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불사조의 깃발 아래 하나로 뭉쳐야 할 귀족들이, 관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뉘듯 두 패거리로 나뉘어 동떨어진 움직임을 보였다.
국장의 의례에 따라 영지 귀족들은 지역별로 자리를 배정받았는데, 파벌 대부분이 동서로 나뉘어 있다 보니 오히려 명확하게 파벌에 따라 갈라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리 배치가 되어 버렸다.
거기다 형식상이라도 슬픈 모습을 보여야 할 1왕자와 2왕자는 그런 귀족들의 중심에서 서로를 노려보기에 바빴다.
그나마 몇 남지 않은 선왕의 비(妃)들과 3왕자만이 우울한 표정으로 추모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마 저 모습도 슬픔보다는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에 가까울 터였다.
여러모로 소란스럽고 부산한 분위기가 죽은 고인을 추모하기는커녕 능욕하는 꼴이라, 로건은 이 분위기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개판이군.’
같은 귀족인 로건의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으니, 적어 온 연설문을 낭독하려던 대주교가 잠시 머뭇거린 것도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 어수선한 분위기는 대주교가 선왕의 업적을 낭독하기 시작할 때 절정에 달했다.
– 선왕 사무엘 폰 그란디아는 40년 전 황태자 시절부터…….
로건조차도 도대체 얼마나 긴 축문을 써 왔길래 40년 전 일부터 낭독하나 싶었으니, 가뜩이나 산만한 움직임을 보이던 귀족 중 다수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하나둘 단상에서 시선을 떼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저 서로의 수다로만 끝났으면 그냥 왕국 귀족들의 쪽팔린 행태 정도로 끝났을 것인데.
하필이면 그중에 로건을 귀찮게 하는 이도 섞여 있었다.
그것도 바로 옆자리에.
“일주일 남았다, 맥라인. 그동안 충분히 즐기라고 말해 주는 거야. 얼마 안 남은 인생 우울하게 보내면 아깝잖아.”
낮은 목소리에 섞인 웃음기.
로저 비프로스 백작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과 아버지를 도발했다.
무표정한 아버지처럼 굳이 대응해 줄 필요는 없었지만.
‘지옥 같은 축문이군.’
이제야 39년 전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마당이라, 로건도 심심풀이 삼아 이 개판에 잠시 끼어들기로 했다.
“아, 저런. 아직 얘기 못 들으셨나 봐.”
“살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그쪽 파벌에서 영입 제안을 받았는데.”
“뭐라……?”
“어쩌면 같은 편이 될지도 모르는데, 말 좀 가려서 하시지요. 백작.”
“무슨 헛소리……!”
“헛소리라 생각하시면 저기 루터 카일 후작께 가서 직접 물어보시던가.”
멀리서도 눈에 띄는 거대한 덩치의 남자를 보는 로저 비프로스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었다.
피식.
“농담입니다.”
“너 이놈……!”
“당신 하기에 따라 아닐 수도 있고요.”
“흐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붉으락푸르락 변화무쌍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꽤 재미가 좋았다.
그런데.
“각하. 후작님이 그러실 리가 있겠습니까. 파벌 내에서 각하의 비중이 있는데 말입니다.”
신경이 거슬리는 콧수염이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왔다.
맥스 페레타, 맥라인을 피해 비프로스의 아래로 들어갔던 자.
그가 마치 수십 년은 된 충복처럼 백작 앞에서 두 손을 비비고 있었다.
“그냥 개가 겁먹어서 짖는다고…….”
“그만!”
나직한 목소리가 맥스 페레타의 과한 아부를 저지했다.
로저 비프로스는 어느새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냥 욱해 주면 더 재밌었을 텐데.’
재미가 없어진 로건이 다시 단상으로 시선을 돌리자, 옆에서 슬그머니 엄지를 들어 올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 38년 전에는…….
대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축문 사이에 있었던 소소한 사건은 그렇게 끝이 났다.
* * *
– 이로써 국장 정례 1일 차의 의식이 끝났습니다.
근위 기사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땐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의식의 가장 큰 시간을 잡아먹은 것은 누가 뭐래도 대주교의 축문.
