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AW novel - chapter (375)
회귀자 사용설명서 375화
언제나 팩트는 승리하는 법이다(1)
‘멍청한 인간들.’
물론 상대의 의도를 알았다고 해서 저런 종류의 선전 활동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투나 전쟁을 치르기 전 상대방의 사기를 조금이라도 꺾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심지어 반 교국 연합인가 뭐시기는 본인들의 생각이 옳다고 느끼기까지 하니 선전에 공을 들이는 건 당연하다.
살짝 주변을 둘러보니 자리 잡고 있는 엘프들은 저 목소리가 익숙한 모양.
아마 상대 진영의 성벽이 자리 잡힌 시점부터 듣고 있었던 것이리라.
‘우리 쪽 대응은 없나?’
없을 리가 없다.
살짝 입을 열어 물어보았다.
내 질문에 성벽을 바라보고 있던 엘프 경비원 하나가 대답해 왔다.
흔치 않은 여성 검사.
자연스럽게 능력치를 보자 수치가 나쁘지 않다.
‘의외네.’
경비를 보고 있을 뿐이지만 가지고 있는 능력치는 엘룬 나이트 정도다. 아마 엘리오스의 눈에 제대로 들지 못한 것 같다.
“항상 들려오는 겁니까?”
“네, 명예추기경님. 보통 하루에 두 번 정도 들려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측의 대응은 어떻습니까?”
“왕국 역시 주기적으로 음성 증폭 마법을 이용해 반 교국 연합 쪽으로….”
“그렇군요. 흠…. 어떻습니까. 직접적으로 사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적들의 말이 전부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저희 역시 반 교국 연합이 원하는 바가 뭔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런 터무니없는 말 따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죠.”
‘교육은 되어 있네.’
이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내용이라고 한들, 지속적으로 저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누군가는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어차피 저들도 많은 사람을 움직이는 걸 바라진 않을 것이다. 단 한 명만 영향을 받아도 효과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한 명이 만들어낸 불안감은 아주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부대 내로 퍼질 것이다.
불안감이나 의구심은 마치 암세포처럼 계속해서 퍼져 나간다.
규모가 클수록 지휘부에서도 미처 파악하기 힘들다.
상급자는 신이 아니다.
아무리 병력 관리를 철저히 한들 고문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다.
그걸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교육. 일종의 세뇌 활동이라는 거다.
우리는 잘못이 없다.
바로 우리가 정의며 저들은 악이다.
어디서 먼저 선제공격을 날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부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명분은 이럴 때 상당히 중요해진다.
병력의 규모나 질 그리고 병과.
네임드가 전장에 끼칠 수 있는 능력과 기용할 수 있는 방향.
대륙의 전장에서는 수많은 변수가 있지만 병력의 사기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은 병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음성 증폭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
고개가 끄덕여질 만한 선전이었다.
-교국은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악마소환사라는 웃기지도 않은 자작극을 벌여 중립 지역을 분쟁지로 만든 것은 물론, 본인들이 한발 앞서 전쟁을 종용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것으로 모자라 지난 14일, 결국 먼저 전쟁을 선포하고 병력을 밀고 들어왔습니다. 수많은 민간 사상자가 생겼고 이에 우리 반 교국 연합은 전쟁의 깃발을 꺼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을 원하는 미치광이 집단이 더 이상 대륙을 활개치고 다니도록 좌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종족 여러분이 아는 신성교국은 이전의 교국이 아닙니다. 신성한 민주주의라는 사상의 탈을 쓴, 금서를 내들고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숨은 폭도에 불과합니다!
‘…….’
-현재 교국의 지도자로 있는 오스칼이야말로 진정한 여신의 반역자이며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입니다. 심지어 그녀는 교국을 이끄는 지도자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교황청의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말을 따르는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꼭두각시 정도는 아닌데….’
조금 뜨끔하기는 했지만 평정심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 대화를 나눈 엘프 경비병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으니까.
심지어 입을 열어오기까지.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저….”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저희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명예추기경님.”
“…….”
“감히. 이곳에 있는 엘프들 전원 저들이 하는 소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간혹 이렇게 열의가 넘치는 눈빛을 마주하면 너무나도 부담스럽다.
티 없이 맑은 엘프 경비병의 순수한 눈빛에 왠지 모르게 양심 한구석이 저리기 시작한다.
정하얀은 나를 믿어주는 엘프가 괜찮아 보였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꽉 잡아오는 중.
“그, 그럼요. 전부 다 거짓말이에요.”
“저, 저는 여신의 거울을 통해 이기영 명예추기경님께서 악마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봤고 실제로도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노예경매장에서 저희 친구들을 구해주신 이야기나, 거대한 마수의 안에 있는 동안 엘레나 님을 지켜주셨다는 일까지 말입니다.”
“…….”
그야 지켜주기야 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싶어진다.
“모든 엘프가 한마음 한뜻일 겁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이 저런 말에 상처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딱히 상처받은 건 아닌데….’
“마, 맞아요, 오빠. 괜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최선을 다해서 위로해 주려는 것 같다.
나보다는 본인이 더 화난 모양.
사실 이쪽은 저쪽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지 무덤덤하기만 하다.
그 와중에도 선전내용은 점점 더 격해지고 있다.
