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AW novel - Chapter (1784)
회귀자 사용설명서 1784화
중원무림빙의(189)
거대한 모용화연이 팔을 뻗어 우리들을 안아왔다.
도원향 전체가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
‘…….’
직후.
그간 내게 없었던 기억들이 쏟아진다.
마치 폭포수처럼, 아니, 해일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사실 쏟아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사마영의 존재가 사라지고 있는 건지도 명확하지 않다.
애초에 사라진다는 표현이 적절하지가 않다. 나는 사마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모용율이기도 했다. 모용용이기도 했으며 모용정련이기도 했다.
내가 사마영이라는 단일 개체가 아니라 수많은 개체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두렵고 무서울 만도 하건만 그 어떤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아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움직이기 위해 손가락을 까닥거렸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이 설명할 수 없는 이벤트가 계속해서 진행 중인 것이다.
‘…….’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 그나마 사고할 수 있다는 게 안심이 되는 점일까. 도원향 전체가 봉숭앗빛으로 물든 이후에 시간이 얼마나 지나고 있는 건지, 도대체 도원향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우리의 기억과 경험이 사라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모용화연이 우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는 것 역시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슨 변덕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모용화연은 이곳에 남아 있는 이들을 지우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당연히도 손화란에 대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녀가 조금 다른 선택을 하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지만… 만약 그녀가 자신의 말을 증명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결과를 맞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그녀의 경험과 기억이 융합되지 않고 있었지만… 대신 다른 이들의 기억들이 계속해서 쏟아진다.
그간 수많은 이기영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경험이 물밀 듯이 쏟아진다.
꼬물이에 대한 기억도 조금씩은 다르다. 떨어져 지낸 시간 동안 조금씩 마모되기도 한 기억들도 보이고, 그간 더 그리운 마음을 키워온 이들의 기억들도 보인다. 모두 각각의 방법으로 꼬물이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놈들이 그간 맺은 인연들이나, 생각들이 보인다.
개중에서는 중요한 것들도 있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도 보인다.
이를테면….
‘아. 금… 금가가! 금가가…!’
‘…….’
‘금가가….’
‘…….’
‘아. 금가가. 지금… 장난해요?’
‘…….’
뭔가 거지 같은 기억들도 쏟아지고 있다.
도대체 왜 이 새끼는 아직까지 안 죽고 살아있어서 괜히 사람을 화나게 하는 걸까. 굳이 이렇게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이런 엿 같은 추억이 섞이게 했어야 했던 걸까. 지금이라도 모용화연이 녀석을 쳐냈으면 싶었지만 아쉽게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녀석을 필터링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 와중에 황당했던 것은 이런 종류의 추억들을 받아들이는 내 입장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녀석이, 아니, 우리가, 아니, 내가 만금장의 장남과 어떻게 만났는지도 전부 다 기억이 난다.
바보 같았던 모습이나 조금이라도 화를 내면 찍소리도 못하는 모습들이 떠오른다. 산처럼 쌓인 금덩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 어리버리한 얼굴도 말이다.
우리 금가가… 돈은 많아서 좋기는 했지.
심지어 그립다는 생각마저 들어와 꽂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지 같은 기억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았는데 이제는 기분 좋은 추억이 되어버린 것이다. 저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 밖의 크고 작은 인연들도 전부 다 기억에 남는다. 그간 우리가 12차원을 돌아다니며 만났던 인연들. 어떤 개체는 점소이와 친해지면서 주루를 운영했었던 것 같았다.
이름도 기억하지 않은 주제에 꽤 정을 주었나 보다. 아. 당가령. 당가령도 있었지. 당가와 친해진 개체도 있었던 모양이다. 제법 나를 잘 따라다녔던 당가령도 기억이 난다.
밤하늘에 비친 호수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었는데… 사천당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려고 했다가 일이 꼬여 둘이 함께 야반도주를 했었다.
