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32)
132화처음부터 전세가 압도적으로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왕자파의 변경백 중 하나인 자히드 백작령의 기사단이 쓰러지고 그 병력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1왕자 군의 전선 한 축이 그대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신무기로 병사가 기사를 막아서게 만들고, 적 병사는 석궁기마대가 원거리에서 학살한다. 그리고 아군의 기사는 전열이 무너진 기사단이나 약한 병사들만 주로 노렸다.
단순하지만 기사는 기사만 상대할 수 있다는 대륙의 상식을 근본부터 부정해 버리는 전술.
이 전술, 아니 이 무기들이 가져올 변화는 대륙 전사(戰史)를 근본부터 흔들어 버릴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지금 이 전장에 있는 이들 중 그런 미래까지 떠올리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현시점 맥라인의 신무기, 그 화력이 만들어 낸 눈앞의 결과만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막아! 막으라고!”
“왕자님, 이번엔 후퇴하셔야겠습니다. 적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곧 끝날 거라며! 이제 왕위가 가까이 다가왔다며!”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후안 더글라스는 전방위에서 압박을 가하는 적군들, 그중 한 지점에서 펄럭이는 불꽃 문양 깃발을 보며 이를 갈았다.
이 변화의 근본적인 원인이 고작 변방 남작가의 군대라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양 세력 사이에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줄타기나 하던 박쥐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이번엔 몰랐기에 당했지만, 다음부터는 어림없을 것이다.
후안 더글라스는 근거도 없는 장담을 하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로메인 놈 목만 따면 되잖아! 마도사가 그것도 못 해?! 도대체 지금까지 뭘 했길래 내가 이런 꼴을 보게 만드는 거야!”
자신이 왕으로 만들어야 할 외손주 놈은 여전히 상황 파악도 못 하고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왕자님. 제가…….”
“당장 이 소꿉장난 끝내 버려! 당신이라면 할 수 있잖아!”
초인이 무슨 무적의 병기도 아니건만, 이 철없는 것은 서른에 가까운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은 듯 보였다.
물론 장래에 쉽게 다루기 위해 자신이 이렇게 망가지도록 교육을 했다는 것은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사라지고 없었다.
“왕자님.”
안 그래도 맥라인 때문에 끓어오르는 분노가 나직한 목소리에 자연히 배어 나왔다.
그러자 그가 어려서부터 로히터 왕자 내면 깊은 곳에 심어 놓은 두려움이 왕자의 머릿속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 내 말은. 그냥…….”
“가시지요.”
“아, 알았어.”
얼굴이 파랗게 질린 왕자는 후안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왕자를 보며 후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부관을 불렀다.
“준비한 거 다 터트려. 퇴각할 시간을 번다.”
“하, 하지만 각하. 그건 비장의…….”
“내가 숨겨 놓은 게 그것뿐은 아니야. 시키는 대로 해.”
“……예.”
“그리고…….”
후안의 눈이 주변의 상황과 상관없이 여전히 치열하게 치고받고 있는 반 거인과 폭풍검의 전장을 향했다.
그러고는 그 너머 저편에 도사리고 있을 호적수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마도사가 무식하게 칼질만 하는 놈들과 뭐가 다른지 한 번쯤은 제대로 보여 줘야지.”
잔잔한 미소 속에 담긴 살기가 스산하게 주변으로 퍼졌다.
* * *
“놈들이 물러난다!”
“몰아붙여!”
“전쟁을 끝내자!”
전장의 광기에 몸을 맡긴 이들도 하나둘 눈치채기 시작할 정도로, 1왕자 군의 후퇴는 노골적이었다.
적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적이 도망가는 순간.
2왕자 군 대다수가 그 전장의 격언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기세를 올렸다.
“우리는 뒤로 빠진다.”
“예?!”
“잔말 말고 신호 보내. 충분히 할 만큼 했어.”
로건의 말에 크게 틀린 점은 없었기에 병사는 말없이 깃발을 흔들었다.
‘전공이 이미 충분한데 굳이 힘 뺄 필요 없어. 우리의 전쟁도 아닌데.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로건은 뱉어 낼 수 없는 말을 삼킨 채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신호에 따라 전장을 빠져나오는 석궁기마대와 기사단, 병사들의 움직임을 조율하며 전열을 정비했다.
그리고.
우우웅.
전장 곳곳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세에 로건의 감각이 쏠리는 순간.
번쩍!
“으아아악!”
콰콰콰콰콰콰!
후퇴하고, 추격하느라 바짝 좁혀진 전선 곳곳에서 은백색의 눈보라가 터져 나왔다.
