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그게 무슨 개소리야!”
쾅!
중앙 전선 한쪽에 세워진 비프로스 막사 안이 발칵 뒤집혔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로저 비프로스의 고함에도 부하들은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페레타 놈들은 뭐 하고?!”
“그게, 페레타의 군대가 출발하기도 전에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답니다.”
“끄으으. 렌토르, 그 멍청한 놈이!”
전사한 부하에게 쌍욕을 퍼붓는 것.
그것도 다른 부하들 앞에서 그렇게 무너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평소 그의 스타일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그만큼 그의 충격이 크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가모님들과 공자님들은 무사히 탈출하셨다고 합니다. 지금 이리로 오고 계시는데…….”
“지금 그게 중요해? 내 성이! 내 땅이 맥라인 놈들한테 넘어갔는데?!”
로저 비프로스는 계속되는 폭언에 변해 가는 부하들의 표정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연신 소리를 질렀다.
“당장 돌아간다! 그놈들을 잡아 죽이고 사지를 찢어 죽여 버릴 테다. 감히 누구 땅을 건드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 꾹꾹 눌러 담았던 분노가 여과 없이 계속 터져 나왔다.
“회군을 준비하라! 영지의 일이 먼저다! 내 땅을 되찾아야겠다. 공작 각하께는 내가 직접 말하겠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요르단 발터마임 공작도 더는 자신을 만류할 명분이 없을 것이다.
아니, 자신이 해 놓은 말이 있으니 오히려 도와줄 것이다.
로저 비프로스는 그렇게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기대와 달랐다.
“불가.”
회색 머리 거한의 말은 얼마 전과 똑같았다.
로저 비프로스는 얼굴을 참혹하게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제 땅이! 제 근거지가 무도한 놈들한테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안된다는 겁니까!”
“지금 중앙전선에 배치된 세력은 양자가 비등하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비프로스의 병력을 빼겠다고? 자네는 자네의 땅이 대업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건가?”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제 영지가 멀쩡해야 저와 저의 군대 역시 차질 없이 대업에 합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놈들은 각하의 경고를 무시한 미친놈들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시면…….”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예?”
순간적으로 기대가 생겼지만, 이어지는 답변은 로저 비프로스의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놈들은 대업이 끝난 후 내가 직접 찢어 죽이겠다.”
“각하……!”
원망 어린 로저 비프로스의 시선에 요르단이 차가운 웃음으로 답했다.
“하지만 그전에 일단 놈들에게 통고하여 우리 파벌에 들이겠다.”
“예? 그게 무슨……?”
“그리고 이 전선으로 끌어들여 화살받이로 써 주지. 그러면 되겠지? 내 경고를 무시한 미친놈들에게 거부권은 없을 것이다.”
“아…….”
거부권은 로저 비프로스에게도 없었다.
하지만 미친놈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존재했다.
[그리 겁박하시면 저희는 1왕자님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정할 수밖에 없습니다.]맥라인의 영주 대행이라는 놈이 웃으며 그리 답했다.
영주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그 자식놈이 나서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모습.
간이 어디까지 부은 것인지 짐작도 안 되는 여유로운 표정.
부하 앞에서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한 요르단 발터마임의 얼굴이 티 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내 경고를 무시하고, 이어진 권유까지 거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겠지? 이게 차후 이 나라의 왕위를 이으실 로메인 전하의 뜻을 거부하는 짓이라는 것도?”
어조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의 주변에서는 활화산 같은 기세가 터져 나오며 주변을 압박하고 있었다.
로저 비프로스를 비롯한 그의 가신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주춤주춤 물러났지만, 그 기세가 통신구 너머까지 전달될 리는 없었다.
[제가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각하. 비프로스와 저희의 악연은 이미 오랜 예전부터 시작된 일이옵니다. 결코 각하나 로메인 전하를 무시하기 때문에 벌인 일이 아닙니다.]“그렇다면 그것을 증명하라. 군을 끌고 전선에 참가해 공을 세워라. 그리하면 내 분노와 왕자님의 분노는 너희를 피해 갈 것이다.”
[유감이지만 그리할 수는 없습니다.]쾅!
[음? 이상한 소음이 들리는군요. 연결 상태가 안 좋은가…….]요르단의 발밑에서 터져 나온 폭음에 주변이 더욱 숨을 죽였지만, 통신구 너머의 붉은 머리는 그저 능청을 떨고 있었다.
“……명을 재촉하는군.”
선명해지는 살기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던 로저 비프로스가 슬쩍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상대 쪽에서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저는 스승님의 뜻에 따라 중립을 선택할 생각입니다. 왕실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없으니, 가문의 옛 원한으로 인해 벌어진 일로 제 마음을 의심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건방진 놈! 그게 말이라고……!”