그 아득한 길이의 연설문을 읽을 동안 울고 웃고 감동한 것은 그 당사자와 귀족들의 선두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검공, 펠릭스 에스페란자뿐이었다.
그랬기에 의식이 끝나자마자 왕궁 광장의 여기저기에서는 신음 비슷한 소리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 대부분이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움직이는 와중에.
로건과 패드릭은 또다시 그리 달갑지 않은 손님들을 맞이해야 했다.
“발터마임 공작가에 의탁하고 있는 제레미 팔슨 자작입니다. 패드릭 맥라인 공, 저와 이야기를 좀…….”
“더글라스 공작가의 가신, 지노 레반슨입니다. 남작님, 잠시 대화를…….”
확실히 로건이 이전에 수도에 왔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
검공의 제자가 아닌, 맥라인을 노리는 파벌의 영입 제안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던 탓에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로저 비프로스의 안색은 점점 더 무섭게 굳어져만 갔다.
그것은 패드릭과 로건이 대부분의 제안을 사양하며 자리를 뜬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한참 후에서야 부관, 렌토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백작님. 이제 그만 돌아가셔야…….”
“공작 각하를 뵈러 가야겠다.”
“예? 아, 예. 기별하겠습니다.”
렌토르가 사라진 뒤에도 로저 비프로스의 시선은 맥라인 부자가 사라진 자리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내 것을 건드리고도 무사한 놈은 여태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무언가를 각오한 듯 섬뜩한 시선은 어두워지는 왕성 한가운데서도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 * *
“파벌을 이용할 생각이 없는 것이냐?”
양 파벌의 수많은 사절을 간신히 돌려보내고 왕궁에서 빠져나오던 중, 패드릭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걱정되십니까?”
“솔직히 이대로라면 가문이 위험하다. 어느 파벌이건 그 힘을 이용해 당장 벌어질 비프로스의 침공을 막는 것이 최우선 아니겠느냐?”
“아버지께선 어디 파벌이 좋을 것 같습니까?”
“우리와 비프로스의 관계도 그렇고, 굳이 명분을 찾자면 계승 1순위인 1왕자님이……. 으음. 너, 파벌에 들 생각이 없는 게로구나.”
로건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털어놓았다.
“예. 지금 상황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우리 가문이 그 구실로 이용될 확률이 너무 높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쉽게 설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일 뿐이다. 당장 비프로스를 막지 못한다면 한 달 후의 미래도 장담하지 못하게 돼.”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최악의 경우 스승님께 의지하는 방향도 있긴 합니다. 물론 그 전에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지만요.”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예.”
그 짧고 간결한 로건의 대답에, 패드릭은 잠시 말을 멈추고 아들을 바라보다가 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무슨 계획이더냐? 무언가 생각이 있는 거라면 이번에는 꼭 들어야겠다.”
“국장 기간이 끝나고 나면 알게 되실 겁니다.”
“……만약에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이라면 꼭 사전에 상의하거라. 반드시!”
“……예.”
아무래도 토모도 점령전이 신뢰에 금을 가게 한 것 같아 씁쓸했지만, 그거야 다시 쌓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만큼은…….
‘절대 말할 수는 없지.’
그로서도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 아버지가 안다면 무조건 반대할 것이 뻔했으니까.
* * *
“필립 클로드입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영주님.”
“아, 필립이로군. 일전에 타운에서 만난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군. 그런데 한창 바쁘다고 들었는데?”
“그게, 대공자님께서 부탁하신 것이…….”
다시 돌아온 저택, 로건의 명으로 수도에 올라온 필립이 패드릭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던 그때.
그를 발견한 로건이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필립! 왔구나!”
“안녕하십니까, 공자님. 늦었습니다.”
“아니야, 늦지 않았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자, 이쪽으로…….”
로건은 최대한 자연스레 아버지의 시선을 피해 필립을 불렀다.
“여기 부탁하신 것…… 그런데 이걸 어디다 쓰시려는 건지 여쭤봐도 됩니까?”
“아니, 안 돼.”
“…….”
필립의 허탈한 표정에, 로건이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임포릭 때랑 같은 이유야. 무슨 말인지 알지?”
“아…….”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물건. 뭐, 나중에 말해 줄 날이 있겠지.”
