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0)
10화남은 거라고는 빚밖에 없는 자신에게 사기를 치려고 이렇게 밑밥을 깔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놈은 미친놈이 확실하다.’
그리고 미친놈이랑 대화를 길게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하지만.
“……얼마나 투자하실 생각입니까?”
혹시나 하는 확률도 있으니까.
필립은 만에 하나를 대비한다는 생각으로 넌지시 말을 던졌다.
‘부잣집 도련님이 남아도는 돈을 주체 못 하고 돈지랄을 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서글픈 희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필립은 기대를 완전히 버릴 수 없었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가리지 않고 잡고 봐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일단 빚은 얼마나 있습니까? 그리고 다음 사업 구상은요?”
그런데 미친놈의 대답이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필립의 마음속에 미약한 희망이 더해졌다.
“……한 번 망한 상단에 정말 투자하셔도 괜찮겠습니까?”
“뭐, 괜찮습니다. 저는 필립 씨의 재능을 믿고 있으니까요. 투자해 보고 싶습니다.”
‘날 언제 봤다고…….’
미친놈은 연신 미친 소리를 하면서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일관된 반응은 미친놈이 보일 만한 것이 아니다.
편견을 조금 걷어 내자, 눈앞의 어린 청년의 눈빛이 조금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리운 사람의 눈빛.
‘아버지…….’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있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확실히 알고 끝까지 걸어갈 신념이 있는 사람만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제야 억지로 외면했던 희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진짜 투자하시겠다는 거죠?”
두근.
절망 속에 내리는 한 줄기 빛을 보는 듯, 혹시나 하는 기대가 점점 커져 갔다.
“그렇습니다. 얼마면 빚을 갚고 재기하실 수 있겠습니까? 충분히 지원하겠습니다.”
달콤한 말이 필립의 기분을 두둥실 떠오르게 만들던 그때.
툭.
작은 소리에 무심코 눈이 돌아갔다.
희망을 던져 준 자칭 투자자의 갑옷에 말라붙어 있던 흙먼지가 떨어지며, 문양이 드러났다.
그 문양을 보는 순간, 끓어오르던 필립의 혈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망할, 그러면 그렇지.’
기대가 컸던 만큼 더욱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원하시는 대로 최대한 조건을 맞춰 드리겠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짧은 시간이나마 들떴던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자, 빙글빙글 웃는 ‘사기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 진짜…… 어린놈이 징그럽네. 내가 오해한 것도 있어서 적당히 보내려 했더니.”
자연히 뱉어지는 말은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엥? 뭐라고?’
로건은 당황했다. 잘나가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너. 사기를 치려면 좀 준비나 제대로 하고 쳐. 나한테 사기를 친 그 새끼들처럼.”
“……뭐?”
표정이 확 바뀐 필립에게서 생각지도 못했던 욕설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하…….”
자신을 구원해 줄지도 모르는 사람을 쳐 내다 못해 시비를 거는 모양새다.
그의 미래를 몰랐다면 그냥 머저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알더라도 바보 같은 짓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너 지금 뭐라고……?”
“너 투자자 아니잖아.”
“뭐?”
얘가 약을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이러지?
사업 한 번 실패했다고 미친개가 돼서 아무나 물려고 하는 건가?
그런 온갖 의문이 담긴 눈빛에 필립이 콧방귀를 끼며 대답했다.
“아직 신발에 흙이 다 털리지도 않았으니 카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네. 그런데 바로 상가를 찾아와 투자 얘기를 꺼내? 너 나 알아?”
필립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신발은 그의 말처럼 여전히 진흙이 조금 묻어 있었다.
그 손가락은 이내 로건의 가슴을 향했다.
“그리고 또, 내가 이 나라 귀족 가문 문양 다 외우고 다니거든? 그런데 그 갑옷에 그려진 문양은 서남부의 맥라인 남작가 문양이야. 그럼 뭐가 문제일까. 이 사기꾼 겸 귀족 사칭범 나리?”
둘 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뒤에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아 가슴이 뜨끔했다.
“그 집안은 처가에 빌붙어 사는 거지 집안이야. 그런데 투자? 자기들 빚도 못 갚는 집안이?”
‘윽…….’
전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가슴이 아팠다.
“내가 진짜 어린놈의 인생이 불쌍해서 충고하는데 귀족 사칭하다 걸리면 극형이야, 극형. 여기 슥삭 당한다고, 알아?”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손을 까닥이는 필립의 표정은 회의감과 더불어 염세적인 짜증으로 가득했다.
“아니, 그건 사실이…….”
“그리고 결정적으로, 너의 그 태도!”
“또 뭐가…….”
“자본이 급한 상인에게 투자자는 절대적인 갑이야. 그런데 너는 오히려 나한테 투자 못 해 안달인 것처럼 굴고 있잖아. 하다못해 대상도 잘못 짚었어. 이 초보 사기꾼아. 나 진짜 개털이라고 개털! 알아?! 이 개새끼야!!”