“각하! 1왕자파 놈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막사의 문을 열어젖히고 전선의 소식을 전해 온 기사는 순간적으로 집중된 살기에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바쁘신 모양인데, 일 보십시오.]통신구에서 들려오는 로건의 여유로운 음성이 요르단의 살기를 더욱 키웠다.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네놈들의 명을 끊어야겠어. 그게 더 사기에 좋을 것 같군.”
[과연 그게 감당하실 수 있는 손해일까요? 전선이 아주 팽팽하다고 들었습니다. 사소한 분노를 참지 못할 분이 아니라고 믿습니다.]“흐……. 천둥벌거숭이 놈. 네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곧 깨닫게 될 것이다. 후회해도 늦었다는 것도.”
[글쎄요. 후회는…….]지지직.
굳은 표정으로 통신을 끊어 버린 요르단 발터마임이 주변을 향해 이를 갈며 소리를 질렀다.
“뭐하나! 출군 준비해! 먼저 1왕자파 놈들을 박살 낸다!”
“예!”
막사의 귀족들이 전부 황급히 흩어진 이후.
공작은 차가운 목소리로 부관에게 손짓했다.
“조용히 ……를 불러. 사람 몇을 더 붙여 줄 테니 아까 그 시건방진 놈을…….”
좀 전의 출전 명령을 내릴 때보다 더욱 진한 살기가 담긴 명령에 부관은 굳은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후아아. 끝났다.”
“그런데 공자님. 정말 이래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공작이고 초인인데…….”
안도하는 로건에게 드웨인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로건은 태연한 얼굴로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어차피 지금은 우릴 못 건드려. 기껏해야 뒤로 수작질이나 벌이겠지. 그야 방비만 잘하면 될 일이고.”
“그게 그렇게 태평하게 할 말입니까?!”
“아니면? 뭐 어떻게 하려고? 정말 저들 말대로 중앙 전선으로 올라가 화살받이라도 해?”
드웨인은 답답한 마음에 울상이 될 지경이었다.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좋게 돌려 말할 수도…….”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일이야. 저쪽 요구 조건을 들어줄 것도 아니고. 약세를 보여 봤자 물어뜯기만 할 맹수한테는 오히려 당당한 게 나아.”
“하아.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급기야 신까지 찾아 대는 드웨인을 보며 로건은 피식 웃었다.
“왜? 불안해?”
“아무한테나 물어보십쇼! 태평한 공자님이 이상한 겁니다!”
“뭐, 불안하면 한동안 관저에는 들어오지 마. 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공자님!!”
드웨인이 기겁하여 펄쩍 뛰며 소리쳤다.
“농담이야, 농담! 무슨 말을 못 하겠네. 그나저나 1왕자파에서는 연락 안 오나?”
“예?”
“2왕자 쪽이야 이렇게 넘겼으니 됐고. 다른 쪽도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먼저 연락해야 하나?”
“예에? 왜요?!”
“왜긴, 그쪽이야 지금 우리 때문에 신이 났을 테니…….”
지이이잉.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통신구가 다시금 빛을 발하며 십자로 교차하는 검의 문양을 나타냈다.
1왕자파의 실세. 더글라스 공작가의 문양이었다.
[비프로스의 점령이라! 푸하하하! 오래간만에 멋진 소식을 전해 줘서 고맙네. 그래, 거기다 아직 어린 자네가 가문의 뜻을 대변한다고. 뭐, 신선하고 좋지. 그런데 비프로스를 쳤다면, 우리 파벌에 들어올 생각인 거겠지?]후안 더글라스 공작 역시 직접 얼굴을 드러내며 통신을 걸어 왔다.
민감한 시기인 지금, 맥라인이 벌인 비프로스 정벌이 얼마나 파급력이 큰 사건이었는지 실감이 되는 일이었다.
“이리 직접 연락을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각하.”
로건은 이 또 하나의 강자를 맞이하여 또다시 연신 허리를 굽히기 바빴다.
하지만.
“저희 가문의 오래된 원한 때문일 뿐, 죄송하지만 아직은 어느 왕자님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말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또렷하고 단호하게 나왔다.
‘조금만 더 고생하자. 내 허리.’
실없는 생각을 주워 삼키며 최대한 웃는 낯으로 왕국 유일의 마도사를 바라보는데.
[요르단이 가만히 있을 리 없을 텐데 어찌할 생각인가? 내가 아는 그의 독한 성정이라면 자네 가문을 통째로 집어삼키려고 할 텐데…….]통신구 너머의 푸른 눈동자가 로건을 직시했다.
분명히 웃는 표정이건만, 눈만큼은 웃지 않고 있는 듯한 묘한 느낌.
아무런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담담한 눈동자가 로건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싹싹 빌고 넘어갔지요.”
[고작?]“그쪽은 여력이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보기엔 더글라스 공작님 쪽이 유리한 듯한데요.”
