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3)
13화- 산으로 돌려보낼 의향도 있다.
그 말은 대륙의 남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 너머로 사라진 하마르의 종족을 따라가게 놔주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보통 300년을 사는 반(半)요정족인 드워프에게 자유를 얻기 위한 20년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인간은 거짓말을 잘하지. 그 말을 믿을 것 같으냐.”
하지만 드워프의 인간에 대한 불신은 심각했고, 자포자기한 눈빛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자 로건이 품속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번뜩이는 종이를 살며시 꺼내 들었다.
“이게 뭔지는 알지?”
그것을 확인한 드워프의 눈이 다시 떨렸다.
“……마법 계약서?”
필립을 구속하기 위해 마법 계약서를 살 때 이날을 생각해 준비한 여분이었다.
“서, 설마…… 나를 위해 그걸 쓰겠다고?!”
“잘 아네. 정 못 믿겠다면 이 계약서를 써 줄 수도 있다.”
“계, 계약서 쓰자! 반드시! 뭐든지 만들어 주마!”
하마르의 확 달라진 태도에 로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적극적인 태도로 바뀐 드워프, 하마르를 위해 로건은 지체 없이 계약서를 써 주었다.
로건의 입장에서야 그의 의욕을 확실히 돋우기 위한 미끼일 뿐이었다.
그러나 마법 계약서의 빛이 자신과 로건의 전신에 깃드는 것을 보며 하마르는 그 완고해 보이는 얼굴에 걸맞지 않게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지, 진짜 그리 해 주겠다는 거였다니. 고맙다, 인간. 아니, 고맙습니다! 주인님!”
20년의 강제 노동 기간이 예정된 이가 오히려 고마워하는 광경. 게다가 듣기 힘든 드워프의 존대까지 들었다.
로건은 그 이상한 괴리감에 쓴웃음을 지었다.
‘계약서 하나로 이리 의욕을 살릴 수 있다면 남는 장사지.’
그가 만들고자 하는 무기는 의욕을 잃은 드워프 수준, 그러니까 인간 대장장이보다 조금 뛰어난 수준만으로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하마르에게 자유를 보장한 것은 아무래도 전생의 기억 때문이었다.
천 년 전 ‘대이주’ 때, 드워프들 역시 남부 산맥 너머로 대부분 사라졌다.
자연히 드워프의 대도시에서나 한둘 있었다는 대가급 드워프는 더욱 희귀해졌는데, 그런 대가급 드워프 역시 노예가 된 후엔 명성에 걸맞은 실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
하지만 로건은 전생에 단 한 번, 대가급 드워프의 ‘진짜’ 실력을 본 적이 있었다.
노예에서 해방된 후, 그 기쁨을 고스란히 담아 내 만들었던 작품을.
‘진심으로 자신의 의지를 담은 대가급 드워프의 솜씨. 그건 정말 대단했지.’
그런 실력을 끌어낼 수 있다면 이 정도 투자는 일도 아니었다.
20년이란 긴 시간은 그의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으니까.
‘그 전에 망할 수도 있고.’
로건은 머리를 흔들어 불길한 상상을 떨쳐 버리고 상기된 안색의 하마르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뒤를 지키고 서 있는 카이를 바라보았다.
‘어쨌건 하룬에 온 목적은 달성했다.’
로건의 입가에 희미하게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변수 없이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로건은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가벼웠던 마음도 잠시뿐, 노예 시장을 나서는 과정에서 로건 일행은 소란스러운 사건을 마주쳤다.
“잡아!”
“노예가 탈출했다!”
“잡아! 잡으라고! 이것들아!”
팔뚝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매부리코의 중년인이 노예 시장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푸른 머리의 소년이 자신과 닮은 여자아이를 업은 채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 뒤를 용병으로 보이는 이들 대여섯이 따라붙고 있었다.
소년은 피골이 상접해 보이는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잽싼 몸놀림으로 몇 번이고 용케 용병들의 손길을 피하며 달아났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퍽! 퍽!
“이 개 같은!”
뻐억.
“노예 새끼가! 감히!”
뻐어억.
“나를 물어?!”
매부리코 중년인은 조금의 사정도 보지 않고 아이를 무자비하게 밟아 댔다.
피가 흐르는 팔뚝을 보며 분노를 토해 내는 것이 그대로 아이가 죽더라도 상관하지 않을 모양새였다.
게다가 그렇게 밟히면서도 자세 하나 변하지 않는 푸른 머리 소년의 모습 때문인지, 그의 분노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져 가는 듯했다.
‘동생인가……?’
