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AW novel - chapter (74)
회귀자 사용설명서 74화
과거 회상
과거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직 일어나지 않는 미래에 어째서 전쟁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때 당시에 나는 대륙의 중심과는 거리가 있었으니 당연할 것이다.
물론 예상가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튜토리얼의 이권 문제도 얽혀 있었고 사상과 이념문제 역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 중요한 것은 원인보다는 결과.
처음에 작은 전투로 시작했었던 분쟁은 어느덧 커다란 불씨가 되어 대륙 전체를 집어 삼켰다.
몇몇 집단은 서로를 이유 없이 증오했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이후에는 서로 가지고 있던 이념과 사상을 외치지도 않을 정도가 됐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보다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배설하는 것에 주력한 것이다.
악의는 악의를 만들고 분노는 분노를, 복수는 복수를 낳았다.
언젠가 끝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지구인과 원주민의 전쟁.
원주민과 원주민의 전쟁.
지구인과 지구인의 전쟁.
증오하는 대상을 바꾸고 확대시켜가며 전쟁에 몰입했고 서로가 서로를 노예처럼 부리고 학살했다.
차마 눈 뜨고도 보지 못할 정도의 참혹한 광경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고 모두가 이런 일을 모른 척하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 점점 커진 것은 물론 이 후에 있을 싸움에서도 연합은 뭉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대마법사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며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일본의 무녀는 간살당했고.
용병여왕은 생사가 불분명해졌다.
가족이라고 부르던 이들과 모든 클랜원이 목숨을 잃었고.
영웅이라고 불리던 많은 이들이 죽거나 망가졌다.
선택받은 용사의 성검 역시 그 빛을 잃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연합은 와해됐고 결국에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이 무의미한 전쟁의 1막이 마무리됐다.
멀리 던져진 부메랑이 다시금 이쪽으로 돌아온 셈이다.
모두 인류의 잘못이었다.
“전투와 전쟁은 다릅니다.”
“무슨….”
“솔직히 당신이 강하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이길 수 없어요. 물론 저뿐만이 아니라 제 밑에 있는 자들도 당신을 이길 수 없을 겁니다. 그건 몇 번을 생각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요. 절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너는… 인간이군….”
“예. 인간입니다. 가면 때문에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모두에게 칭송 받는 천재 검사는 역시 다른 모양입니다. 마력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들었었는데 영 질이 좋지 못하네요.”
“그냥 느낌일 뿐이다. 대충 봐도 너는 그들과는 달라 보이니까.”
“칭찬인지 모욕인지 구분하기 힘들군요.”
“어째서 그들의 편에 선 거지?”
“승률이 높은 쪽에 걸었을 뿐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이유이지요.”
“많은 인간이 죽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이미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인간이 죽었다고 한들, 과거처럼 많이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윗분들은 인간의 개체수를 유지하고 싶어 하십니다. 아주 평화롭고 규격화된 장소에서 말입니다. 그게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인류를 배신….”
“뻔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배신한 건 저뿐만이 아닙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건가.”
“글쎄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닙니다. 민간인을 죽여야 할 때는 조금 가슴이 아팠고 저를 사랑해 주는 귀여운 마법사를 배신해야 했을 때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연히 만난 운명적인 상대와의 사랑이라니, 그 순진한 아가씨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더군요. 푸핫. 설마하니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조금 더 써먹고 싶었는데. 죄책감을 이기지 못했나 봅니다.”
“너….”
“백성을 사랑하는 제국의 여왕이 그들 스스로를 죽이는 것을 지켜봤을 때에도 가슴은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필요한 일이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걸 지켜봐야만 했던 용사를 봤을 때도 가슴이 찢어지더군요. 그분은 자신이 당신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풉. 그러게 이런저런 오해가 생기지 않게 잘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너… 누구야. 누군데!”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어요. 아니, 그보다는 조금 이상하네. 네가 이렇게 격정적으로 반응할지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것과 연관 없는 사람이 죽는 건 역시 다른가 봐.”
“…….”
“너도 그렇게 착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잖아, 김현성.”
“너….”
“쓰레기 같은 위선자 새끼.”
“누구냐고 물었….”
“그건 알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어차피 말한다고 해도 넌 기억도 못 할 거다. 지금 그보다 중요한 건 네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냐는 거지.”
“죽여.”
“숭고한 척하지 마, 쓰레기. 너한테 선택권은 없으니까. 물론 조금 힘들 거라는 건 알고 있어. 그럼 이렇게 하자, 김현성. 나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네가 최소한의 양심에 비빌 수 있는 구멍 정도는 만들어 줄게. 옆에서 헐떡거리고 있는 개자식을 죽여. 그렇지 않으면 네 사랑하는 연인이 죽는다. 아, 연인이라고는 볼 수 없나?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네. 둘이 하긴 했지?”
“이 개자식….”
“다시 말하지만 선택권은 없다. 네가 거부한다면 이년은 인간 같지도 않은 변태 새끼들한테 넘겨서 하루 종일 보람찬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빨리 선택하는 게 좋을 텐데…. 물론 약속은 지킨다. 나는 누구와는 다르게 굉장히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거든….”
“…….”
“푸핫!”
“…….”