“판매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꼭!”
“음. 봐서.”
로건은 웃으며 손안에 들어온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팔 만한 물건은 아니지만 말이야.’
지금 시점에는 한없이 낯선, 하지만 또 다른 시점의 로건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물건이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걸 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쨌거나 준비물은 챙겼으니, 이제는 때를 기다릴 시기였다.
* * * 약속된 의례에 따라 국장의 절차는 계속되었다.
2일 차, 3일 차, 4일 차.
참석하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끔찍한 지루함을 견뎌 내기를 강요하는 의식이 며칠째 계속되는 동안 로건의, 아니 맥라인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었다.
국장의 첫날 있었던 거물급들의 행차 이후 계속되었던 파벌들의 제안.
그것은 사람만 바뀌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파벌의 사자라 지칭하는 인간들의 반응이.
“시운이 따라 저기 시골 촌구석에서 한 수 득세했다고 너무 건방져.”
“맞아. 어쩌다 시기가 맞아서 대우를 받는 주제에 뭘 그리 뻗대는 건지. 대충 말이나 맞추고 끝내자고. 어차피 줄타기나 하는 놈인데.”
서로 다른 파벌에서 온 클로퍼 자작과 피더슨 남작의 목소리가 두 개의 문을 넘어 멀리 떨어져 있는 로건의 귀에 꽂혀 들었다.
사자라고 하면서도 태도가 이상하기에 좀 지켜봤더니, 과연 속내가 따로 있었다.
‘어째 대충한다 싶더니.’
윗사람의 뜻과 실행자의 뜻이 마냥 같을 수는 없는 노릇.
얼떨결에 떠밀리듯 사절 역이 된 이들이 적극적이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 시국에 서로 다른 파벌끼리 저런 대화라니?
‘줄타기라……. 하긴, 줄타기 맞긴 하지.’
본의 아니게 박쥐 짓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공공의 적이 될 만도 했다.
조금 찜찜했지만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그냥 지나치려는데.
“역시 비프로스 백작님 말이 맞았어. 애초에…….”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가 다시금 로건의 귀를 사로잡았다.
“로저 비프로스…….”
피식.
자신은 파벌에 관심도 없는데 적이 혼자 발악을 하고 있었다.
혹여나 자기 몫의 파이를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어린아이 같은 느낌.
얼마 전까지 가장 거대하게 느껴지던 적이 스스로 작아 보이게 만드는 꼼수를 쓰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애쓴다. 애써.”
그래 봤자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 쓸데없는 수작보다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것은 따로 있었다.
“여어. 사위, 오랜만일세.”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장인어른.”
“시국이 좋지 않지만, 사돈과 같이 올라왔다는 말에 뵙기를 청했는데 어찌 혼자 온 건가? 약혼식이든, 결혼식이든 날짜를 정해야 할 것 아닌가.”
“아. 하하하. 에일렌 겨……님께 연락을 받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최근 저희 영지에 큰일이 있어서…….”
“연락은 받았네. 잘 있다고. 하지만 상황이 그러니 더욱 서둘러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두 가문의 결합을 알리는 게 비프로스를 견제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텐데?”
별로 도움 안 됩니다. 그 인간 눈 돌아갔거든요.
로건은 진심을 숨긴 채 진땀을 흘리며 로버츠 플로이드 백작을 설득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아버지와 우연히라도 만나지 않도록 무던히 애를 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에일렌을 안고 가기 위해서는 혼인을 못 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기는 아니다.
‘지금 결혼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다행히 에일렌이 말을 잘해 놓은 듯, 플로이드 백작의 독촉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비프로스의 수작 때문인지 아니면 로건의 굳건한 태도 때문인지, 그 후 국장 기간 내내 더는 파벌의 사자가 찾아오지 않았다.
국장 기간이 끝나갈수록 패드릭의 불안이 더해지던 그때.
–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그랑 노블레스(Grand noblesse)를 개최한다.
그랑 노블레스. 그란디아의 모든 귀족이 모이는 대회의가 열린 것이다.
검공이 중립을 선언하지 않았던 전생에 비해 2주는 빠른 시기.
마침내 로건이 기다리던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