원남의 흑룡파에서 책사 짓거리를 했던 것도 이제야 기억이 난다.
심지어 녹림을 돌아다녔던 것도 전부 다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고아로 빙의해 그 땀내 나는 산적 놈들 사이에서 부대끼면서 토끼고기로 끼니를 때우고 위생이 개 에바인 곳에서 참 악착같이 살았었다.
중간에 뭔 협객이랍시고 찾아온 놈들을 막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도. 하나하나 차곡차곡 머릿속에 쌓여간다.
나는, 우리들은 12차원… 그러니까 중원 무림 전체를 눈에 담고 있었다는 것을 괜스레 깨닫는다. 수많은 풍경과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말이다.
뭐 파피야스의 어머니가 될 상황이었으니 어쩌면 이 역시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중요하지 않은 개체는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손화란은 자신이 필요 없는 개체라고, 중요하지 않은 개체라고 이야기했었지만, 그리고 다른 나들 중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이들도 있었던 것 같았지만… 여기에 중요하지 않은 개체들은 없다는 것을 새삼스레 실감하게 된다.
‘…….’
‘…….’
많은 이들이 그간 이곳과 이 장소와 그리고 우리 천이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가 된다. 각자의 경험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
지혜 누나와 만난 나도 눈에 보인다.
내가 찾을 수 없게끔 꼭꼭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거동도 하기 힘들 정도의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지혜 누나가 떠오른다.
‘진짜로 여기서 살림 차릴 생각은 아닐 거야. 그렇지. 오빠?’
‘…….’
‘왜. 내가 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있는 게 신기해?’
‘…….’
‘그럼… 당연히 찾아와야지. 내 님이 나를 버리고 이런 곳에서 시간을 썩히고 있는데 말이야.’
‘…….’
‘한 가지만 기억해요. 나를 버리면 재미없을 거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지혜 누나는 내가 바라보는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죽인 것은 아니었다. 아마 수명이 다했던 것 같았다. 꽤나 독하게 마음을 먹고 12차원을 방문한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겠지만, 결국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지막까지 독해지지는 못했던 것 같았다.
그녀 역시 적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지내다 보니 내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일까.
궁기신녀가 숨을 거둔 지혜 누나의 손을 잡고 오열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누나가 직접 찾아온 것 치고는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밋밋하다 싶었는데… 중간에 마음을 바꾼 걸까. 일단은 내 뜻을 존중하기로 해준 걸까.
여러 가지 유추하고 싶기는 했지만 지혜 누나의 심경의 변화에 대해서는 추측하기 어렵다. 너무 많은 기억들이 섞이고 또 섞였던 터라 지금 당장은 그녀의 마음과 그녀의 행동을 그녀와 있었던 모든 일들을 해석할 여력이 없다.
하지만 굉장히 나를 걱정하던 누나의 얼굴이 뇌리에 박혀 있다. 조용히 내 뺨을 만지던 손길도 말이다.
아마도, 아마 여러 정황상 어느 시점부터는 지혜 누나는 나를 도와주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 밖에도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눈 것도 기억이 난다.
한소라와 만나서 별것 아닌 약속을 했고…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하얀이를 바라봤던 것도 머리에 남아 있다.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펑펑 울음을 터뜨렸던 하얀이를 보면서 괜히 발을 동동 구르던 내 모습도.
쓰로누스를 만난 것도 기억에 남는다. 애초 외신누스였던지라 설득하는 데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지.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뭣했지만… 빙의자들을 찾아 죽인 것들은 완전히 머릿속에서 날아간 듯했다. 모용화연이 잡아먹은, 혹은 복숭아가 된 녀석들 중에 악독한 빙의자 살인마들이 주로 분포되어 있었던 걸까. 나로 인정할 수 없는 못된 개체들은 거르는 것이 맞는 행동이기는 했다.
아! 심지어는 희라 누나와 했던 이야기들도 기억이 난다.
‘안 할래.’
‘…….’
