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07)
107화
“모두 전력을 끌어모아라! 전면전이다!”
회의장을 나서자마자 로메인 왕자의 입에서 나온 일갈에 그 뒤를 따르던 모든 귀족의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나 하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표정이 굳어진 것은 로저 비프로스였다.
‘이런 빌어먹을!’
이런 상황을 아예 짐작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설령 투쟁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대리전이나 결투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결론은 역시나 전면전이었다.
‘아니, 현실도피 하지 말자. 결투건 뭐건 왕자들이 살아 있는 이상 어차피 승복은 안 해. 나라도 안 할 테니까. 전쟁은 어차피 정해진 거였어.’
문제라면 그것이 예상보다 더욱 급작스럽게 벌어지는 바람에 영지의 상황을 수습할 겨를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맥라인. 이 운도 좋은 새끼들…….’
하지만 여기서 2왕자에게 반발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는 그 뒤에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보는 요르단 발터마임 공작에게.
로저 비프로스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복잡한 마음을 억지로 다독이며 2왕자의 일장 연설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2왕자가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고, 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후에야 따로 요르단 발터마임 공작을 찾았다.
“할 말이 뭐지?”
“휴식을 방해해 죄송합니다, 각하. 하지만 필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본론이나 말해.”
회색 머리 거한의 말투는 냉랭했다.
하지만 그것이 특별히 유감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님을 그는 알고 있었다.
열화검이라는 이명은 그의 무력적 특징을 증명하는 별명일 뿐, 실제 성정은 한없이 차가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계산은 확실하지.’
로저 비프로스는 꿀꺽 침을 삼키며 준비한 말을 꺼냈다.
“알고 있으시겠지만, 이 일이 벌어지기 전에 저희 영지는 이미 전쟁 중이었습니다. 무도한 속가 하나가 욕심을 부려 제 성 하나를 무단 점거하는 사태가…….”
“알고 있다. 그래서?”
“……마땅히 왕자 전하의 뜻을 따라 병력을 소집해야 할 것이나, 그리하면 그 무도한 놈들을 벌할 기회가 사라지고 맙니다. 저에게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시간? 흠. 당장이라도 1왕자파와 전면전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판에 내부 정리를 하게 시간을 달라?”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로저 비프로스는 무심한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신속하게 답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열흘, 열흘만 주시면…….”
“비효율적이야.”
“……예?”
“가장 효율적인 것은 네가 말한 그 무도한 놈들, 맥라인을 우리 파벌로 끌어들이는 것이지. 자네와 그들이 소모전을 벌일 필요 없이 그 병력이 고스란히 파벌의 힘이 될 수 있게 말이야.”
“각하. 하오나…….”
“그러려고 루터까지 보냈는데, 누군가가 열심히도 약을 치더군. 굳이 못 먹을 음식이라고 사방에 광고까지 해 가며 말이야.”
“그, 그건……!”
무표정한 얼굴의 검은 눈동자가 얼어붙은 로저 비프로스의 전신을 싸늘하게 훑었다.
“자신의 몫을 적당히 챙기는 것은 좋아. 그런데 그러기 위해 파벌에 피해를 줘서야 곤란하지. 내가 로저 자네를 어찌해야 할까?”
사색이 된 로저 비프로스가 바로 무릎을 꿇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각하! 제가 사욕에 눈이 멀어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습니다!”
“자넨 눈치가 참 빨라. 그런데 가끔 욕심이 그 눈치를 가린단 말이지.”
“…….”
요르단 발터마임은 싸늘한 눈빛으로 로저 비프로스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왕의 죽음이야 모두의 예상외였지만, 그 후의 분위기를 보면 나나 후안이 왜 그 별 볼 일 없는 것들을 회유하려 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도 남았을 텐데. 그놈들이 그리도 마음에 걸렸나?”
“……면목 없습니다.”
“자넨 우리 파벌의 중요한 전력이야. 그 하찮은 것들보다 훨씬 귀하지. 하지만 하찮은 것들은 하찮은 대로 쓸데가 있어. 더구나 지금처럼 ‘적’들과 우리가 팽팽하게 느껴질 때는 말이야.”
“…….”
로저 비프로스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자칫 표정 관리라도 잘못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으니, 차라리 표정을 감추려는 것이었다.
“잠깐만 욕심을 버리게. 다행히 그놈들이 적에게 가진 않았으니, 그저 잠시만 내버려 두면 될 일이야. 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내가 직접 놈들을 예쁘게 포장해서 자네 앞에 갖다주겠네. 알겠나?”