“거 봐요, 누나. 내가 할 거라고 했잖아요. 아아아아. 물론이죠. 약속은 지킬 거예요. 녀석도 살려줄 거고 저 여자도 풀어줄 겁니다. 지금 여기에서 죽이기엔 조금 아까우니까. 물론이죠. 여기서 죽으면 안 되니까요. 윗분들에게도 잘 말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 금방 돌아가도록 할게요. 걱정하지 마요, 내 단짝.”
“…….”
“…….”
“수고했어, 김현성. 뭐라고 인사를 해야 될지 잘 모르겠는데… 음. 이게 좋겠네. 다음에 또 보자.”
콰직!
“아.”
순식간에 눈이 번쩍 떠졌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등.
축축한 느낌에 기분이 더러워진 것도 잠시, 고개를 올리자 평소와 같은 천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돌아왔어. 돌아온 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에게 되묻는 질문이었다.
틀림없이 돌아온 것이 맞다.
이곳은 이전에 있었던 장소가 아니라 틀림없이 파란의 길드 하우스다.
방 한 쪽에 걸려 있는 검 한 자루.
마찬가지로 침대 위에 놓여 있는 검.
인테리어가 거의 없다시피 한 단출한 방 안은 틀림없이 자신의 방이었다.
항상 몸에 배어 있던 피 냄새는 없다.
비명과 괴성, 살려달라는 목소리 대신 들려오는 것은 아침을 여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다.
어둡고 불길한 마력 대신 환한 빛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에 있었던 일을 꿈으로 꾼 것은 꽤나 오랜만이다.
특히나 이렇게 현실감을 느끼는 것은 더욱더 오랜만이었다.
죽어가는 동료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었던 기분 나쁜 감촉이 아직도 손에서 느껴질 지경이다.
그때 나눴던 대화도 그리고 그곳의 분위기도 무척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기분이 더러워진 것은 당연지사. 자신도 모르게 온 몸에 힘이 들어갈 정도였다.
숨소리가 점점 더 가빠지는 것은 물론, 머리가 어지럽다.
괜스레 헛구역질이 올라오려고 했고,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한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자 결국에는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바닥에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을 쏟아냈다.
“하아… 하아….”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꽉 잡은 것은 당연지사.
‘지금은 달라.’
당연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튜토리얼에서의 사고도 없었고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지금은 달라.’
이전의 실수들을 최대한 바로 잡았다. 최소한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실수를 전부 다 바로 잡았다. 마음에 걸리는 건 단 하나도 없다.
“달라. 예전과는 달라. 분명히 달라….”
정하얀도 처음부터 발견할 수 있었고 김예리 역시 함께 시작했다.
튜토리얼 던전에서 정진호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커다란 성과.
물론 아직 찾아야 할 사람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무척이나 많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기반은 다져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무척이나 좋은 출발선에 서게 됐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다.
이전과 비교한다면 상상할 수도 없이 달라져 있었으니 말이다.
단순히 상황이 좋아졌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세상이 뒤바뀌어 버렸다.
누가 그 중심에 있었는지는 뻔할 뻔자.
1회 차 때는 본 적이 없는 유형의 인재.
‘이기영.’
그들은 1회 차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유형의 인재였다. 훈련에 잘 따라오고 있는 박덕구도 그랬고 대외적인 부분은 물론 파티의 모든 부분을 담당하는 이기영은 더욱더 그랬다.
마법사나 연금술사로서의 역할은 아직까지 기대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이기영의 진가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능한 사람.’
단순히 유능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옆에서 보고 있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느낄 지경.
좋은 조건으로 파란에 올 수 있게 손을 썼고 용병여왕과의 친분을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이전에 없었던 인재 선희영을 길드에 영입하는 것에 성공했다.
자신보다 파티에 기여한 것이 많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전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검은백조와 붉은용병의 연합, 1회 차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림이었을 것이다.
‘미래가 달라졌다.’
그것도 무척이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쉴 틈 없이 계속되는 전쟁은 무척이나 많은 인재를 죽이거나 바꿔 놨다.
애초에 많은 비전투직군이 자신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권력자들의 다툼에 휘말렸다.
초반부터 이런 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놔야 된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상황이 좋다.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작은 날갯짓이 태풍을 만든다.
그 장면을 실제로 보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다.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만난 작은 인연이 현재 린델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이다.
물론, 앞으로 흘러갈 미래를 너무 뒤바꾸는 것도 좋지는 않지만 최소한 지금 이 시점에서는 나쁜 흐름은 아니었다.
‘비축해야 해.’
지금은 최대한 힘을 길러야 하는 시기다.
여러 생각을 하고 있던 때, 밖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형씨.”
“네. 덕구 씨.”
“아침 먹을 시간이요. 형님이랑 누님 그리고 꼬맹이랑 사제 아가씨도 기다리고 있소.”
“네. 금방 나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늦잠을 자서….”
“매일 일찍 일어나던 양반이 늦게 일어나는 거 보면 잠이라도 설친 거 아니요?”
“비슷합니다.”
“야한 꿈이라도 꾼 거 아니요?”
“…….”
“거, 농담이요. 모두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내려오쇼.”
“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달라질 수 있다.
마음 한구석에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치솟기는 했지만 틀림없이 바꿀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하기 위해 시작한 2회 차였고 후회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모두에 대한 속죄.
‘달라질 수 있어.’
미래를 바꾼다.
그게 바로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현성 씨.”
“그럼 앞으로의 파티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모두들 식사하면서 편한 분위기에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네.”
“스펙업, 능력치 상승과 전직에 대해서입니다.”
“새로운 직업 말이요?”
“네.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