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26)
126화솔직히 2왕자, 로메인 폰 그란디아에 대해 로건이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다만 후세에 나라를 말아먹은 폭군이라 불린 1왕자, 로히터보다 더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던 암군의 자질이라는 정도만 기억할 뿐이었다.
그 외에는 그랑 노블레스에서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제 형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분노하던 모습 정도뿐.
‘뭐, 그것만으로도 인성은 알 수 있었지만.’
인성을 떠나 이렇게까지 멍청할 줄은 몰랐다.
“이제 와 무릎을 꿇으면 내가 옳다구나 하고 환영할 줄 알았어? 너희는 그냥 박쥐밖에 안 돼! 눈치를 보다 이기는 쪽에 붙으려는! 그게…….”
이겨? 누가?
지금 전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너무 어이가 없어 로건은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고개를 들어 바라본 얼간이의 뒤쪽에는 놈의 말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들어 땅이나 하늘을 바라보는 귀족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었다.
적어도 수뇌부가 다 저놈처럼 멍청하지는 않다는 얘기였다.
“왕자님, 그쯤 하면 남작도 알아들었을 겁니다. 다음은 제가 얘기하겠습니다.”
“흐, 흐음. 그러도록 해, 공작. 난 좀 피곤해서 이만 들어가 보지.”
아니, 뭘 했다고…….
첫 마디부터 퇴장까지. 하나하나가 다 충격적인 얼간이었다.
그리고 그 얼간이 왕자가 성문 안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진짜 실세와 정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졌다.
“일단 합류하게 된 것을 환영하지.”
“영광입니다, 각하.”
“자네는 다행히 아들과는 달리 예의가 바르군.”
“제 아들도 예의가 바릅니다.”
“그래?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요르단의 삐뚜름한 시선이 멀지 않은 거리.
로저 비프로스와 대면 중인 로건에게 향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작님.”
“흐……. 흐하하. 거참 어처구니가 없군.”
“좋은 상황 아닙니까? 일전에 저희 서남부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야 정말 이루어졌군요.”
까드득.
“네놈이 지금 뚫린 입이라고…….”
“아. 뒤에 계신 분들이 제프 퍼시발 자작님, 데릭 루프만 남작님이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데 초면에 실례지만 전쟁 끝나면 어쩌시려고 거기 붙어 계십니까?”
“네 이놈……!”
“우와. 목소리는 여전히 크시군요. 건강하신 것 같아 기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로저 비프로스의 몸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했다.
그리고 로건은 그런 그를 응원(?)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약을 올리려던 것뿐이었는데, 백작의 반응이 너무 즉각적이었다.
마치 이상할 정도로 참을성이 없어진 것처럼.
‘잘하면 이 정도 수작에도 걸리겠는데? 덤벼! 참지 마!’
이토록 가까운 거리. 최상급의 경지에 오른 지금이라면 백작이 다른 수작을 부리기도 전에 목을 칠 자신이 있었다.
먼저 선공을 당한다면 그를 죽인다 해도 뭐라 할 자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일시적으로 같은 편이 된 것이라지만, 자신에게 적의를 가진 자를 등 뒤에 두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기대는 은빛 머리카락의 사내가 사이에 끼어들며 사라졌다.
“각하. 참으십시오. 똥을 가까이하면 냄새만 날 뿐입니다.”
차가운 웃음을 뿌리는 플란츠의 귀신같은 눈동자가 로건의 전신을 훑는 순간, 로건은 속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쯧. 글렀군.’
“……흐. 그래. 앞으로 두고 보지.”
어느새 냉정을 되찾고 휭하니 돌아서는 로저 비프로스의 뒤로, 공작과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아슬란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킨 뒤 엄지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냥 피식 웃어 보이고 돌아서는데, 어느새 좀 떨어져 있던 회색 머리 거한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흡! 놀래라! 쫌!’
로건은 그 기척 없는 움직임에 속으로는 식겁했지만, 겉으로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각하.”
“음? 우리가 실제로도 만난 적이 있던가?”
“스승님 자녀의 성명식 때 먼발치에서나마 뵌 적이 있습니다.”
“아아, 그랬군.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미리 안면을 틀 걸 그랬어. 그렇지 않나?”
“세상일이야 모르는 것이라지만, 저도 좀 아쉽긴 합니다. 하하.”
“그나저나 정말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대체 무슨 생각이지? 남작에게 물었더니 자네에게 물어보라더군. 이미 실질적으로 맥라인의 지도자라던데…….”
회색 머리 거인의 갈색 눈동자가 뱀처럼 로건의 전신을 훑었다.
