수련이었다.
사실 한 사람의 눈빛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눈빛이 비슷한 사람은 무수히 많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백자안은 어제 단목수련의 눈빛을 보면서 설중화를 떠올렸고 그 때문에 자세히 기억해둔 것이었다.
하지만 설중화의 눈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선명하지 못해 정확한 비교가 어려웠었다.
한데 지금 보니 자신이 그동안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단목 소저가 바로 설중화구나. 어제 단목 소저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은 이유가 그것이었군.’
백자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매우 비슷했다.
단목수련이 목소리를 일부 변형시켰음에도 그 기본 음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남해기인의 여제자는 단목 소저 한 사람이다. 설중화는 가명이었구나.’
백자안이 무심히 말했다.
“그렇소. 사실 본인은 그대의 진정한 신분을 알고 있소. 어제 우리가 대화를 나누지 않았소?”
“대화를 말인가요?”
설중화, 아니 단목수련이 당황했다.
자신이 설중화로 행세한 사실은 아직 아무도 몰랐다.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남해기인과 남해선생, 그리고 만박서생 세 사람이었다.
단목수련이 설중화로 행세했던 것은 사실 즉흥적이었다.
와룡대주로 내정된 그녀가 와룡대에 대해 몸소 겪어보고 싶다고 하여 그렇게 가상 인물을 만든 것이었다.
얼굴과 몸매 역시 역용술로 바꿨다. 단목수련이 택한 것은 뚱뚱한 소녀였다.
얼굴은 평범하게 만들었다.
체구를 뚱뚱하게 한 것은 장난기가 발동한 것도 있지만 혹시라도 천년색마에게 잡힐 것을 우려한 탓이었다.
친동생 같았던 시녀의 복수를 하고 싶었던 그녀는 와룡대 여러 조 중에서도 천년색마 수색조에 합류했던 것이다.
이후의 일은 강호에 알려진 그대로였다.
단목수련의 사저로서 그녀는 잠시 유명세를 치렀지만, 서서히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졌다.
물론 남해검파에 온 와룡대원 중에 그녀의 근황에 관해 물어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남해선생이나 단목수련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모처에서 치료 중이라는 대답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대답하기로 남해기인, 남해선생과 합의한 결과였다.
만박서생 역시 남해검파에 도착 후 그 사실을 전해 듣고 도움을 주기로 했다.
남해검파에서 단목수련의 비중은 매우 커져 있었고, 때에 따라 설중화라는 가상의 인물을 또 사용할 필요성도 있었다.
특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지금처럼 적진 가까이 가는 때였다.
만에 하나 포로로 잡히더라도 설중화로 있는 것이 그 파장이 적었다.
단목수련이 백자안을 해남도로 이끌 사공을 자처한 것은 어젯밤이었다.
백자안의 임무가 막중함을 느낀 그녀가 직접 만박서생과 남해기인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만박서생과 남해기인 두 사람 모두 만류를 했으나,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해남도 인근까지만 길 안내를 해주는 것으로 약속하고 그녀 혼자 배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목수련이 어제 일을 떠올렸다.
백자안이 설중화에 관해 물었을 때였다.
설중화가 바로 자신인데 무정공자란 사람은 만나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물론 설중화에 대한 소문을 듣고 물어본 것으로 생각했지만, 의구심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언뜻 대답을 못하고 미소만 지었다.
사실 그녀가 오늘 사공 임무를 자처한 것도 무정공자라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다가 즉흥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그렇소. 귀하는 바로 단목 소저가 아니오? 어제 설중화 소저 근황을 물어봤었는데,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지요.”
“제가 단목 사매라고요?”
단목수련이 일단 부인을 했다.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만박서생께서 출발 전 말씀해주셨소. 단목 소저께서 맹주님 여식이니 잘 부탁한다고. 절대 해남도까지 함께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소이다.”
“아! 총군사님이······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제가 단목수련이란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는 알려선 안 돼요.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오.”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속임수를 사용하긴 했지만, 진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제 내가 정체를 숨기는 상황이 되었군.’
백자안이 단목수련에 대해 이전보다 더 친밀감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무슨 의미인가요? 제가 보기에는 무정 사범님도 다른 신분이 있으실 것 같은데······.”
“하하하.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어서 출발이나 합시다.”
“좋아요. 어서 배에 오르세요.”
“알겠소.”
백자안이 배에 올라탔다.
단목수련이 노를 젓자 배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백자안이 뱃머리에 서서 두 발을 통해 내공을 주입하자, 나아가는 속도가 더욱더 빨라졌다.
“해남도 인근 해상까지 가려면 오늘 밤이나 되어야 할 거예요. 정말 혼자서 나룻배를 타고 들어갈 건가요?”
