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25)
125화- 출진하라!
뿌우우우우!
쿵.
비프로스의 성벽 위로 울려 퍼진 나팔 소리와 함께 해자 위로 육중한 철목으로 만들어진 성문이 내려지자, 그 위로 기사단이 제일 먼저 말을 타고 지나갔다.
150명의 기사는 모두 흉부에 불꽃 문양이 새겨진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다.
하나같이 잘 제련된 강철로 만들어진 갑옷은 햇빛을 받아 화려하게 반짝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쪽, 유일하게 조금 튀는 모양의 갑옷을 입은 한 사람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 기사단에 왔을 때와는 달리 자신의 몸에 맞는 맞춤형 갑옷을 입 여기사 에일렌.
다른 기사들에 비해 작은 체구와 신체 조건에 맞게 제작된 갑옷은 그 빛깔 역시도 은은한 은빛을 띠고 있었다.
“괜히 눈에 띄어서 죽기 좋다는 둥 악담은 하지 말아요. 이미 넘치도록 들었으니까.”
그녀가 로건의 시선을 느꼈는지 퉁명스레 말했다.
“나름 동료를 걱정하는 걸 겁니다. 이제 에일렌 ‘경’을 인정하지 않는 기사는 적어도 우리 영지 내에는 없으니까.”
별명이 좀 이상하긴 해도 말이지.
뒷말을 삼킨 덕분인지, 에일렌의 표정이 조금은 상기된 것 같았다.
“그렇……겠죠?”
분명히 좀 삐져 있었던 것 같은데, 금세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보니 괜한 웃음이 나왔다.
‘하긴 이제 열아홉 살이지.’
기회를 준 건 로건 자신이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잘 적응하고 녹아든 것은 온전히 에일렌의 노력이었다.
칭찬해 줄 만한 가치가 있었다.
“무엇보다 잘 어울리는군요. 거기다 빛깔을 보아하니 일반적인 강철도 아닌 것 같고.”
“그, 그래요? 흐, 흠. 뭐, 미스릴을 섞어서 하마르 님이 제작해 준 것이니 방어력만큼은 확실할 거예요.”
“미스릴?”
“그렇게 보지 말아요. 아버지 이름을 빌려서 구한 건 사실이지만, 돈은 내 돈을 쓴 거니까. 포상금.”
“아. 하하, 누가 뭐라고 합니까. 멋집니다. 확실히 눈에 띄는 걸 감수할 만하겠군요. 움직임도 편해질 테고.”
미스릴 합금에, 맞춤형 갑옷.
그쯤 되면 확실히 눈에 띄어서 먼저 죽을 확률보다는 능력 상승으로 인한 생존 확률이 더 높아질 것이다.
“헤헤. 고마워요.”
반색하며 웃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마음이 놓였다.
‘……마음이 놓여?’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순간적으로 안색이 굳었지만.
‘내가 잘살고 있던 처자를 험지로 데리고 온 거니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 생각하며 애써 에일렌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동안 이뤄 낸 가문의 성과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기사단의 바로 뒤쪽을 따르는 1,500명의 석궁기마병.
기사단처럼 번쩍이는 판금 갑옷은 아니었지만 질 좋은 사슬 갑옷에 연사 석궁을 들고, 보조용 연사 석궁과 검까지 패용한 모습.
말 뒤편에는 정확하게 열두 개의 탄창을 실은 그들의 무장은 맥라인 석궁기마병의 표준 무장이었다.
이제는 맥라인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병과.
애초에 기사가 될 확률이 높은 재능 있는 병사들을 전부 뽑아 놓은 병과인 데다가 그간 이뤄 놓은 성과도 혁혁하니, 석궁기마병에 포함된 병사들의 자부심은 이미 기사 못지않았다.
꼿꼿하게 고개를 세우고 있는 그들의 후방으로는 오와 열을 맞춘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뒤를 따랐다.
기본 무장은 맨 앞줄의 방패병을 제외하면 사슬 갑옷에 창과 연사 석궁이었다.
말이 없는 관계로 탄창은 허리춤에 달린 세 개가 전부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들의 숫자만 이미 3천 명이 넘어가고 있었으니까.
그들의 바로 뒤쪽으론 전체 병력에게 보급할 식량과 탄창을 비롯한 소비 물자를 실은 수레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따라 나오고 있었다.
차후에 비프로스 성에서 따로 보급이 보내지겠지만, 현재 있는 물량만으로도 최소한 2~3주의 전투를 이어 나갈 수 있게 고려된 보급 부대.
그 가장 앞에는 클레이튼을 비롯한 골렘 마탑의 제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안에 내용물이 전혀 보이지 않게 꽁꽁 싸맨 열 개의 짐 마차를 각각 몰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앞에 있는 마차를 모는 클레이튼은 자신의 옆에 앉은 작은 소녀에게 걱정스레 말을 건네고 있었다.
“빅토리아. 정말 괜찮겠느냐?”