“송구합니다.”
“그래. 알았으면 됐어. 아, 내가 가볍게 경고 정도는 남겨 두지. 놈들도 생각이란 게 있다면 더는 도발하지 못할 거야.”
“감사……합니다, 각하.”
“걱정하지 말고 어서 정예 병력을 소환하게. 그놈들보다는 더 큰 미래를 봐야 할 때니까.”
“예.”
애써 찾아간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본전조차 건지지 못하고 추한 꼴을 보였다.
하지만 로저 비프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런 시기, 한 줌의 전력이 소중한 이때가 아니었다면 이리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왜일까.
이 순간, 회의장에서 홀로 미소 짓고 있던 건방진 놈이 떠오른 것은.
미래를 위해 참아야 함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로저 비프로스는 자꾸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다.
* * *
“허어. 저게 무슨…….”
“역시 골렘 마탑은 대단하군요.”
패드릭은 놀라움에 입을 벌리기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했고, 로건은 환하게 웃으며 휘파람까지 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도까지 왕복 이동 시간 2주에 수도에서 머문 열흘의 시간을 모두 합한다 해도 토모도 성을 떠나 있던 기간은 고작 한 달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토모도 성에 도착한 로건과 패드릭 부자의 눈앞에는 이미 이전의 성벽보다 5m는 더 높고 웅장한 성벽이 사방을 감싸며 솟아 있었다.
– 영주님과 대공자님이다!
– 성문을 열어라!
드드드드.
쇠사슬이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어느새 더 깊고 견고해진 해자 위로 육중한 성문이 다리처럼 내려앉았다.
쿠웅.
“완벽……하구나.”
“예. 확실히 기대 이상이군요.”
상기된 안색으로 성안으로 들어서는 부자.
떠날 때의 초췌한 모습을 많이 벗어던진 병력들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비프로스가 다시 쳐들어와도 굳건히 지켜 낼 수 있도록 확실히 개조했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이지, 헤인켈. 수고했네.”
“저보다야 골렘 마탑의 마법사분들이 더욱 수고하셨습니다. 아. 다만 마정석을 좀 많이 쓰셨다고…….”
“아, 그 정도야 당연히 감내해야지. 다들 수고 많았어.”
“그래도 좀 놀라실 텐데…….”
헤인켈은 좋아하는 맥라인 부자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영주 부자가 떠난 이후, 클레이튼은 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애지중지하던 제자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물량의 마정석이 소모되었다.
아마 영주 부자가 예상하는 금액의 몇 배는 사뿐히 뛰어넘을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소모된 예산에 대해 듣는 순간 두 부자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토모도 성에 걸려온 하나의 마법 통신 탓에 곧바로 뒷일로 미뤄지고 말았다.
“발터마임 공작가?!”
“거기서 왜?”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곳의 가신이라는 자가 영주님을 바꾸라고…….”
두 부자는 안색을 굳힌 채 통신실로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중립을 지키겠다는 뜻은 존중하겠다. 하지만 만약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도발 행위를 이어간다면 모든 것에 우선하여 엄벌하겠다. 이것이 공작 각하의 뜻이오. 알아들으셨소, 남작?]“……물론이오. 각하의 뜻을 가슴에 새기겠소이다.”
[흠. 부디 그 태도를 쭉 유지하시길.]지지직.
마법 통신은 그대로 끝이 났다.
의례적인 인사말조차도 없는 일방적인 종료였다.
“……한낱 대리인도 참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쯧.”
“발터마임 공작가니까요. 뭐, 어쨌건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걱정은 덜었네요. 굳이 스승님께 기대지 않아도 되고요.”
“저자의 말대로라면 비프로스는 우리를 공격하기보다는 병력을 모아 수도로 향하겠지. 덕분에 한숨 돌릴 틈은 얻었다만, 이 시국이 걱정이구나.”
“이미 이렇게 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당장 우리는 다른 걱정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됩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패드릭은 그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아들이 생각하는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그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 * 그랑 노블레스에서의 살인 사건, 서기관 래리 클레트의 죽음으로 일어난 내전은 불과 1주일 뒤부터 직접적인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그 시작은 수도인 그랑을 중심으로 한 국왕 직할령의 북쪽, 트리탄 백작령에서부터였다.
