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03)
103화
“로건 공자와 패드릭 맥라인 남작께서 방문하셨습니다.”
– 들여라.
끼이익.
낡은 마찰음과 함께 집무실의 문이 열리자, 햇빛이 비치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중년인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를 초월해 정정해 보이던 금빛 머리에는 어느새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었고, 팽팽하던 이마도 굵은 주름살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헤어진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새 십수 년은 더 나이를 먹은 것 같은 스승의 모습에 로건은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스승님?”
“그래. 앉아라.”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얼굴이…….”
“늙은이가 그동안 회피했던 세월을 이제야 조금 맞은 것뿐이다. 호들갑 떨지 말아라.”
말은 그리했지만 검공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러유저의 안색이 저런 상태라면…….
“충격을 받으신 상태에서 폐하의 일을 조사하시느라 좀 무리를 하셨…….”
“루이스.”
“죄송합니다, 각하.”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일이나 신경을……. 아! 내 정신을 보게. 그럼 이쪽이…….”
검공이 로건의 옆에서 말없이 자신을 지켜보던 패드릭에게 시선을 보내자, 패드릭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패드릭 맥라인입니다. 부족한 아들놈이 신세를 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평소 흠모하던 각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그렇구려. 남작, 좋은 얼굴로 환대해 주지 못해 미안하오.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닙니다. 이 시국에 만나 주시는 것만 해도 영광입니다. 바쁘신데 저희가 방해를 한 것이 아닐지.”
“아니. 아니오. 지난 일주일은 이 노구가 생각보다 더욱 능력이 없다는 것을 체감한 시간이었을 뿐이오. 이제 더 바쁠 일은 없지. 어서 앉으시오.”
기사의 왕국 그란디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사, 검공 펠릭스 에스페란자 공작이 자책하듯 비관적인 말을 토해 내고 있었다.
듣고 있던 모두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아, 내가 또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나. 흠,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맥라인 가문…….”
“스승님. 저희 가문의 일보다는 현재 수도의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저희도 오늘 막 도착한 터라 모르는 게 많습니다.”
“아. 그래, 그게 낫겠구나. 후우…….”
확실히 스승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언제나 그 자리에 든든한 기둥처럼 있을 것 같던 사람이 망가진 모습은 영 어색하고, 보기 힘들었다.
“피곤하시면 나중에…….”
“아니, 아니다. 국장이 곧 시작될 텐데,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해야지. 뭘 물었었지? 아, 수도의 상황. 좋지 않지. 요르단, 후안 그 빌어 처먹을 두 놈 때문에…….”
좀처럼 보기 힘든 검공의 욕설.
하지만 이어진 내용은 그 모습이 납득이 갈 정도로 좋지 않았다.
수도에 들어올 때 로건 일행이 보았던 모습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
정식으로 국장 의례가 시작되기 전부터 수도에 모여든 1, 2왕자의 파벌들이 수도 곳곳에서 신경전을 벌이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귀족들은 노골적으로 파벌별로 모여 상대 파벌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칼만 안 들었을 뿐이지, 사실상 전쟁 직전의 상태.
그것이 검공이 보는 현 그랑의 상태였다.
“이러다간 나라가 두 쪽으로 쪼개질 판이다. 스스로 파벌을 단속하고 균형을 잡아야 할 두 공작이 아예 불화를 부추기고 있어. 심지어…….”
이야기를 하다가 말고 무엇을 떠올렸는지, 검공이 이를 갈았다.
“감히 나에게도 그 개싸움에 참여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그놈들이.”
까드득.
극도의 분노가 그대로 느껴졌다.
“스승님께서는 예전부터 후계 싸움에 끼지 않겠다고 말씀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랬지. 그런데 감히 놈들이…… 3왕자님의 목숨으로 나를 압박하고 있다.”
“예?!”
패드릭은 크게 놀라 펄쩍 뛰었지만, 로건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내용이기에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왕위 계승권을 가진 3왕자님이 눈에 거슬린다는 거군요. 더구나 왕자님께서 성년이 되시기 전까지는 스승님께서 후견인이니까…….”
“그래. 그 건방진 놈들이 감히 왕자님의 목숨을 가지고 나를 압박했다. 그분을 살리고 싶으면 파벌에 참여하라고.”
이글이글 불타는 눈.
기세를 조절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방 안의 공기는 삭막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실 생각입니까?”
“뭘 어쩌겠느냐. 감히 제 놈들이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겠느냐? 무력으로 나를 압박한다면 다른 놈에게 좋은 일이 될 터인데.”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로건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3왕자님이 위험하시겠군요.”