클레이튼은 5천에 가까운 대병력의 앞쪽에서 자신의 옆까지 쭈욱 이어지는 시선이 지금도 느껴졌다.
대공자의 곁에서 수시로 이곳을 돌아보는 적청의 오드아이를 가진 기사의 눈길이.
“……괜찮아요, 스승님. 오빠도 이제 더는 뭐라 안 할 거예요.”
“네 오빠도 너를 걱정해서…….”
“그러니까! 제가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해요.”
오빠를 위해서라도.
“흐음. 그래도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거라. 네 오빠에게는 그리 약속했으니.”
“……예, 스승님.”
클레이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입문한 지 9개월도 되지 않아 1서클의 마법을 마스터한 이 천재 제자는 고집이 너무 셌다.
무슨 생각인지 부득불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우기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은 마탑 전체를 한 번 뒤집어엎었다.
남매끼리 서로 끔찍이 아끼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결국 자신은 웃어넘겼지만. 그 오빠인 빅토르는 감봉 조치까지 당하며 대공자에게 경고를 들었다.
그럼에도 녀석은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며 협박 같은 간청을 남겼다.
– 제 동생, 무슨 일이 있어도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만약 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무슨 짓을 하게 될지 저도 모릅니다.
아무리 빅토르가 어린 나이에 포스유저 중급에 오른 촉망받는 천재 기사라고는 하나, 지금 자신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듣고 있던 제자들이 오히려 분노할 정도였지만, 클레이튼은 그 눈에 담긴 간절함을 읽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었다.
더불어 호기심도 생겼다.
‘남매가 하나는 검술의 천재고 하나는 마법의 천재라니. 이 집안엔 무슨 용의 피라도 흐르는 건지.’
특이한 외모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남매.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클레이튼의 시선이 멀리 앞쪽에서 또 이곳을 돌아보고 있는 적청의 오드아이와 마주쳤다.
“빅토르. 적당히 하거라.”
“죄, 죄송합니다.”
“아직도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느냐?”
“절대 아닙니다.”
보호한다고 무작정 감싸고 도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이제는 자신도 그 사실을 알았다.
다만.
“그럼?”
“……어린 동생이 전쟁터에 따라온다는 데 걱정을 안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가족으로서 당연한 생리일 뿐이다.
빅토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네 동생은 항상 그런 생각을 했을 거다.”
“……예. 그럴 것 같습니다.”
“리아는 클레이튼 님이 확실히 챙길 테니 걱정하지 말고. 너도 몸을 좀 사리거라. 지난번처럼 무리하게 뛰어들지 말고. 동생을 생각해서라도.”
“알겠습니다.”
빅토르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이런 걱정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미래를 꿈꾸게 된 것도 모두 로건 님 덕분입니다. 리아에게는 아직 로건 님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동생. 그리고 주군.
빅토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의 순위였다.
그에게 자기 자신의 안위는 그다음일 뿐이었다.
“아무튼, 이리 보니 장관이군.”
에일렌과 빅토르와의 대화를 끝내고 전체 병력을 훑어보는 로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도 그럴 만했다.
50명의 기사와 천여 명의 병사를 영지에 남겨 놓고도 5천에 가까운 대군이었다.
거기에 이미 위력을 증명한 석궁과 비밀 병기까지.
몇 년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거대한 전력이 지금 자신의 손안에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페레타의 성의(?)로 합류하게 될 60여 명의 기사가 추가될 것이었다.
토모도 성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본 페레타를 쥐어짠 결과물이었다.
거기다 지금 데려가지는 못하지만, 석궁 훈련을 받은 1만이 넘는 자경단까지 합치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어떤 변수가 있어도 계획한 바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로건은 성벽 위에서 출병하는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동생과 눈을 맞추고 손을 들어 주었다.
자신감 어린 표정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동생의 미소가 가슴속에 미약하게 남아 있던 한 줌의 걱정조차 덜어 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로건의 시선이 현 내전의 가장 치열한 전장, 쌍둥이 성 방향으로 향했다.
* * * 원래 발터마임 공작가의 영지에 속해 있던 쌍둥이 성, 알룬 성과 알론 성은 천여 년 전 신화 시대에 사라진 두 개의 달의 이름을 딴 성이었다.
성 하나의 크기만 따져도 왕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커다란 성에 속하는 이 쌍둥이 성은 도보로 하루 정도의 거리를 두고 동서에 지어졌는데, 본래 목적은 당시 남부 평야에 자리 잡고 있던 오크의 대군에게서 인간의 땅을 지키기 위한 요새였다.
당시 불리던 지역 이름이 바로 발터마임이었고, 그란디아 왕국에서 그 땅을 터로 잡은 초대 공작은 인간과 왕국을 지키겠다는 맹세의 의미로 그 지역명을 자신의 성(姓)으로 삼았다.
안타깝게도 그런 아름다운 조상의 유지는 사라지고, 지금 그 두 성은 같은 왕국의 인간들이 서로 편을 갈라 죽고 죽이기 위한 전쟁터가 되고 있었다.
