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13)
113화
“벡터가 잘 가르치고 있나 보군.”
“그 양반 분명히 예전 일을 잊지 않고 앙심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하다니까요. 사람을 말려 죽이지 못해서 환장한 사람처럼 괴롭히는데, 더구나 라일라까지 괜히 참견해서…….”
기특한 마음에 웃으며 말한 것뿐인데, 그것이 무슨 방아쇠라도 된 듯 쉴 새 없는 원망과 수다가 터져 나왔다.
분명 녀석도 녀석 나름대로 상당히 고생하고 있었다.
로건은 피식 웃으며 녀석의 수다를 끊었다.
“편지를 전해 줄 테니, 심부름이나 다녀와라. 그리고 벡터에게는 내가 말해 놓을 테니, 며칠 쉬어.”
“예?”
“왜? 싫어?”
“아, 아뇨. 싫은 건 아닌데…….”
“아닌데?”
“하하. 그게, 제가 이제 편지 심부름이나 할 짬밥은 아니……. 악! 노, 농담! 합니다, 해!”
어처구니가 없어 볼을 쭉 잡아당기니 이제야 원래의 놈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중요한 편지들이니 하나도 빼먹지 말고 전부 전달해. 비프로스 성에 녹스의 지부가 있을 거다. 거기에 가려면…….”
볼때기를 잡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녀석을 보며 로건은 녹스와 접촉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가서 지금 망한 가문에 살아남은 기사들을 맥라인에서 스카우트한다고 전해. 조건은 이대로 전하고, 생각이 있다면 이리로 와서 접촉해 달라고. 물론 은밀히 해야겠지?”
“알았다고요. 적고 있어요! 똑바로 전합니다!”
“아, 그리고 이 편지들은 따로 보내고.”
그리고 동시에 수십 통의 편지를 녀석에게 맡겼다.
“이, 이게 다 뭡니까요?”
“편지라니까.”
“이런 건 또 언제 쓰셨어요? 누구한테 보내려고? 설마 에일렌 님을 두고 바람…….”
뻐어억.
“컥!”
“헛소리하지 마, 인마!”
“그, 그래도. 이건 좀 인간적으로 아니…….”
“받는 사람 죄다 남자다. 헛생각하지 말고 보내.”
“그건 그거대로 위험한…… 으아아, 진짜 농담! 농담이라구요!”
호들갑을 떨며 멀어지는 릭을 보며 로건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들이 받아들일까? 뭐…… 몇 사람이라도 건지면 좋지. 아니면 어쩔 수 없고.’
편지의 수신인들은 최근 하나둘 망하기 시작한 중소 영지의 후손, 혹은 기사 수련생, 즉 병사들이었다.
그냥 내버려 둔다면 떠돌며 용병이나 될 사람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기사도 되지 못한 귀족이나 병사들일 뿐인 이들, 즉 적극적인 영입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로건은 그들이 필요했다.
그들 중 대다수가 결국엔 포스유저가 될 것을 알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정작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이들 중 몇몇은 그가 ‘기억’하는 수십 년 후까지도 포스를 각성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란디아 해방 전선. 결국,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
사적인 복수심과 원한으로 활동했던 로건이 친해지기 어려워했던 진짜 독립군들.
본인의 목숨을 바쳐 나라를 해방시키려 했던 진정한 우국지사들.
다시 말해 미래의 제국 전쟁 때, 확고하게 믿을 수 있는 아군이라는 뜻이었다.
‘어디 가문 출신인지, 이 시기에 어디에 있었는지 전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이 정도만 해도 어디야.’
경험은 사람을 바꾼다.
그렇기에 세월은 선인을 악인으로, 악인을 선인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점의 그들은 로건이 아는 그 고결한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최악을 가정하더라도.
‘적어도 미래의 기사가 될 게 확실한 인재가 삼사십 명은 생긴다.’
