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02)
102화
“저요? 저랑 가주님, 그리고 대공자. 이렇게 꼴랑 셋이요? 시종도 없이?”
물자를 가지고 지원을 왔던 드웨인이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무리 국장 기간에 최소한의 인원만을 데리고 오도록 권고받았다고 한들, 이건 적어도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반문에도 로건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이미 시일이 좀 지났어. 가뜩이나 서남부 끝인데, 지금부터 수도까지 열심히 달려야 국장 시작 날짜에 겨우 맞출 수 있을걸?”
“두 분은 그렇다 치고, 저는 왜요?!”
“당신이 지금 말했잖아. 시종도 없냐고.”
“예? 설마?”
“온 김에 당신이 수고 좀 해 줘야겠어.”
40대의 재무행정관이 대공자의 한마디에 임시로 시종의 보직을 맡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두두두두.
“고, 공자님. 이건 너무 무리한 일정, 이크!”
“입 벌릴 시간에 엉덩이 들고 상체 숙여, 드웨인. 그러다 나중에 앉지도 못한다!”
“으아아, 젠장! 왜 하필 나냐고요!”
팔자에도 없는 기마 질주에 거구의 행정관은 비명을 질렀지만, 같이 내달리는 중인 동행들은 자비가 없었다.
이틀 내내 계속된 일행의 질주는 잘 닦여진 관도 위에서 화려한 사두마차를 만나는 순간에서야 간신히 멈춰졌다.
불꽃 안에 핀 장미의 깃발을 단 마차를.
“이거 참. 악연도 인연이라더니, 인연이라는 게 이렇게 질겨. 웃기게.”
마차에서 내린 푸른 눈의 금발 중년인의 목소리는 제법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또렷이 들렸다.
“그러게 말이오, 백작. 가던 길 가시지 굳이 멈춰 서서 우릴 기다려 줄 필요는 없는데?”
“운 좋게 명줄 좀 늘어난 인간들 얼굴이나 다시 한번 보려고 말이야. 혹시 아나? 내게도 그 행운이 좀 옮겨 올지.”
“얌전히 가던 길 그대로 저승까지 쭉 가 주셨으면 좋겠는데. 길 막지 말고.”
“패드릭 맥라인. 천운으로 목숨을 구했다만 그것도 국장이 끝날 때까지일 뿐일 텐데. 내 성질 건드려 봤자 그 끝이 더 비참할 거란 생각은 못 하나?”
“아무래도 그 비참한 끝을 보는 게 우리는 아닐 것 같아서 말이야. 비킬 생각 없다면 먼저 가도 괜찮겠지?”
로저 비프로스의 좌우에는 플란츠와 아슬란이 서 있었고, 그 뒤에는 토모도에서 보았던 상급기사들도 셋이나 있었다.
당장이라도 전투가 벌어진다면 압도적으로 불리할 터인데 패드릭의 말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하……. 뭘 믿는지는 알겠어. 국장이 시작되기도 전에 맥라인이 잘못되면 다 내 짓인 줄 알겠지. 하지만 그래서?”
로저 비프로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일행들에게서 살기가 치솟아 올랐다.
“내가 그까짓 것 신경 쓸 것 같은가? 너희들을 여기서 묻어 버리고 뒷말만 수습하면 그만이야.”
챙!
각기 무기를 뽑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서는 비프로스의 기사들.
패드릭의 안색이 살짝 굳고, 드웨인은 사색이 되는데.
“쯧, 허세는. 신경 쓰지 않았다면 바로 공격했겠지. 무의미한 입 털기는 그만하고 각자 갈 길 갑시다. 당신도 이제 여기 있는 것을 보면 좀 늦었을 텐데?”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놀리는 로건에게 백작의 시선이 꽂혔다.
“……크. 크크크. 생각해 보면 다 네놈이 시작이지. 로건 맥라인. 그래,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마음껏 즐겨 둬라. 맥라인이 불타오를 때 네 표정이 어찌 변할지 벌써 기대가 되는구나.”
로저 비프로스의 손짓과 함께 기사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로건이 말을 몰아 태연히 그 옆을 지나쳤다.
패드릭 역시 덤덤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내 검 잘 보관하고 있으시오, 남작. 조만간 다시 받으러 갈 테니.”
움푹 꺼진 볼 때문인지 인상이 다소 초췌해진 아슬란이 날이 선 말을 남겼지만, 맥라인 부자는 그저 피식 웃으며 지나칠 뿐이었다.
하지만 덩칫값도 못 하는 중년의 행정관은 전혀 익숙하지 않은 살벌한 분위기에 파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며 억지로 그 뒤를 따랐다.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씩 입꼬리를 올린 로저 비프로스가 일행의 뒤에 한마디를 더 남겼다.