“……뭐라고?!”
“스승님이야 말로만 압박하지 직접 행동에 옮길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무려 그런 스승님을’ 후견인으로 두고 있는 3왕자님은 멀쩡한 왕위 계승권자입니다. 이제 곧 성년이 되시고요.”
“……선왕께서 3왕자님을 아끼신다는 소문은 시골에 있던 저도 듣긴 했습니다.”
곁에 있던 패드릭이 굳은 얼굴로 한마디 보탰다.
“스승님과 선왕 폐하의 친분. 그리고 후견인의 역할. 1, 2왕자 입장에서는 3왕자 전하가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내가 계속 요구를 거부하면…….”
“3왕자님을 없애려 할 겁니다. 어떤 식으로건 말이죠.”
로건의 말에 검공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사실 그 추리는 일견 그럴듯했지만, 치명적인 허점을 품고 있었다.
왕이 급사한 이 시점에 또 다른 왕족이 갑자기 또 죽는다?
일단 왕국 전체의 이목을 끄는 것은 확정이었다.
그러다 누가 관련된 증거라도 나온다면 어느 파벌이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으니 양 파벌이 다 몸을 사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지.’
로건은 전생에서 벌어졌었던 3왕자 암살 미수 사건을 떠올리며 안색을 굳혔다.
굳이 전생의 일을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오히려 그 사건이 일어나지조차 않게 만들어서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여야 했다.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서라도.
그것이 지금 스승을 만나 하고자 했던 본론이었고, 다행히 스승은 그의 이야기를 신중하게 받아들였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구나. 허. 이런…….”
초조한 듯 일어나 서성이기 시작하는 검공.
맥라인 부자는 그런 검공이 다시 입을 뗄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한참 후.
“루이스.”
“예.”
“3왕자님을 저택으로 모셔라. 한동안 나와 함께 계셔야겠어.”
“알겠습니다, 각하.”
“하책입니다, 스승님.”
“음?”
“아무리 왕자님을 곁에 두신다고 해도 항상 같이 있으실 수는 없으실 겁니다.”
“그때는 내 기사들이 있다. 적어도 지금 왕궁에 계신 것보다는…….”
“생각을 바꾸시면 됩니다.”
“뭐?”
“1, 2왕자 파벌이 견제하는 것은 솔직히 3왕자님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아!”
“예. 그들이 견제하는 것은 3왕자님이 아니라 스승님입니다. 스승님이 세력이 없는 3왕자님의 배경이 되어 또 다른 세력을 만들까 걱정하는 거죠.”
“허…… 그렇겠지. 그럼…….”
“파벌 간의 다툼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십시오. 애초에 후계 다툼에는 끼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범위만 확대하는 것뿐입니다.”
검공은 일생을 살아오며 한 번 꺼낸 말은 언제나 그의 목숨을 걸고 지켜 왔다.
그가 살아온 그런 인생이 그의 말에 무게를 더해 주니, 그 말 한마디면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지금 로건이 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스승님께서 파벌 다툼을 중재하려고 해서는 안 돼.’
내전은 어차피 벌어질 것이고,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빨리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말이 아니다. 만약 두 파벌의 다툼이 내전으로 번지기라도 한다면…….”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안 되겠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스승님께서 막으실 수는 없습니다. 스승님. 그냥 말 한마디로 3왕자님의 목숨을 구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즉각적인 반응은 검공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튀어나왔다.
“로건! 그럼 우리 가문은…….”
국장 이후 비프로스의 보복을 걱정하던 패드릭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로건은 단호한 어조로 그 말을 끊었다.
“저희 가문의 일은 저희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
“허허.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각하,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불쑥 일어난 패드릭이 검공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검공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세. 내가 아집에 차서 큰 그림을 못 보고 있었어. 고맙다, 로건. 그저 말 한마디로 내 의무를 지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 나라의 운명은 어차피 하늘에 맡길 일이고.”
부쩍 해쓱해 보이는 검공의 얼굴에 더욱 그늘이 졌다.
하지만 그 대답에 로건은 남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스승은 전생처럼 추한 압력에 밀려 항복하듯 중립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정했다.
그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이득이 아니라, 실질적인 이득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국장 이후 열리게 될 그랑 노블레스(Grand noblesse).
그 기간을 전생보다 훨씬 앞당기게 만들어 줄 테니까.
거기다 예상치 못한 추가 이득도 있었다.