그에 반해 들이는 수고는 며칠 밤을 새워 기억을 짜내고 편지를 쓰는 것뿐.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 며칠의 수고가 가져온 후유증은 분명히 있었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둡고 우울한 기억들.
로건은 아련한 표정으로 가깝고도 멀게만 느껴지던, 전생의 고결한 동료들을 회상했다.
* * * 데미안 나달은 동남부 지방의 소귀족, 나달 남작가의 차남이었다.
본인 자체도 그렇지만 가문 역시 그 이름을 들어도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변변치 못한 집안.
그렇기에 귀족으로서의 자부심도 그다지 없었다.
아니, 요즘 같아서는 오히려 핏줄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아니, 고조모 할머니가 칼리아 후작가 차녀였다는 이유로 파벌싸움에 끼어드는 게 말이나 돼? 그러니까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지.’
데미안은 그렇게 한탄하며 또 한잔의 맥주를 들이켰다.
아마도 내전 시작 이후 가장 먼저 망했을 것이 확실한 가문.
망하기 직전에 들고나온 재산도 얼마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화병이 나서 쓰러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것은 허망하게 세상을 하직한 가족들을 위한 그만의 위령제이기도 했다.
‘시체조차 챙기지 못하고 도망쳐서 술이나 퍼마시는 주제에 위령제는 무슨…….’
스스로 생각한 핑계가 너무도 우스워, 데미안은 또 한 잔의 술을 시켰다.
얼마 없는 돈이 모두 떨어지든지, 아니면 그 전에 제 형편없는 삶이 끝나기라도 하길 바라며.
‘안 죽고 살아나면 자랑이나 할까? 삼 일 밤낮을 퍼마셨는데, 이 질긴 목숨은 끊어지지도 않는다고.’
데미안은 미래에 추하게 늙어 버린 자신이 비슷한 처지의 궁상맞은 늙은이들 사이에서 허세를 부리는 상상을 하며 킬킬 웃었다.
그러다 귓전을 파고드는 낯선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데미안 나달 씨?”
우당탕탕.
“뭐, 뭐야? 푸하. 뭐, 뭐야 당신?!”
꼴사납게 뒤로 구른 데미안은 황급히 칼을 빼내 들었다.
허리춤에 매인 검을 못 찾아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한 것은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저 추적자가 쫓아왔다는 생각에 다급히 초점을 찾아보지만, 술을 너무 마셨는지 눈앞의 사람도 흔들려 보이기만 했다.
정신이 들기 위해 짝 소리가 나게 뺨을 때리니, 알싸하게 느껴지는 피 맛과 함께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러자 눈앞에 평범한 인상의 중년인이 자신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데미안 나달 씨 맞습니까?”
“추, 추적……은 아니겠지. 나 따위가 뭐라고…….”
뜬금없이 소리를 지르다가 갑자기 자학을 하는, 만취한 자의 전형적인 모습.
“뭐야 당신. 날 어떻게 알아?”
중년인은 그나마 용케도 혀는 안 꼬였다고 생각하며 품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정보 길드에서 나왔습니다. 우리 고객님께서 당신에게 전하라는 편지가 있어서.”
“……뭐?”
누가 나한테 편지를?
아니, 그 전에 내가 여기 있을 줄은 어찌 알고?
나도 일주일 전에는 내가 여기 있게 될 줄 몰랐는데.
온갖 잡념이 가뜩이나 취한 정신을 더 어지럽혔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런 그를 배려해 주지 않았다.
“그럼, 여기 편지 전달했습니다. 수결은…… 끙차. 받았고. 전 그럼 이만.”
휘청거리는 자신의 손을 끌어 아무렇게나 도장을 찍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중년인.
데미안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안에 남겨진 편지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무언가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쯧쯧. 젊은 사람이. 편지 한 장에 아주 생난리를 치는구만. 그냥 펴 봐! 혹시 알아? 도망친 애인이 찾아온 건지.”