‘잊지 마. 자기.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분명히 자기 입으로 이야기했어.’
‘…….’
‘이번이 마지막이야.’
차르갈 칸의 머리가 공중으로 치솟던 그 순간이 말이다. 아마 다른 나들도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사마영이 회귀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었던 것인지, 어째서 28회차는 없다고 못을 박았던 것인지 전부 이해하고 있을 게 뻔했다.
새삼스레… 떠오른 기억들을 보니….
‘다들… 양보해 준 거구나….’
지혜 누나도, 희라 누나도, 한소라도, 또 성지훈도, 쓰로누스도, 크고 작은 도움을 많이 받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빙의자들과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었지만… 사실은 그게 정답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온다.
진청 이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을 생각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했었지만… 결국 빙의자들도 내 뜻을 존중해 주기로 한 것이다.
김현성은 이를 쉽사리 인정하지 못해 12차원을 증오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았지만 결국 현성이 역시 나를 존중하기로 한 것처럼 느껴졌다.
진 군사의 설득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당장 12차원을 뒤집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살생부를 만들고 몇몇 놈들을 콰직 해버린 것은 최소한의 항의였던 걸까. 어딘가에서는 분명히 현성이에게도 도움을 받았을지도….
괜스레….
보고 싶네.
그래. 보고 싶다.
꼬물이에 대한 그리움도 그리움이었지만….
많은 나들이 가지고 있는 제각각의 생각들이 모이니, 그간 잊고 있었던 것 같은 그리움들이 들이닥친다. 왜 그동안 잊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을 정도였다. 억지로 잊고 있었던 걸까.
모련은, 사마영은 애써 무시하고 외면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계속해서 떠올리고 있었던 나도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구는 잘 지내고 있나?
녹림에서 돼지들과 함께 어울리던 녀석은 특히나 더 돼지 새끼에 대해 떠올린 것처럼 보였다. 빅보이의 햄비어 꼬치도 많이 떠올렸던 것 같다. 뭐 결이 비슷한 놈들과 주로 어울려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그리움을 느끼게 된 게 분명할 것이다.
혜진이는… 뭐라고 하려나.
아미파에 있었던 모용용은 혜진이에 대해서 많이 떠올렸던 것 같았다. 아미파의 여협들이 얼마나 의협심이 넘치는지 생각해보면 조혜진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수준이기는 했다.
우리 하얀이는….
당가령과 함께 하고 있었던 내가 많이 떠올렸던 것 같았다. 성격은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뭔가 비정상적인 집착을 선보였던 게 비슷해 보였달까. 그나마 한소라와 함께 있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훔쳐봤기 때문인지 다른 이들보다는 덜하기는 했지만, 그냥 하얀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그리워했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 외에도 그리운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린 개체들이 보인다. 선희영도, 유아영도, 김창렬도, 엘레나도, 여전히 얄미운 얼굴의 안기모, 김예리, 박리안, 카스가노 유노, 여기에 와서 가족이 된 이들이었다.
뭐 하나 하나 전부 다 열거할 수도 없다. 대부분이 길드원들이었지만 길드원이 아닌 이들도 있다.
심지어 우리 전투력 측정기 파엘이까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내가 있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리고….
모든 나들이 하나같이….
김현성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게 느껴진다.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니기는 하다. 모두들 저마다 다른 경험을 했지만 결국 도원향(桃源鄕)에 도달해 모두가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한 사람을 떠올려야 했으니 말이다.
괜스레 조금은 외롭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눈을 떴을 때였다.
“…….”
“…….”
“…….”
“…….”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확히는 모용화연을 내려다보고 있는 김현성이 눈에 보였다.
“…….”
“…….”
“현성…아?”
“…….”
“…….”
“일어나셨습니까?”
“…….”
“오랜만입니다. 기영 씨.”
현성이가 울면서 웃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그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육체와 정신이 마모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괜한 주책을 부리고 있는 건지,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