가슴 속에 쌓아 두었던 응어리를 모조리 쏟아 내려는 듯, 점점 강해지는 어조의 마지막 말은 숫제 비명처럼 들렸다.
“나…… 먹고 죽으려고 해도 돈 없다고! 이 새끼야!”
먼지 쌓인 상가를 진동시키는 필립의 목소리는 울음기로 가득했다.
엉엉 우는 성인 남자를 보는 것은 우는 여자를 달래는 것만큼 곤혹스러운 일이다.
로건은 새삼 그 사실을 느끼면서도 섣불리 발을 떼지 않았다.
필립의 지적에는 사실이 아닌 부분이 많았지만, 실제로 그가 회귀하지 않았다면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게다가 인생을 포기한 것 같은 청년이 그런 날카로운 지적을 해 오니, 역으로 그가 그런 상황에서도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고민이지.’
그런 재능이 있는데도 사기를 당했다면 아직은 미숙한 점이 있다는 것이고, 전생에 그가 알던 제국 거상과는 차이가 크다는 것이었다.
‘아직은 그런 능력자가 아니야.’
어쩌면 지금부터 겪어야 할 그의 고난과 역경이 미래의 그를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아니, 지금 상태로 보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세월이 거상을 만든 거겠지.’
하지만 로건은 그걸 기다려 줄 시간이 없었다.
황금충이 전생과 같은 능력을 개화할 때까지 개고생하면서 구르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면 여기까지 그를 찾아온 이유가 없어졌다.
‘어찌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로건의 고민은 문득 근본적인 의문에 다다랐다.
‘가만, 굳이 상단에 투자할 필요가 있나?’
미래의 제국 거상이 지금 상인의 길 자체를 포기하려 하고 있다.
‘이건 어쩌면 미래의 제국 10대 상인을 내 사람으로 만들 기회다!’
복잡했던 생각이 순식간에 정리되는 듯했다.
최악의 경우 그가 전생처럼 성장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은 그 나름대로 아레스 제국의 저력을 약화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로건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빚을 다 갚아 주고, 당신을 평생 고용하겠다면 얼마면 됩니까?”
그 말은 필립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뭐 인마?! 아직도 사기…….”
또다시 크게 소리를 지르려던 필립은 로건의 손 위로 솟구치는 황금빛 포스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저 나이에 포스를 사용할 수 있는 천재가 귀족 신분을 위조해 사기를 친다고?
창창한 미래를 똥통에 처박는 그런 멍청이가 있을 리 없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껏 그가 했던 짐작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
“아… 아하하, 지, 진짜?”
멍한 필립의 모습을 보니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미래의 거상이다. 제국 10대 상인이야.’
로건은 그렇게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표정을 다스렸다.
그렇게 잠시 어색한 시간이 지나자,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진짜 도련님이었네. 끄으응. 그런데 뭐라고 하……셨더라?”
욕설을 퍼붓다가 갑작스럽게 존대를 하려니 혀가 꼬이는지, 지극히 어색한 표정과 함께 필립이 되물었다.
로건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빚을 다 갚아주고 당신을 평생 고용한다면 얼마면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저를 고용하시겠다고요? 그것도 평생?”
“그렇습니다. 그 계약금을 얘기해 보십시오. 빚을 갚아드리는 것은 선물로 치겠습니다.”
로건은 이쯤이면 두말 할 것 없이 넘어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필립의 표정은 그 말을 듣고는 더욱 구겨졌다.
“……제가 헛짐작으로 무례를 범했다는 것은 일단 사죄드리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서두에 로건의 찜찜함이 커졌다.
“하지만! 제가 모르는 사이 엄청난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라면 맥라인 가문은 그럴 여유가 없으실 텐데요?”
“아…….”
“어차피 빚쟁이 집안이니까 제 빚까지 얹어서 같이 죽자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동반자살에는 취미가 없습니다.”
필립은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을지는 몰라도 하나는 확실했다.
‘맥라인 남작가는 거지 가문이야. 무슨 돈이 있다고!’
사기는 아니더라도 귀족가 도련님이 자신을 놀리려는 것이거나, 저 도련님이 철부지라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둘 중 하나임은 분명했다.
‘귀족으로 태어나니 세상일이 다 쉬워 보이나?’
필립은 이 귀족도련님에게 현실을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남아있는 빚만 25만 골드, 그리고 제 몸값도 그 정도는 되겠습니다. 상인에게 확실한 것은 계약서뿐이지요. 혹시 바로 계약 가능합니까? 아니면 좀 기다려 드려요?”
처음부터 끝까지 절절하게 비꼬는 어조에 도련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럼 그렇지.’
그 표정을 보며 필립이 마지막 남았던 희망마저 꺼트리려는 찰나.
“50만이라…… 계산이 이상하군요. 빚이 25만인 사람이 어떻게 몸값이 또 25만입니까. 마이너스 25만이라면 모를까.”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어온 강력한 팩트 공격이 필립의 가슴을 깊숙이 후벼팠다.