[호오. 확실히 안목이 있어. 그런데 빈말은 아니겠지? 설마 비프로스 정벌을 무마하기 위해 2왕자파에 합류한다던가…….]말끝을 흐리며 로건을 쳐다보는 더글라스 공작의 눈빛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 가문은 여력이 없어서 확실한 중립을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심적으로나마 각하를 응원하겠습니다. 남아 있는 비프로스 병력을 확실하게 밟아 주시기를요.”
[허허,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군. 뭐, 거짓은 아닌 거 같지만……. 혹시나 몰라 충고하네만, 나를 기만하는 것이면 멍청한 요르단 놈처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거야.]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협박이었다.
이게 다 맥라인이 힘이 없기 때문이리라.
로건은 속으로 이를 갈며 겉으로는 웃어 보였다.
“물론입니다.”
이제 막 시작된 내전.
그 분란의 소용돌이에서 맥라인 가문의 중립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다소 위험한 분란의 요소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 * * 맥라인의 비프로스 점령.
그 갑작스러운 사건은 왕국의 귀족들을 모두 놀라게 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을 꼽자면 아무래도 맥스 페레타라고 할 수 있었다.
맥라인과 비프로스 영지의 사이에 자리하여, 분쟁 끝에 비프로스의 휘하가 되기를 택했던 자.
그리고 비프로스에 지원군을 보내라는 말을 들었지만 출진하기도 전에 전투가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던 자.
여러모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의 맥스 페레타는 이 무리한 정벌 이후 맥라인이 처절한 보복을 당할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비프로스 백작이 직접 내려와 박살 내거나, 아니면 파벌 차원에서 가혹한 응징을 할 것이다.”
그로서는 상식적이고 당연한 추론이었다.
그런데.
[정벌은 없다. 맥라인의 중립을 허가한다.]위에서 내려온 단 한 줄의 명령에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놈들이 자폭한 거라며!”
“……맥라인에서 무슨 수를 쓴 것이 틀림없습니다. 로저 비프로스가 이 상황을 참을 리가 없습니다! 비프로스 군의 정예는 분명 멀쩡할 텐데…… 왜……?”
그의 옆에서 타박을 들은 리할트는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본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나, 난 백작의 말을 따르려고 했어! 비프로스도 도우려고 했고, 중앙 전선에 기사단도 파병하려고 했어. 좀 늦어진 것뿐이지. 백작이 우릴 도와야 하는 거 아냐?! 리할트! 이 상황에 놈들이 우리를 노린다면 어떻게……!”
“……중립이라면 저희를 건드리지는 못할 겁니다, 주군. 진정하시지요.”
이렇게까지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리할트는 발을 구르는 자신의 주군을 보며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치 못한 맥라인의 돌발 행동으로 상황이 묘해졌다는 건 이해했다.
비프로스와 맥라인 사이에, 아니 지금으로서는 맥라인의 영지 가운데 끼어 버린 상황.
지금의 특수한 시국이 아니라면 맥라인에게 잡아먹히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페레타는 이제 완연한 비프로스의 파벌, 즉 2왕자파다.
‘공개적으로 중립 선언을 했다면 우리를 먼저 못 건드려. 괜찮아.’
그러니 주군이 저리 유난을 떠는 것이 한심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리할트는 불과 다음날 날아온 맥라인의 통고를 보며 진짜 바보는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강제로 깨닫게 되었다.
[그간의 마찰과 불미스러운 사건을 잊고, 양 가문에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자 하니……(하략)…….]기나긴 미사여구가 들어간 문장을 간단히 해석하자면.
지금 상황이 이렇게 돼서 직접 공격은 못 하겠는데, 나중에 누가 왕이 되건 이 지역의 로드는 우리다.
그러니…….
그때 뒈지기 싫으면 지금부터 꿇어.
라는 뜻이었다.
“……우리가 맥라인을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외부의 조력이 없다면 어렵습니다.”
리할트의 단정적인 말에 맥스 페레타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조건이 뭐였지?”
“우선 매달 10만 골드 시세의 식량과 물자 상납…….”
1년이면 120만. 페레타 영지 예산에 비하자면 1/10도 안 되는 소액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너무나도 관대한 조건이었지만, 문제는 다른 조항에 있었다.
“……7할의 소작세를 3할로 내리고 매달 내부 감찰을 허용하라는 조건도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필요할 때 병력 차출권도…… 있습니다.”
사실상 재정과 군사권까지 전부 관여하겠다는 협박이었다.
“거부한다면?”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이런 내전은 길어야 6개월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맥라인은 망설이지 않을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당신과 가족들은 확실히 죽습니다.
……라는 뜻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어 눈빛으로만 전했다.
이미 기세가 꺾인 영주는 순식간에 10년은 더 늙은 것 같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조건을 받아들이겠다. 다시 신하의 가문으로 들어가겠다고.”
그렇게 페레타는 2백 년 만에 다시 맥라인의 봉신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