2왕자 파벌에 속한 트리탄 백작령은 남쪽으로는 국왕 직할령을, 동쪽으로는 1왕자파인 자히드 백작령과 영지의 경계를 맞대고 있었는데, 2왕자의 소집령에 응하여 군대를 내려보내던 중, 비슷한 목적으로 국왕 직할령 동쪽으로 향하던 자히드 군과 떡하니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그곳에서 시작된 두 백작 간의 예기치 못한 전투가, 본래 중앙에서 전쟁을 계획하던 수뇌부들의 모든 작전을 뒤흔들어 버렸다.
나라의 후계, 왕위를 목적으로 한 내전인 이상 이 전쟁의 주요 목적은 영토의 점령이 아닌 왕자나 두 공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랬기에 그 핵심 인물들을 타격하는 전쟁과 전술을 기획하고 있던 이들은 엉뚱한 곳에서 벌어진 전쟁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하필 충돌한 이들이 변경백들이라 양 파벌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기에 원군을 파병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결국 중앙 전선에서의 단기 대격돌이나 주요 인물 암살전 등을 생각하고 있던 이들의 예상은 모조리 빗나가고, 북쪽 전선에서부터 국왕 직할령까지 동서를 가르는 긴 전선이 생겨 버렸다.
게다가 중앙에 모이지 않은 휘하 귀족들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병력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장기화되기 시작하는 조짐이었다.
나라를 걱정하는 양식 있는 지자들이 탄식을 내뱉게 만드는 최악의 내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자, 각 파벌의 수뇌부들은 각 소속 영지의 마지막 여력까지 쥐어짜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비프로스 역시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겨 둔 채, 병력의 대부분을 이끌고 중앙 전선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각하. 그래도 본성에서 병력을 너무 많이 빼 온 것은 아닐까요.”
“렌토르를 남겼으니 충분해. 상급기사니까 치안 유지 정도야 충분히 할 테지.”
“그게 아니라 혹시나 맥라인 놈들이…….”
“……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요르단 공작님의 경고를 무시할 리가 없다.”
“그래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자면 렌토르 경은 무력과 비교해 전술이 좀…….”
“괜찮아. 요르단 님, 그 차가운 분에게 열화검이라는 이명이 붙은 이유는 왕국 대다수가 알고 있다. 놈들이 자살하려는 게 아닌 이상 그분의 말을 거역할 리가 없어. 미치지 않고서야…….”
로저 비프로스는 ‘미치지 않고서야’라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반복해 중얼거렸다.
자신 역시 그 성정이 무서워 무리하여 병력 대부분을 동원한 것이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래야 했다.
하지만 말을 하면서도 로저 비프로스의 가슴속에 왠지 모를 서늘한 불길함이 머물렀다.
최근 그놈의 맥라인과 엮여서 예상대로 된 일이 있었던가.
그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말끝이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듯 또다시 같은 말을 되뇌었다.
‘설마……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 * *
“이 기회에 비프로스를 점령해야 한다!”
로건은 가신들을 끌어모은 자리에서 다시 전쟁을 선언했다.
자연히 가신들이 발칵 뒤집혔다.
“발터마임 공작가에서 경고를 받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공작의, 초인의 경고를 무시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공자님?”
“그래.”
너무나 짧고 단호한 대답에 드웨인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굳었다.
“어차피 비프로스는 응전 못 해. 이 상황에 중앙 전선에서 비프로스 정도의 전력을 바로 빼낼 수는 없을 테니까.”
“경고도 경고인데, 2왕자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다른 중립 세력에 대한 경고를 위해 다소 손해를 감수할 수도……!”
“아니지. 우리는 이 내전 전에 이미 전쟁을 시작했잖아. 가문끼리의 원한일 뿐인데 2왕자에 대한 도전은 너무 확대 해석이지. 2왕자든 요르단 공작이건 억지로 확대 해석해서 손해를 감수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을 거야.”
“설마 그걸 예상해서 토모도를……은 아니겠군요. 미래를 아는 것도 아니고. 허. 허허. 이를 어찌…….”
자신도 모르게 정확한 추론을 해낸 헤인켈을 보며 로건이 미소를 지었지만, 주변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가신들이 좀 말려 달라는 의미로 패드릭을 바라보자, 가신 회의 전부터 넋이 나간 것처럼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패드릭이 그제야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 만약 네 말이 다 맞는다고 해도, 요르단 발터마임 공작은 나중에라도 반드시 책임을 물을 사람이다. 그 가능성은 생각해 보았느냐?”
“아니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뭐라? 저번의 실수를 벌써 잊었느냐! 이제는 제발 모든 것을 고려해서……!”
“요르단 발터마임 공작이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일은 없을 테니까요.”
너무나 단호한 확신에 좌중의 모두가 할 말을 잃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맥라인의 군대가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