“수도에 올라가면 가능한 한 다시 내려오지 않는 것을 권하네. 검공에게 빌붙든, 딜런 그 영감에게 빌붙든 꼭꼭 숨어 있으라고. 영지를 잃어버린 귀족의 삶이 적어도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고삐를 잡은 패드릭의 손에 일순간 강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로건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고, 마차를 지나쳐 간 세 기의 기마는 조금씩 속도를 더해 이내 원치 않는 동행을 떨쳐 내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이틀 내내 피로를 호소하며 쉬어 가기를 원했던 드웨인이 있었다.
“공자님. 영주님. 좀 더 빨리요! 국장이 코앞인데 왜 그렇게 여유를 부리십니까!”
그 과한 호들갑이 우스워, 오히려 미래에 대한 걱정이 조금은 희석되었다.
* * *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거야?”
“난들 알아? 모르니까 문제지?”
“장례식은…….”
“귀족들이나 중요하지. 우리야 뭐…….”
“어떻게 될 것 같아, 자네는?”
시끌시끌.
오래간만에 도착한 수도 그랑의 분위기는 예전보다 더욱 소란스러웠다.
서쪽 성문에서부터 바글거리는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왕의 죽음에 대해 떠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탁.
“비키시지.”
“그쪽이야말로.”
길을 가던 기사 둘이 널널하게 뚫려 있는 좌우의 공간을 두고 바짝 붙어 신경전을 벌였다.
하지만 굳이 먼저 검을 뽑는 이는 없었다.
“또 저기야.”
“데이비스 가문과 클레트…….”
“지들이 1왕자 2왕자도 아닌데 말단 기사들끼리 자꾸 왜 저래?”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파벌의 노골적인 대립이 일반인의 눈에도 심심치 않게 띌 정도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국장이 선언된 이후 무력의 사용이 금지되었기에 망정이지 당장 어느 곳에서 칼부림이 시작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거리를 지나치는 일반 시민들의 얼굴에 짙은 먹구름이 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분위기가 생각보다 더 안 좋은 것 같구나.”
“그럴 수밖에 없지요.”
“세상이 어찌 되려고…….”
“아니 영주님, 지금 세상이 문젭니까? 당장 우리가 문젠데. 그, 그놈들 어떡할 거에요!”
토모도 성에 물자를 전달하러 올 때까지만 해도 그럴 줄 알았다며 웃음 짓던 드웨인은 온데간데없었다.
상경길에서 로저 비프로스를 마주친 이후, 현재 비프로스와 맥라인의 전력 차이를 추궁하듯 들은 후에는 항상 저 모양이었다.
아무리 가장 신뢰하는 가신이라도, 삼 일이나 참아 줬으면 많이 참았다.
“그만! 드웨인. 그건 우리, 아니 로건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더 이상 수선 떨지 말아라. 그렇지?”
“물론입니다, 아버지.”
“……이번에는 미리 상의를 좀 해 줬으면 좋겠다만 말이다.”
불안한 듯 살짝 덧붙여진 말에 로건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일은 정말로 상의를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웃지 말고. 불안하니까.”
“저 웃음은 분명히 사고 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영주님. 단속 잘하셔야 해요!”
“일단 저택에서 짐이나 푸시죠. 계속 여기에 서 계실 생각입니까?”
“저택? 벌써 숙소를 구했느냐?”
“숙소가 아니라 저택입니다. 지난번에 수도를 떠나기 직전에 사 두었습니다. 아무래도 일이 생길 때마다 스승님댁에 머물기는 뭣하여…….”
실제로 가는 건 자기도 처음이지만, 로건은 필립이 알아서 잘 구해 놨으리라 믿었기에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럼 호텔을 잡으면 되지 왜 집을…….”
“사고를 이미 치셨군요. 왜 굳이 수도에 집을……. 가격이 얼만데……. 과소비는 습관이라더니.”
울상이 되어 중얼거리는 드웨인의 얼굴을 보며 로건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 * *
“처음 뵙겠습니다, 영주님. 공자님. 저택의 집사, 레트로입니다. 이쪽은 하녀 레나, 루시입니다. 인사드려라.”
드문드문 갈색 머리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새하얀 백발인 노년 신사가 하녀들과 함께 일행 앞에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 뒤에 보이는 작은 정원과 아담한 이층집은 솔직히 저택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규모가 조금 작았다.
하지만 위치가 내성의 중심부 근처라는 것과 외관이 화려하진 않지만 깨끗하고 단아한 멋이 느껴지는 것을 보아 그 자그마한 규모만큼 싸지는 않을 것 같았다.
드웨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서는 주인 부자 대신 집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집사 양반. 여기 정도면 가격이 어느 정도…….”
“제가 알기로는 필립이라는 분이 전 주인께 300만 골드 정도에 사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 삼백만?! 대, 대공자! 집 한 채 가격이 무슨……!”
“그리고 지금 시세로는 500만 골드 정도 하지요.”