“그렇소. 해남도 안은 위험하니 나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편하오. 놈들 몰래 잠입하기도 좋고.”
“저도 함께 들어가겠어요. 무정 사범님 혼자서는 무리일 거예요. 연락할 사람도 필요하고 말이에요. 무엇보다 해남도에는 양민들도 수십만 명이 살고 있는데, 조심한다면 왜구 놈들의 눈에 띄지 않을 거예요. 물론 해남도에 들어가는 순간이 제일 위험하겠지만 말이에요.”
단목수련이 자신이 얻은 정보를 토대로 해남도 상황을 설명해줬다.
해남도를 장악한 왜구들이지만 섬 전체를 다스릴 생각은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해남도는 왜구들이 목표로 하는 땅이 아니라 임시 본거지였기 때문이었다.
해신 미야모토가 섬이 아니라 대장선에서 지내는 것도 그 이유였다.
그 때문에 해안선을 따라 각 포구에 왜구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따라서 일단 섬에 들어가기만 하면 왜구들의 감시는 덜한 편이었다.
물론 해남도를 다스리는 관아는 쑥대밭이 된 지 오래였다, 성주 역시 수천 관군과 함께 전사한 상황이었다.
양민들은 왜구들의 통치에 반항할 엄두도 못 내고 양식을 바치며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양민들 모두 관군이나 무림인들이 어서 와서 왜구들을 몰아 내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내륙 지역 역시 상당 부분 왜구들에게 점령당한 상황이라 그런 기대는 지금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
“그것은 아니 되오. 총군사님과 약속을 했소. 단목 소저를 해남도 인근에서 돌려보내기로.”
“호호. 또 그 말씀인가요? 제가 정말 총군사님이 제 정체를 밝혔다는 말을 계속 믿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백자안이 머뭇거렸다.
단목수련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저도 속았어요. 노를 저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무정 사범께서 넘겨짚으신 것을 깨달았지요. 어제 제 얼굴을 유심히 보시던데 그 때문인가요?”
“그렇소. 더는 속이기 힘들구려. 소저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어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소.”
“그게 아니라 제가 설중화로 있을 때 저를 만나본 적이 있으시지요?”
“······.”
백자안이 별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다.
단목수련과 자신의 처지가 바뀐 것 같았다.
“무정 사범님 눈빛 역시 제가 아는 한 사람과 비슷해요.”
“그게 누구요?”
“백자안 무인.”
“내가 백자안이란 말이오?”
백자안이 역용술을 이용하여 눈빛을 교묘하게 바꿨다.
그것은 정말 유심하게 봐야만 알 수 있는 차이였다.
단목수련이 백자안의 눈을 쳐다본 후 말했다.
“호호. 그건 아니에요. 저 또한 한번 넘겨짚어 본 거예요. 무정 사범께서 백 무인일 리가 없지요. 지금 자세히 보니 눈빛이 확실히 다르네요.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할게요.”
“그럽시다. 해남도 상황에 대해서 계속 말씀해주시오. 그보다 정말 해남도까지 들어가실 생각이오?”
“네. 총군사께서도 그 정도 예상은 하고 계실 거예요. 제가 섬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제 성격을 잘 아시니까요.”
“으음, 그럴 수도 있겠구려. 많은 생명이 달린 일이니······.”
“그래요. 많은 무사, 특히 양민들이 지금 고통을 받고 있어요. 왜구 놈들의 점령지에 있는 양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저는 제 한 몸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작전에 도움이 되고자 해요.”
“알겠소. 그 뜻에 경의를 표하오. 소저 뜻대로 하시오.”
“네. 감사해요.”
단목수련이 미소를 지으며 계속 노를 저었다.
그녀의 노 젓는 힘은 사공 수십 명이 배를 젓는 것과 비슷했다.
게다가 백자안이 내공으로 도움을 주고 있어 배는 정말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해 질 무렵이 되자, 어느 순간 주위에 다니는 배가 사라졌다.
해남도 인근까지 온 것이었다.
이제 좀 더 들어가면 왜구의 감시선들이 나타날 가능성이 컸다.
“정말 돌아가지 않을 것이오?”
백자안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네.”
단목수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목 소저는 용기 있는 분이오. 이번에 천운이 닿아 임무를 수행하면 나중에 낙양에서 술이나 한잔 합시다.”
“좋아요. 제가 영웅무관을 한번 방문하겠어요.”
단목수련이 말한 그때.
전방에서 목선 하나가 빠르게 다가왔다.
백자안이 급히 보니 배 안에 스무 명 정도의 왜구들이 서 있었다.
모두 병장기를 허리에 찬 채 활을 들고 있어 곧바로 공격을 가해올 것 같았다.
“왜구들이에요! 감시망이 확대된 것 같아요!”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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