-우리 반 교국 연합은 언제든지 여러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부디 저희 연합과 척을 지는 것을 피해주십시오. 우리는 여러분과 싸우고 싶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는 것은 오직 대륙의 정상화입니다. 신을 사칭해 전 대륙을 농락하는 사기꾼과 신의 등 뒤에 숨어 민중을 착취하는 교황청, 꼭두각시 여왕과 그녀를 따르는 폭도를 타도하는 것만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여러분이 싸움을 싫어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부디 심사숙고해 주십시오. 이종족 여러분과 그 지도자 분께선 부디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저들의 말이 끝난 이후에는 오히려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래도 자꾸만 이쪽이 신경 쓰이는 모양.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 뭐.’
물론 조금 민망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전체적인 여론이 이렇다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물론 사기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을 멈춰서는 안 된다.
엘프 대부분이 저 말을 믿지 않겠지만 혹시 드워프를 포함한 다른 이들 같은 경우에는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어제 전부 다 읽어봤어야 했나.’
이쯤 되니 이쪽의 선전 내용이 궁금해진다.
이지혜가 읽으라고 준 보고서에는 분명히 적혀 있을 것이 분명.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금 내용을 살펴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어보면 되지, 뭐.’
눈앞에 있는 엘프 누나한테 물어보면 그만이니까.
“에베리아 왕국 측에서는 어떤 내용을 담은 선전을 하고 있습니까?”
“다양합니다. 주로 공화국 인간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라이오스 사건 그리고 그들이 전쟁을 먼저 일으켰다는 내용의 선전도 멈추지 않습니다. 비인간적인 실험이나 무자비하고 생각이 없는 벌목 활동 그리고 무분별한 사냥에 대한 비판까지. 매번 내용은 다르지만 이 정도가 보통입니다.”
“그… 렇군요.”
‘벌목 활동이랑 무분별한 사냥은 도대체 뭐야.’
엘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만한 이야기겠지만 대다수의 인간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없을 거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장담컨대 콧방귀를 끼고 있을 것이다.
‘그런 걸로 죄책감을 느끼기야 하겠어.’
이런 종류의 선전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문을 느끼게 하는 것.
물론 벌목이나 사냥 같은 것에 의문을 품고 있는 인간이 있을 리가 없다.
조금 더 직접적인 방법이 필요한 시점.
사실 목 아프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이미 가장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으니까.
“하얀아.”
“네?”
“여신의 거울 준비하자. 소라랑 같이.”
“어, 어떤 걸요?”
“라이오스에서 있었던 거 아직 남아 있지? 다른 거 필요 없고 그냥 그것만.”
“이, 이것만 그냥요?”
“응. 할 수 있겠어? 물론 상대 진영 측에서도 보일 정도로 크게.”
“한소라 교육생, 아니, 소라 씨가 도와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거 잘됐네. 마력이 많이 소비되는 일은 아니지?”
“저, 정연 언니한테도 도와달라고 할게요. 그리고 다른 엘프 분들께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준비되면 바로 이곳으로 오는 거다.”
“네!”
‘그럼 나는 시간 좀 따로 빼달라고 하면 되는 거고.’
사실상 문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엘프 여자는 이쪽이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궁금한 모양.
뒤늦게 전방을 바라보는 척하고 있지만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그사이에 정하얀은 몸을 허겁지겁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다른 게 필요 있겠어?’
하루 종일 이야기하는 것은 입만 아프고 머리만 아프다.
그대로 뜻이 전달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효율도 그다지 좋지 않다.
음성 증폭 마법에 들어가는 마력량도 상당한 수준.
당연히 문명의 힘을 빌리는 게 더욱 효과적이다.
자리를 지키고 있기를 얼마간, 정하얀의 부름에 허겁지겁 뛰어온 한소라와 황정연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력 홀로그램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것도 이제는 프로급이나 다름이 없다.
거대한 마력 홀로그램이 에베리아 왕국 측의 위에 크게 떠오르자 하늘뿐만 아니라 이곳에도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괜스레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설명할 시간 정도는 필요했기 때문이다.
“선전하는 시간 외에는 계속해서 띄워 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디가 선이고 어디가 악인지는 아마 저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지휘부에는 제가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부대에도 전파 부탁드립니다. 너무 놀라실 필요 없다고요.”
“지금 곧바로 전파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얀아, 곧바로 테스트하고 마력 홀로그램 작동시켜. 혹시 안 보일 수도 있으니까. 악마소환사 모습은 자세하게 클로즈업하고.”
“네!”
“준비되면 곧바로 신호.”
“주, 준비됐어요.”
“그럼 곧바로 송출.”
“됐어요, 오빠.”
어떤 장면을 내보낼지 두말하면 입 아프다.
빛기영과 친구들이 전설을 만든 그 서막.
악마소환사 진청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미 팔린 얼굴이다.
고생 한 김에 조금 더 고생해도 될 것 같았다.
초장부터 하이라이트.
아무리 공화국이 흑마법에 민감하지 않다 한들, 저런 장면을 보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듯한 청량한 목소리.
‘특별 출연 벨리알 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나의 계약자 진청이여. 너희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다. 어서 이 봉인을 풀어라! 그렇다면 더 큰 힘을 손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신의 거울에 떠오른 것은 어떻게 봐도 악마와 손을 잡은 채 빛을 위협하고 있는 진청.
악마소환사, 가면쓰레기 진청이 보여줬던 그날의 본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백날 선동과 날조로 떠들어봐야 팩트는 못 이긴다. 이 새끼들아!’
팩트의 힘은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