“하하. 무슨 생각이긴요. 이득을 볼 생각이지요.”
“이득……이라.”
“불리한 쪽에 걸어야 배당이 높지 않겠습니까.”
“설마 그 조건이 정말 농담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농담일 리 있겠습니까. 이 상황에서 저희의 도움으로 전쟁에 승리하시게 된다면 결코 과한 요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그런 선물’까지 받고도 찾아왔는데, 더 대우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물이라는 단어에 요르단의 갈색 눈동자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지만, 그 불꽃은 금세 사그라들었고 공작은 이내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마치 자네들이 없다면 우리가 반드시 질 것으로 생각하나 보군. 하지만 세상에는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라네.”
“그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저쪽에도 있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정말 한 마디도 안 지는군. 로저가 학을 뗄 만해.”
“하하. 칭찬이라 듣겠습니다.”
“그런데 합류했다고 해도 우리로선 자네들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만담 같은 대화 도중에 훅 치고 들어오는 본론.
하지만 로건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병사들은 한동안 성 밖에 대기해야 할 거야. 그리고 자네에게 수뇌부 전술 회의에 참여할 자격은 주겠지만, 발언권은 없다고 봐야 할 거야. 맥라인이 우리에게 신뢰를 증명할 때까지.”
“그 신뢰, 어떻게 증명하면 됩니까?”
“여긴 전쟁터야. 신뢰야 전공을 세워 증명하면 되지 않겠나?”
“쉽군요.”
칼날을 감춘 대화는 너무도 쉽게 합의에 이르렀다.
* * *
“일주일 전 사로잡은 암살자를 마지막으로 전하를 향한 암습은 없어졌다. 슬슬 전하께 접근할 수단이 떨어져 가고 있다는 의미지. 이제 그 비열한 놈들에게 다시 뜨거운 맛을 보여 줄 차례다!”
“예!”
탁자를 두드리는 요르단 공작의 외침에 다섯 명의 귀족이 동시에 호응했다.
반 거인(Half Giant) 루터 카일을 비롯한 변경백 훌리오 트리탄, 루첸 탈로스, 파밀 체르노, 그리고 변경백이었던 로저 비프로스까지.
2왕자파의 핵심 전력을 이끄는 수뇌부의 모습을 보며 로건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지들은 안 했던 것처럼.’
땅이 아닌, 왕위를 얻기 위한 전쟁.
형세가 어떻게 몰리건 적 왕자를 쓰러트리면 그 순간 전쟁은 끝이었다.
만약 왕위 계승자가 죽었는데도 전쟁을 지속하려 한다면 지금은 중립을 선언한 세력이 모조리 상대편에 붙을 것이고, 아군에서도 대량의 이탈자가 나올 것이 분명했으니까.
즉, 이 전쟁에서 서로의 왕자를 향한 암습은 비열한 것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양 진영의 가장 강력한 전력이기도 한 열화검 요르단 발터마임과 빙결의 마도사 후안 더글라스가 각각 왕자들의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고.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서가 아닌, 사람을 죽이기 위한 전쟁.’
더구나 그 목표가 된 자들은 주변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살아남기를 원하는 자들이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끔찍하고 처절했으며, 오래 지속됐던 전쟁.
그래서 결국엔 나라의 기둥뿌리를 뽑아 버린 비극이 전생의 내전이었다.
‘죽일 놈들만 최대한 빨리 죽여서 전쟁을 끝낸다. 그리고…….’
어차피 의미도 없는 전술 회의.
그 편제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생각에 골몰하고 있을 때.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맥라인 군이 적진을 우회하여 적의 후방을 습격해 주길 바란다.”
로건을 향해 일제히 꽂히는 시선.
여기에 모인 자들에 비해 한참은 어린 그를 무시하는 시선도 있었고,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시선도 있었다.
그리고 호기심 어린…….
‘음? 호기심?’
로건의 시선이 유독 독특한 눈빛의 변경백 한 사람에게 꽂혔다.
루첸 탈로스. 갈색 머리 푸른 눈의 평범한 인상.
생각해 보면 낮의 서문에서 대면했을 때에도 저렇게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본 것 같았다.
‘나중에 어떻게 되는 자였더라……?’
전생의 기억에도 별다른 정보가 없어 굳이 염두에 두지 않은 자.
그렇기에 저런 표정이 더 신선했다.
엉뚱한 시선에 신경을 쓰고 있자니,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꽂혀 들었다.
“답이 없다는 것은 불복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자네에게 전권을 맡겼다는 남작에게 내가 다시 물어야 하나?”
“아, 아닙니다. 우회해서 후방 습격이라고요?”