“크흐흡. 그, 그게…….”
“뭐, 좋습니다. 그 자존심 가격 5만 더 쳐 드리겠습니다. 합쳐서 삼십만 어때요?”
“뭐……? 아니, 뭐라고요? 사, 삼십만?”
“싫어요?”
로건의 말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지만, 필립은 그조차 느끼지 못한 듯했다.
“그럼 그냥 갈까요?”
생각지도 못한 액수에 정신을 못 차리던 필립은 결국 그 한마디에 무너졌다.
“30만 골드! 좋습니다! 무조건 좋아요!”
필립으로서는 그냥 던져 본 말에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온 꼴이다. 그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바로 계약할까요?”
“……예?”
별일 아니라는 듯한 말과 함께 로건은 등에서 여행자용 배낭을 내려놓았다.
쿵.
배낭 같지 않은 묵직한 울림이 더욱 묵직하게 필립의 가슴을 두드렸다.
로건의 무심한 손길에 열린 배낭 입구로 보이는 황금빛. 그 안에 든 모든 것이 금화였다.
로건이 오늘 길에 쿠퍼스 카일 지점에서 미리 찾아 둔 돈.
상인이라면 저 황금 더미에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을 터였다.
“다행히 계약금은 충분한 것 같군요.”
필립은 미소 짓는 배낭 주인의 얼굴에서 후광이 보이는 것 같았다.
‘……뭐지, 이 사람? 천사인가?’
갑작스레 현실감이 사라진 필립은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 이게 저, 정말.”
눈앞의 금화 배낭을 보며 한참을 꿈이라도 꾸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필립이 이내 눈물을 글썽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꼼짝없이 노예라도 되어야 하나 생각했는데…….”
‘이러다 무릎이라도 꿇…… 아니, 이미 꿇었군.’
애초에 주저앉아 있었기는 했지만, 꼭 자세가 신을 보며 기도하는 신자의 모습 같은 꼴이 된 지라 조금, 아니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저, 그런데 왜 저를 그런 거액을 쓰면서까지 고용하려 하십니까?”
“말했잖습니까. 미래의 가능성을 본다고.”
“……그 말이 진심이셨습니까?”
“혹시 압니까? 당신이 뒤늦게 재능을 개화해서 내 재산을 크게 불려 줄지.”
‘아니, 반드시 될 거다. 나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되어야 해.’
로건이 자신의 의지를 담아 눈에 힘을 주는데, 그것이 왜인지 또 필립을 감격하게 한 것 같았다.
“……이렇게 저를 믿어 주시는 분은 처음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이렇게는…….”
울컥한 듯 잠시간 감정을 다스리는 필립을 보며 로건은 미소를 머금었다.
“자, 계약하러 갑시다.”
“예? 어디를…….”
“여기서 계약서를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예?”
계약서를 어디서 쓰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로건이 어리둥절한 필립을 데리고 간 곳은 카일에서도 몇 없는 마법 용품 상점이었다.
* * *
“자. 계약 완료!”
필립의 손가락에서 핏방울이 떨어지자, 계약서에 새겨진 푸르스름한 마나가 빛을 발하며 필립의 몸을 휘감았다.
무려 1만 골드나 하는 값비싼 마법 계약서였다.
앞으로 필립은 로건에게 해가 될 일을 의도적으로 행하면 영혼이 찢기는 듯한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게 싫다면 스스로가 포스를 각성하여 상급 이상의 기사가 되거나, 4서클 이상의 마법사에게 그 수백 배에 달하는 돈을 주고 저주 해제를 부탁해야 할 것이다.
노예라는 말이 적혀 있지 않을 뿐이지 사실상 30만이라는 돈과 필립의 인생을 바꾼 것이나 다름없는 계약서.
그렇기에 바로 직전까지 감격에 젖어 있던 필립의 표정이 썩어들어 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천사는 무슨, 내 눈깔이 삔 거지. 썩을…… 나 하나 노예 만들려고 노예 30명 가격의 계약서를 쓰냐. 거기다 30만 골드까지?”
투덜투덜 이어지는 필립의 불평.
그 말을 들었음에도 로건의 얼굴에는 미소만이 가득했다.
“초면에 그럼 서로 어떻게 믿냐고. 거금을 투자했으면 그만한 보장이 있어야지.”
이제는 완연해진 평대에 필립이 울컥했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수긍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놈들에게 끌려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아예 노예로 적시되어 낙인찍히는 것보다는 노예 비슷한 것이 그나마 낫다.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스스로를 다독여 보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더욱 기분이 축축 처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필립이 다시 우울함 속으로 빠지려는 순간, 로건은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우리가 서로 신뢰를 쌓고 난 다음에는 계약서를 없애 줄 수도 있어. 그러니 앞으로 잘해 보자고.”
기한도, 조건도 없는 막연하기만 한 말.
하지만 그 말은 필립의 죽은 눈동자에 작은 불씨를 심기에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