“국장이 끝나더라도 당분간 수도에 머물거라. 내가 요르단과 직접 이야기해 보겠다. 녀석도 지금 너희에게 직접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을 것이니…….”
“감사합니다. 각하!”
비프로스가 속한 파벌인 제2왕자 세력의 수장이라도 할 수 있는 요르단 발터마임 공작에게 직접 힘을 써 보겠다는 말에, 패드릭이 반색하며 일어나 바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한 말입니다만……. 스승님, 말씀드렸듯 그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허? 로건. 자신감도 너무 과하면 좋지 않다.”
“과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요.”
검공은 자신감 넘치는 제자의 표정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결국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래도 혹여나 일이 잘못될 것 같으면 내게 찾아오거라. 네게는 언제든 문이 열려 있을 터이니.”
“하하. 무슨 부탁이라도 들어주신다는 뜻입니까?”
나름 분위기 전환을 위한 농담이었는데.
“뭐? 허, 그래. 뭐든 좋다. 또 신세를 졌으니 생각나는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 보거라. 가능한 일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마.”
다소 허망하고 초연한 표정이 된 검공은 평상시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내뱉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넙죽 받아먹기에는 너무 큰 떡이기도 했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은, 아직은 부탁드릴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고 제가 부탁을 드릴 일이 생긴다면 정말 심사숙고해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로건은 체할지도 모르는 커다란 떡을 바로 삼키는 대신, 후에 먹기 편하도록 준비해 놓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스승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때.
“각하! 초인, 초인 두 분이 저택에 방문하셨습니다!”
문밖에서 엄청난 소식이 전해졌다.
“초인?”
“위켄 칼리아 후작과 루터 카일 후작이십니다. 아무래도 두 분 사이가 사이다 보니, 빨리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소식을 전한 시종의 다급한 음성이 방 안의 무거운 엉덩이들을 바로 움직이게 했다.
* * *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덩어리.”
“내가 할 말이다, 말뼈다귀.”
“또 검공께 얻어터지고 싶어서 왔나? 그분은 굳이 파벌에 관심 없으실 텐데?”
“흥. 남 일에 신경 끄시지.”
“흐음. 그럼 역시 맥라인 때문인가.”
“하…… 역시 네놈도?”
파지지직.
3m에 가까운, 눈으로 보면서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 거구의 남자와 호리호리하다 못해 조금은 마른 듯한 남자의 시선이 부딪치자, 중간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실제로도 둘이 앉아 있는 의자 사이 공간이 일그러지듯 파열음을 내며 섬뜩한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검공가의 하인들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억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영겁 같았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이 저택의 주인이 들어왔다.
쿠웅.
“여기서 잡스럽게 살기를 뿜어내는 걸 보니 나와 한판 해보겠다는 뜻이겠지? 위켄. 루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뿜어지는 날카로운 기세가 일순간 응접실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 즉시 앉아 있던 두 사람이 튕기듯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헛!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본분을 잊고 편 가르기나 하는 주제에 그래도 눈앞에서는 깍듯하군그래. 아직도 나한테 볼 일이 남았나?”
“각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일전에 각하께서 내려 주신 교훈, 둔한 이 몸도 아직은 잊지 않았습니다.”
반(半) 거인(Half Giant)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는 오러유저, 루터 카일이 외견과는 어울리지 않는 유려한 말투로 날이 선 검공의 말을 받아넘겼다.
“그럼?”
“이번에는 각하가 아니라 이 저택의 손님으로 온 맥라인 가문을 만나고자 왔습니다. 여기 머물고 있다기에 아랫사람을 보낼 수 없어 제가 직접 찾아온 것입니다.”
“로건을?”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각하께 불쾌한 기분을 안겨 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루터 카일의 라이벌이라 불리는 폭풍검(The Storm Blade) 위켄 칼리아 역시 비슷한 뜻을 전했다.
검공의 눈빛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호오? 그렇다는구나. 제자야, 직접 얘기해 보겠느냐?”
“그럴 수 있다면 저야 영광이지요.”
검공의 뒤에서 로건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로건 맥라인입니다. 평소 흠모해 온 두 분의 모습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검공의 제자 얘기는 많이 들었네. 하지만…….”
“나 역시 재능이 뛰어난 젊은이를 만나 반갑네. 하지만…….”
“나는 맥라인 가문의 주인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나는 자네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러 왔네.”
동시에 비슷한 말을 뱉어 낸 초인들이 다시금 서로를 향해 코웃음을 치고.
로건의 등 뒤에 선 패드릭 맥라인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미소 짓던 로건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