피가 흐를 정도로 입술을 깨물면서도 소년이 쭉 뻗은 팔과 다리를 기어이 굽히지 않고 고집스럽게 버티는 이유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소년이 업고 달리던, 닮은 이목구비의 여자아이를 중년인의 발길질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오, 오빠. 나, 난 괜찮아.”
벌벌 떨고 있으면서도 소년의 팔을 잡고 속삭이는 소녀.
조금 떨어져 있는 로건은 청각에 힘을 집중해서야 간신히 들은 목소리였지만, 바로 위의 소년이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입술을 더욱 꽉 깨물 뿐, 다시 쏟아지는 발길질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노예들입니다. 그냥 갈 길 가시지요.”
“알아. 알긴 아는데, 잠시만…….”
노예는 인간이 아닌 물건. 그 주인이 어떻게 다루건 남이 참견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이 비록 저렇게 혐오스러운 광경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매부리코 중년인의 뒤에는 아까 소년을 사로잡은 용병 다섯이 주변을 노려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남이 자신의 물건을 자기 마음대로 다룬다는데 굳이 위험한 시비까지 져 가며 상관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로건은 매 맞는 소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왜지?’
단순히 소년에 대한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년의 푸른 머리 아래 보이는 붉고 푸른 눈동자.
서로 대비되는 색상의 오드 아이였다.
대륙에서 보기 드문, 아니 어쩌면 유일할지도 모를 그 눈동자들이 그의 머릿속 한쪽을 계속해서 간질거렸다.
‘푸른 머리, 적청의 오드 아이 노예…….’
분명히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데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는 답답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소년의 눈동자와 스치듯 마주친 순간, 로건의 뇌리에서 오래된 기억이 번뜩 되살아났다.
“아! 빅토르!”
“예?”
“아, 아니야. 잠시만…….”
막힌 것이 뚫린 듯 떠오른 기억이 묘한 쾌감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기억은 로건에게 또 다른 고민거리를 안겨 주었다.
‘여기서 귀족 학살자를 만날 줄이야.’
매 맞는 소년을 보는 로건의 눈이 절로 깊어졌다.
귀족 학살자 빅토르.
전생에 왕국에서 어마어마한 유명세를 치렀던 오러 유저로, 그가 특별히 유명해졌던 것은 바로 그 출신 때문이었다.
귀족은커녕 평범한 서민도 아닌 노예 출신. 심지어 자신의 주인을 죽이고 탈주한 노예이기도 했다.
무술에 대한 교육은 고사하고 일반적인 교양 교육도 받지 못한 노예가 자신의 주인을 죽이고 도망쳤다.
게다가 도망치는 와중에 쫓아오는 이들을 참살해 버리고 수많은 병사와 기사, 그리고 귀족을 죽인 수배범이 되어 잠적했다.
그리고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제국 전쟁이 시작된 시기에 다시 나타난 빅토르는 그 주인이었던 가문 전체를 도살해 버린다.
무려 초인의 증거인 오러를 사용하여 벌인 일이었다.
그는 그 후로도 그란디아 왕국의 귀족이라면 가리지 않고 살해하고 다녔고, 그 때문에 오러 유저로서는 드물게 귀족 학살자라는 흉악한 이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노예 탈주 사건은 내가 용병이 되고 나서 1년쯤 후였어.’
맥라인 가문의 영지전이 끝난 직후의 소식이기에 대략적인 시기는 알고 있었다.
다만 빅토르가 어디 가문의 노예 출신인지 같은 세세한 정보까지는 기억하지 못했었는데, 우연히 이렇게 마주친 것이다.
만약 지금 저 소년을 자신이 구해 준다면?
‘미래의 오러 유저 하나가 내 편이 된다.’
그것은 확실히 이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라면…….
“아아악!”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또 어떻게 빈틈을 본 것인지 빅토르로 추정되는 소년이 그를 밟던 주인의 정강이를 물어뜯고 있었다.
치악력이 엄청난지 멀리서 얼핏 보기에도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는 매부리코의 정강이.
놀란 용병들이 달려들어 마구 때리고 잡아떼었지만, 소년은 끝까지 정강이를 물고 늘어졌다.
흉악하게까지 느껴지는 소년의 투지 넘치는 눈빛은 전생의 안 좋은 소문을 절로 떠올리게 했다.
‘아무도 못 말리는 살인광.’
로건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잘 드는 칼이었지, 아군도 베일지 모르는 흉기가 아니었다.
‘……흉기라면 격리해 버리면 되지. 왕국의 전력을 깎아 먹지 못하도록.’