낄낄대며 웃는 옆자리의 중년 술꾼이 데미안에게 시시한 농을 건넸다.
‘씨…… 그래. 보면 알겠지.’
만약에 누군가가 장난을 친 거라면, 인생 막장에 몰린 주정뱅이가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확실히 보여 주겠다.
그리 생각하며 데미안은 편지를 열었다.
그리고 편지를 읽어 내릴수록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만 갔다.
데미안 나달 님께.
저는 맥라인 가문의 장남, 로건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그랑의 아카데미에서 남긴 ‘술에 취한 달의 시’를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훌륭한 인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근 불행한 일을 겪으셨다기에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이 힘든 시국에도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저희 가문에는 데미안 님 같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혹시나 새롭게 정착할 곳을 찾으신다면, 맥라인을 한 번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로건 맥라인 배상.
“이게 무슨 개소리야…….”
아카데미에서 술에 취한 김에 남긴 시 하나.
한때나마 사교계에 회자가 된 적이 있는 그 부끄러운 시의 저자가 자신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시는 그저 귀족의 취미일 뿐.
훌륭한 시인을 훌륭한 인재라 표현하는 귀족은 없다.
별 볼 일 없는 귀족 가문의 차남이 시를 잘 쓴다고 영입 제안이라니.
기분도 더러운데, 아주 질 나쁜 농담을 들은 기분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지. 내가 지금 그걸 가릴 처지가 아니잖아.”
사기라고 한들, 어차피 자신에게 남은 것은 이 멀쩡한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었다.
이 편지의 주인이 사기꾼이라고 해도 자신이 손해 볼 것은 없다.
“……가 볼까?”
그 자신은 알지 못하는 미래.
그란디아 해방 전선이 쓰는 암호 체계를 만들고 기록하여, 각지의 정보인 관리를 맡았던 독립군의 핵심 간부, 데미안 나달은 바로 다음 날 맥라인 영지로 향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기.
내전의 영향을 직격으로 받은 작은 가문 출신의 후계와 병사들 수십 명에게 같은 발신인의 이름으로 편지들이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는 한 영지의 주인이 자신의 개인사를 기억하며 ‘유능한 인재’라고 평하는 것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 * * 내전이 시작되고 두 달 뒤.
맥라인 가문에서는 신입 병사들과 자경단의 훈련이 한창이던 그때.
맥라인 타운을 찾는 이들이 속속 생겨났다.
크고 넓은 영지.
아직은 사람이 더 필요한 영지이기에 전쟁 난민을 끌어들이려 일부러 소문을 퍼트리고 있기도 했으나.
최근에 찾아드는 수십 명의 사람들은 단순한 유민이라고 보기에는 행색이 남달랐다.
“주인 잃은 기사를 찾으신다고 해서 왔소.”
누가 봐도 제대로 장비를 갖춘 기사들도 있었지만.
고급 의복이긴 하지만 여기저기 닳고 더럽혀진, 그야말로 망한 귀족의 한량 같은 이들도 꽤 많은 수가 타운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하나같이 대공자의 편지라는 걸 가지고 타운을 찾았다.
‘기사들은 몰라도. 이것들은 뭐야.’
가문의 인장을 확인한 기사나 병사들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지만, 바로 로건에게 안내해 줄 수밖에 없었다.
“데미안…… 나달?”
“예. 접니다. 혹시…….”
“반갑군. 로건 맥라인일세. 앉아.”
자신보다 몇 살 어려 보이는 사람이지만 무려 영주 대행이었다.
반말을 어색해하기에는 자신의 초라한 차림새와 고픈 배가 너무 좋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그는 정말로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워하기까지 했다.
‘내가 이 사람을 본 적이 있던가?’
속으로 잠시 그런 생각을 해 보았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붉은 머리에 붉은 눈, 이렇게 특이한 생김새를 봤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자신을 알고 있었다.
‘뭐, 시를 봤다니까.’