먼저 들어간 로건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드웨인이 순간 멈칫하며 어벙한 얼굴로 집사를 돌아보았다.
“5, 500만?”
“네.”
“분명 몇 달 전에 샀다고…….”
“요즘 시절이 흉흉하다 보니 최근에 좀 올랐습니다.”
“흠. 흠. 그렇다면 뭐…….”
금세 헤벌쭉한 얼굴이 되어 돌아서는 드웨인을 보며 집사는 매달 내야 하는 관리비나 세금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래. 이제 어쩔 생각이냐?”
간단하게 여장을 푼 뒤 이어진 패드릭의 물음은 한결같았다.
드웨인처럼 호들갑 떨지는 않을지라도 그 역시 국장 이후의 대책이 무엇인지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단 스승님을 만나 뵈려 합니다.”
“역시. 검공 각하가 네가 생각한 대책이더냐?”
“……예? 아, 아닙니다. 그냥 수도에 올라왔으니 인사를 드리려고요.”
그 양반이 지금 제가 하려는 일을 알면 제 목을 칠지도 모릅니다.
로건은 속마음을 숨긴 채 아버지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식 국장의 시작은 이제 하루 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국장이 끝난 뒤에나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뭐, 필립도 아직 안 왔고.’
그전에는 아무래도 파벌들의 분위기나 살펴보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래? 그렇다면 나도 따라가마. 존경하는 검공 각하를 뵙게 된다니 이 나이에 주책맞게 설레는구나.”
반응이 조금 걱정되는 혹이 따라붙었다.
* * *
“로건 공자님, 방문을 환영합니다.”
“오랜만입니다, 제이건.”
검공가의 저택을 지키는 기사와 인사한 뒤 안으로 들어서자, 여전히 한결같은 부관 루이스가 그를 안내하기 위해 뒤를 따랐다.
“굳이 직접 나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각하의 유일한 제자분 아닙니까. 이 정도면 당연한 의례이니 부담 가지지 마십시오.”
루이스는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히 말했지만.
‘그것보다는 당신 얼굴 보는 것 자체가 심적으로 부담이라…….’
로건은 전생에서 따르던 대장에게 에스코트를 받는 것이 여전히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억지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스승님은 괜찮으십니까?”
“아무래도 충격을 많이 받으셨지요. 폐하께서 그렇게 돌아가실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요.”
“음?”
뒤에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아버지.
아차 싶은 마음에 로건이 황급히 다른 질문을 꺼냈다.
“아. 폐하께서 어찌 돌아가셨는지는 혹시 알고 계십니까?”
말을 돌리기 위해 알면서도 그냥 물어본 말이었는데.
“정무를 보시다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신전에서 말하기를 과로로 인한 뇌출혈이라고 합니다. 신관들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고…….”
“네?”
예상 밖의 답변에 그는 진짜로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왕의 죽음과 형태가 달랐다.
전생에는 왕이 특별한 일 없이 자다가 죽었다고 알려졌다.
신전에서 공표한 원인은 노환으로 인한 급성 심장마비.
그랬기에 왕을 만났을 때 그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의아해했던 것이기도 했다.
‘겉으로는 건강해 보여도 늙은 왕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과로사? 뇌출혈?
일국의 왕이 정무를 보다 쓰러져?
‘노환이랑 비슷한 맥락 같기는 한데…… 조금 찜찜해.’
대체 역사가 왜 바뀐 것인지 도통 짐작이 되지 않았다.
혹시…….
“불경한 이야기지만, 혹시 사고가 아닐 확률은…….”
“지켜보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각하께서도 직접 조사를 하셨는데 별다른 의문점은 찾지 못하셨습니다.”
“…….”
어차피 벌어진 일.
지금은 왕의 죽음을 파고들 때가 아니긴 했다.
로건은 의문점 하나를 마음속에 접어 둔 채 얌전히 루이스를 따라 걸었다.
아니, 따라 걸으려 했다.
“로건. 네 얘기와 상황이 좀 다른 것 같다만…….”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게 만드는 아버지의 말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스승님께서 선왕 폐하와 사이가 각별하셨으니, 아무래도 충격을 받으신 모양입니다. 그렇지요, 루이스 님?”
“아, 예. 아무래도 뭐 그렇지요. 두 분은 젊어서부터 오랜 시간을 함께하셨으니까요.”
“스승님께서 평소에도 폐하의 건강 걱정을 그렇게 하셨는데, 결국 막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아, 각하께서……. 예. 이런 일이야 사람이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요.”
보통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노인이라면 흔히 하는 말이 건강 걱정이다.
갑자기 왜 이런 뻔한 말을 할까?
루이스는 의아한 눈으로 로건을 바라봤지만, 그 뻔한 말이 패드릭의 마음속에 살짝 솟아오른 의문을 잠재워 주었다.
납득한 듯한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간신히 한숨을 돌린 로건은 그제야 다시금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