잠시 고민한 것이 우스울 정도로 결론은 쉽게 나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즉시 로건이 움직였다.
“이 개…….”
터억.
“윽?”
간신히 떼어 낸 소년이 이미 실신한 것을 보았음에도 발길질을 멈추지 않던 매부리코는, 갑작스레 자신의 발을 가로막는 검집에 흠칫 놀라 물러섰다.
“어떤 새…….”
붉은 머리가 그의 바로 옆으로 다가서는데 호위 병사들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호위들이 뒤늦게 놀라 검을 꺼내 드는 모습을 보니 나오려던 막말이 절로 들어갔다.
거기다 그 뒤를 따라온 자는 하룬의 유명한 용병, 카이가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붉은 머리의 갑옷에 새겨진 불꽃 문양까지 확인하자, 매부리코는 본능적으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귀하신 분을 몰라뵈었습니다. 제, 제가 어떤 실례라도?”
“그냥 지나가던 사람인데, 관심이 생긴 물건을 좀 덜 상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 말에 잠시 뒤룩뒤룩 눈을 굴리던 매부리코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손님이셨군요. 이런 당황스러울 때가, 아하하!”
“됐고. 원래 노예를 이렇게 다루나?”
“아하하하,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상품들이 유난히 말을 듣지 않아서……. 하하, 제가 좀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들 남매에게 관심이 있으시다고요?”
매부리코는 정강이와 팔뚝에 피를 철철 흘리는 와중에도 어색하게 웃으며 두 손을 비벼 댔다.
로건은 그 흉한 모습보다 그의 말에 주목했다.
“손님, 그리고 상품이라……. 노예상인가? 잘됐군. 그럼 지금 바로 거래할 수 있을까?”
거래를 할 때는 급한 모습을 보이는 쪽이 불리한 법이지만 지금 상황은 좀 달랐다.
주변의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고, 간접적으로나마 무력의 우위를 보이고 거래 대상의 기를 질리게 한, 다시 말해 심리적 우위가 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매부리코는 그래도 노예 시장에서 굴러 온 경험이 있어서인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이 아이들은 희귀한 적청의 오드 아이로, 심지어 남매 모두가 그렇습니다. 희귀한 매물이라 가격이 좀 비싼데 괜찮으실지……?”
“됐고. 얼마야?”
“글쎄요. 적어도 하나당 1만은 주셔야…….”
그 말에 로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건장한 청년 노예의 가격이 보통 300골드쯤 했다.
매부리코 노예상은 피골이 상접한 어린아이들에게 그 수십 배의 가치를 매긴 것이다.
물론 귀족 학살자의 가치를 생각하면 두 당 1만이 아닌 10만도 싼 가격이지만, 그것은 그만이 아는 정보.
지금은 단순히 희귀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을 뿐인 그들을 그 가격을 다 주고 살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 쓰레기에게 돈을 벌어다 주고 싶지 않단 말이지.’
조금 전, 울먹이며 실신한 오빠를 돌보는 여자아이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로건에게 그들은 더 이상 마주친 지 5분도 되지 않은 남의 노예가 아니었다.
그러니 나오는 말투도 자연히 차가워졌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어린아이들이 건장한 노예의 30배라. 게다가 하나는 곧 죽을 것 같은데?”
“아아, 오빠…….”
그 말에 애꿎게 화들짝 놀란 여자아이의 눈에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정작 목표였던 노예상은 뻔뻔하게 웃었다.
“아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이래 보여도 튼튼한 놈이라 곧 툭툭 털고 일어날 겁니다.”
“흐음, 치료비가 많이 들겠는데. 더구나 뭘 시킨다 해도 한동안은 먹이고 가르칠 돈이 들 테고.”
“그래도 보시다시피 이곳 노예 시장에서도 하나뿐인 매물이라…….”
“하나당 500골드, 건장한 노예 값 이상이면 충분하지.”
“아이고, 손님. 그럼 원가도 못 건집니다.”
“흥. 내가 노예 원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도 워낙 찾기 힘든 상품인지라…… 헤헤.”
“욕심이 과해. 1천. 이 정도에 만족하도록 해.”
뭐라 반론을 하려던 노예상이 로건이 검의 손잡이를 쥐는 것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는 제안이었다. 노예상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빅토르 저놈은 끝없이 문제를 일으켰지.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노예상의 시선이 아직도 피가 흐르는 자신의 팔다리를 스쳤다.
특이한 외모는 장식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인데, 그 장식이 주인을 찌르려 한다면 의미가 없었다.
잠시의 망설임 끝에 노예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 감사합니다, 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