억지로 이유를 갖다 대며 핑계를 찾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래. 내 제안을 수락했으니 찾아온 거겠지?”
“그렇……습니다만, 제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재주라고는 시나 몇 수 끄적일 뿐인데. 혹시 다른 이와 착각을 하신 것은 아닐지요?”
“그럴 리가 있겠는가. 시에 재능이 있다 함은 일의 맥락을 잘 이해하고 함축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일세. 관리나 행정에도 큰 도움이 되지.”
‘내가 하는 말인데도 정말 개소리 같군.’
‘뭔 개소리야.’
말하는 이, 듣는 이의 생각이 이 순간 일치했다는 것은 당사자들도 몰랐다.
물론 로건은 어떻게든 이 초라한 인상의 젊은이를 영지에 영입하고 싶었기에 내뱉은 헛소리였다.
‘데미안 나달. 암호 체계의 귀재. 그리고 정보 관리의 천재.’
그란디아 해방 전선이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항쟁할 수 있었던 것은 조직원들의 신분을 철저히 보호해 준 그의 공이 가장 컸다고 봐야 했다.
그 재능을 이 멀쩡한(?) 시기에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행정관리에서도 한 사람 이상의 몫은 할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데미안 나달은 이미 내전에서 가족 모두를 잃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애국심 하나로 가능성 없는 암담한 투쟁을 수십 년간 해 온 자다. 마음을 얻는다면 무조건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
능력의 여부를 떠나 이런 사람 하나하나가 큰 힘이 되었다.
그러니 로건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흠. 자네도 아카데미 행정학과 출신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믿을 만하지. 자리를 주겠네. 물론 시작은 우리 주무행정관의 보조로 하겠지만, 능력을 발휘한다면 성 단위를 맡길 수도 있지. 월봉은…… 음. 300골드부터 시작할까?”
“……제 뭘 보고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겁니까?”
“싫은가?”
“아, 아니. 그럴 리가요!”
“그럼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 무슨 고민을 그리하지?”
“제, 제가 첩자면 내부에 적을…… 아, 내가 무슨 헛소리를. 죄송합니다. 절대 제가 첩자라는 뜻은 아니고…….”
“푸하하. 그래, 알고 있네. 좋아, 그럼 방을 하나 마련해 줄 테니 내일부터 일하게. 아, 일단 자네 상관이 될 사람하고 안면부터 터야겠지? 따라오게.”
“아. 예, 예.”
전광석화 같은 채용과 업무 결정이었다.
‘이, 이래도 돼?’
데미안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젊은 영주의 뒤를 따랐다.
물론 로건은 그것과는 별개로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냉혈한도 어렸을 때는 저런 모습이 있었군. 재밌네. 재밌어.’
최근 방문한 이들 중에는 미래에 포스유저가 되는 이들도 스물다섯이나 끼어 있었지만, 그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이 데미안 하나를 얻은 것이 왠지 더 뿌듯했다.
‘여차하면 정보 길드 하나를 확보해서 관리를 맡겨도 될 테고.’
언제까지 녹스나 다른 정보 길드를 돈 주고 이용할 수는 없다.
지금처럼 ‘작은’ 가문일 때면 몰라도 미래에는…….
그리고 그때가 되면.
‘행정관 데미안 나달이 아닌 정보관리자 데미안 나달이 되겠지. 그동안은 적성에 안 맞아도 고생 좀 하라고.’
로건은 그렇게 생각하며 데미안을 드웨인에게 소개해 줬다.
그리고.
“푸하하하. 최고입니다, 영주님. 필립이랑 그 데미안 녀석 둘이서 다른 이들 열 명 이상 몫을 해내요. 어디서 이런 놈들을 주워 오셨습니까? 이런 애들로 딱 셋만 더 부탁드립니다. 그럼 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데미안이 맥라인 최고 가신의 극찬을 이끌어 내는 데는 고작 일주일이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