한껏 달아올랐던 격전의 분위기가 조금씩 사그라들며 서로를 탐색하던 시기.
서쪽 성의 뒤편에서 5천에 가까운 대병력이 나타났다.
“불꽃 문양 깃발, 확인했습니다. 맥라인 가문입니다!”
“허허. 진짜 오다니……. 게다가 5천이라, 허…….”
성벽 위에서 멀리 다가오는 맥라인 군을 내려다보던 요르단 발터마임은 연신 헛웃음을 지었다.
총병력 4만이 넘는 아군의 1/8에 가까운 숫자가 더해지는 것임에도, 무언가 찜찜한 것인지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표정을 읽은 로저 비프로스가 재빠르게 치고 나왔다.
“보나 마나 오합지졸일 겁니다. 이미 예전에 반파된 전력을 숫자만 늘리기에 급급했을 테니까요.”
“글쎄…… 움직이는 걸 보니 훈련도 충실한 것 같은데. 무장도 대단하고. 너무 악감정이 섞인 판단 아닌가, 로저?”
로저 비프로스가 자신에게 딴죽을 거는 동료를 향해 눈을 흘겼다.
“자네야말로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르는 놈들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게 아닌가, 루첸?”
그는 갈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 그란디아 왕국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특색 없는 외모의 이 평범한 사내, 루첸 탈로스가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망도 없고, 하고자 하는 것도 없는 주제에 남에게 훼방 놓는 것만 즐기는 게으른 한량.
그것이 로저 비프로스가 루첸 탈로스에게 가지고 있는 인식이었고, 주변의 사람들 대부분도 그와 비슷하게 생각했다.
파벌의 가장 큰 축 중 하나인 변경백만 아니었더라도 굳이 말도 섞고 싶지 않은 위인이었다.
‘발터마임가의 조카사위만 아니었어도 중립을 선언했을지도 모르는 자.’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에 대한 요르단 공작의 신뢰는 무척 높았다.
그랬기에 지금처럼 그와 더불어 공작의 좌우에 서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경우엔 항상.
“어찌 보느냐, 루첸.”
지금처럼 공작이 그에게 먼저 의견을 물었다.
“대충 봐도 장비의 질은 공작령 못지않습니다. 훈련도 잘되어 있는 것 같고, 무엇보다 여기 로저 공을 물 먹인 전력이 있으니 놈들이 진심이라면 큰 전력이 될 겁니다.”
“진심이 아니라면?”
“분탕을 칠 생각이라면 아군에 치명적인 독이 될 겁니다.”
로저 비프로스가 끼어들었다.
“오랜만에 나와 생각이 일치하는군.”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뭐?”
“저 물자, 저 병력. 아깝지 않겠어? 차라리 소수 정예랍시고 왔다면 몰라도, 저 정도 병력을 날리기에는 놈들도 걸린 게 너무 커. 저 병력 다 잃고 1왕자파에 가면 목숨만 날리고 그대로 삼켜지겠지. 바보가 아니라면 알 텐데…….”
심드렁한 태도로 던진 루첸의 말.
졸지에 바보가 된 로저 비프로스가 울컥하는데.
공작의 말이 더 빨랐다.
“왕자 전하께 말씀드려라. 놈들을 맞이하겠다. 기왕이면 성대하게.”
“각하!”
“마음을 크게 먹게, 로저. 전에 내가 한 말 잊지 않았겠지? 놈들은 그저 화살받이로 쓰고 버리면 그만이야.”
“크흠. 저는 그런 것이 아니오라, 혹시나…….”
“긴말 말게. 놈들을 소모하여 1왕자파에 타격을 주고 우리는 반전을 꾀하면 그뿐. 그것만 생각하게.”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맥라인의 군대가 서쪽 성문 앞에 도착했다.
병사가 그것을 고하자마자 알룬 성의 서쪽 문이 열리고, 불사조의 깃발을 앞세운 일단의 병력이 그들의 앞으로 나아갔다.
무려 5백이 넘는 기사단.
그리고 두 명의 초인.
하지만 가장 앞에 선 것은 무려 여덟 명의 병사가 들어 올린 가마였다.
2왕자 로메인 폰 그란시아.
오만하고 젊은 왕자가 거만한 표정으로 가마 위에 앉아 다가오는 맥라인 가문을 바라보았다.
“충! 패드릭 맥라인이 정당한 왕위 계승자이신 로메인 폰 그란디아 전하를 뵙습니다!”
패드릭이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리자 기사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뒤로 멀뚱한 표정의 병사들이 누구는 따라 꿇고, 누구는 서 있으며 부산한 광경을 연출했다.
그리고 왕자는 굉장히 삐딱한 태도로 지원을 온 가문의 수장을 맞이했다.
“정당한…… 하. 당연한 말이지만 꽤 늦었어.”
‘뭐지 이 등신은?’
아버지를 따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건이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릴 뻔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