“그렇다. 이미 서로의 정예들은 전부 파악이 되고 있다. 변수라면 자네 가문뿐이지. 그러니 자네들이 기회를 만들어 줘야 하지 않겠나?”
그 뻔뻔스러운 말에 로건은 자칫 웃음이 나올 뻔했다.
휘하 귀족들의 병력까지 따지면 한 진영만 해도 5만이 넘는 대군이 부딪치는 전장.
고작 5천의 병력으로 빤히 보이는 전장을 우회해서 뒤를 치라는 것은 그냥 적을 유인해서 자폭하는 말과 다를 것 없는 주문이었다.
저기 저 로저 비프로스가 씰룩이는 입가를 가누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재밌는 제안이군요. 따르겠습니다.”
“……뭐?”
제안을 꺼낸 요르단이 오히려 더 놀라고.
지켜보던 변경백들 역시 혼란스러운 눈으로 로건을 바라보았다.
“혹시 추가적으로 제가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까?”
“아니, 아니지. 알아들었다면 됐다. 세부 작전은 직접 세우도록.”
“알겠습니다.”
작전이랄 게 있을까.
로건은 속마음을 감춘 채 그대로 돌아 나왔다.
* * *
“거부하면 놈들의 군대를 분산시켜서 지휘권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자네가 말한 병사들의 그 무기를 합법적으로 얻기 위해.”
“알고 있습니다.”
“그조차 거부하면 최선봉에서 돌격을 시킬 생각이었지. 작전도 싫다, 분산도 싫다 하면 전면밖에 맡길 수 없으니.”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수긍하고 떠났다?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작전을 그대로 이행하겠다는 뜻일까? 그리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멍청한 놈은 절대 아닙니다.”
“그래. 그럼 무슨 수가 있다는 건데. 뭐일 것 같나?”
요르단 공작이 물었음에도 로저 비프로스는 섣불리 대꾸할 수 없었다.
항상 예상을 벗어나 결국 자신의 땅까지 빼앗아 버린 놈.
놈에 대한 어떤 것도 쉬이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자신이 있는 겁니다.”
또 주는 것 없이 얄미운 놈이 끼어들었다.
“루첸?”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죽으라고 등 떠미는 전술에 반론도 없이 수긍한다는 건 바보가 아니라면 자신이 있다는 거고, 그 젊은이는 누가 봐도 바보는 아니지요.”
“1왕자 군이 뻔히 보는 앞에서 우회해서 뒤를 치는 일을 자신한다? 내가 내 기사단만을 이끌고 시도해도 어려운 일이야.”
“그거야 각하께서 나서시면 적들 역시 최선을 다해 막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들은 다르지 않습니까.”
루첸의 말에 요르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렇다 해도 의문이 모두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나라면 적어도 5천 이상의 일군, 변경백급은 보내 막겠지. 본진에서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예, 저라도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적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리고 그 젊은이도요.”
“그 말은?”
“결국엔 똑같은 결론입니다. 변경백의 군대 하나쯤은 밟아 버릴 자신이 있는 거겠죠. 그대로 적에게 투항할 생각이 아니라면.”
루첸의 덤덤한 말에, 로저 비프로스가 끼어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만 해도 시간만 있었다면 놈들을 쉽게 밟아 버릴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상식적으로는 그게 맞지. 자네가 말한 그 무기를 고려해도 말이야.”
“그러니 바보 같은 소리지!”
루첸 탈로스는 분노해 소리치는 로저 비프로스를 보며 혀를 찼다.
“하아, 로저. 그 젊은이한테 분노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자네답지 않게 자꾸 왜 그러지? 그 젊은이가 앞뒤 못 가리는 얼간이가 아니라면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우리야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되지 않나.”
“그래. 옳다. 그 진형에서는 설령 놈들이 배신한다 해도 우리에게 큰 피해를 줄 수는 없을 테니.”
공작 역시 루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냥 얼간이라면 적에게 조금이나마 피해를 주고 우리 편의 얼간이가 사라지는 거고, 얼간이가 아니라면 대책이 있을 테니 성과를 가져오겠지.”
어찌 보면 어떤 이보다 로건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로저 비프로스였고, 그런 그로서는 로건이 얼간이일 것으로 생각하기가 더 어려웠다.
그렇다고 놈들이 그새 자신을 월등히 뛰어넘는 전력을 구축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냉철한 이성.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자꾸만 흔들리는 옛 변경백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서.
“개인적으로는 자네가 얼간이에게 당한 진짜 얼간이가 아니기를 바라네.”
얄미운 놈이 다시금 심기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