1왕자 군의 뒤를 쫓던 2왕자 군은 물론, 후미에 쳐진 1왕자 군의 패잔병들까지 모조리 범위에 넣는 대규모의 마법 발현.
“블리자드……. 이렇게 많았다고?”
희귀하고 값비싼 5서클 스크롤이 숫자가 짐작되지 않을 정도로 연속해서 터져 나왔다.
로건이 최전선에 있던 맥라인의 병력을 물린 것이 신의 한 수라 생각될 정도로.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된 접전 지역.
“쫓아! 쫓으라고!”
분노한 요르단 공작의 음성이 오러를 싣고 전장 구석구석까지 퍼졌지만, 그 명령을 따르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1왕자파의 군대 대다수가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2왕자 군은 살아남은 자신의 세력을 챙기기에 바빴으니까.
‘강력하지만 오합지졸인 군대.’
로건이 다시금 이 내전의 특성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을 때.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이상한 에너지의 파동이 바로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정확히는 그를 향해 다가오는 병력들의 머리 위에서.
로건은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본능적으로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조심!”
그리고 풍신의 부츠가 지닌 효능을 연달아 발동하며 허공을 딛고 돌진했다.
“공자님?!”
“로건!”
“지금 뭐라…….”
당황한 음성이 아래에서 메아리칠 때.
로건이 솟구쳐 오른 허공의 바로 앞에서 갑자기 새하얀 기운이 뭉쳐진, 지름이 3m는 넘을 것 같은 거대한 구체가 나타났다.
그 안에 담긴 무시무시한 힘을 느낀 순간.
로건은 이를 악물고 전력을 끌어 올렸다.
발 디딜 곳이 없는 허공에서 풍신의 부츠가 마지막 세 번째 공중 도약으로 발판을 제공하고, 괴력의 건틀릿이 힘과 포스를 최대치로 증폭시켰다.
그리고 그 모든 힘은 고스란히 애검 룩스에 실려 길이 20m, 폭 1m가 넘는 황금빛 거인의 검으로 다시 태어났다.
‘대지 가르기!’
거인의 검이 그대로 흰색 구체를 양단했다.
쩌어어억.
실제로 소리가 나지는 않는, 로건의 머릿속에만 들리는 파열음.
그와 동시에 구체가 깨어져 나가며 지독한 냉기를 전방위로 퍼트렸다.
콰콰콰콰콰콰콰!
“으윽!”
“숙여!”
“엎드려!”
그 아래 있던 맥라인의 병력에게서 각양각색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은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싸늘한 냉풍에 그저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며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오직 한 사람.
탁.
비틀.
“흡!”
창백한 안색으로 비틀거리는 로건과 얼음으로 뒤덮인 그의 애검 룩스만이 조금 전의 폭발이 상당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호, 호들갑 떨지 마. 으, 춥다. 망할 놈.”
“예?”
“아니, 후안 더글라스. 빙결의 마도사라는 인간이 뒤끝이 좀 세네.”
로건이 얇지만 단단한 얼음에 휘감긴 애검을 잠시 응시했다.
우우웅.
손에서부터 열기를 피워 내며 포스를 주입해도 단지 마법의 여파에 불과할 얼음은 쉽게 녹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좀 전의 일격으로 지쳐 있다 해도.
‘저 거리에서는 아닐 테고. 미리 장난을 쳐 놓은 건가? 시간차를 두고 터지게? 그것만으로도 이 정도고? 썩을…….’
로건이 날카로운 눈으로 후퇴하는 1왕자 진영을 바라보았다.
다시금 초인과의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지자 기가 죽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마도사의 뒤끝은 깨끗하게 막아 냈으니 이 결전의 승자는 결국 자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그때.
쩌저적.
지속적으로 포스를 주입하자 얼음에 금을 내기 시작한 애검 룩스.
그 검신에서 일어난 기묘한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호오?’
* * * 쌍둥이 성에서의 회전으로 1왕자파는 그 바로 뒤의 투렌 성도 아닌, 한참 뒤인 하룬 성까지 계속해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맥라인이 군량을 태워 버린 것이 적에게 생각보다 더 큰 타격을 주었다는 것을 2왕자파도 알게 되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쌍둥이 성의 회전 이후 두 번의 회전을 더 거친 지금, 맥라인의 위상은 파벌 내에서도 이미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자자!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렇게 좋은 날 우리끼리 가벼운 축배 정도는 괜찮겠지. 모두 잔을 들게!”
요르단 발터마임의 말에 작은 회의실에 모여 있던 일곱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잔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하게 웃은 공작이 그중 가장 어린, 붉은 머리 붉은 눈의 청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 우리 맥라인 군이 우리 군에 합류한 이후, 승기는 확연히 우리에게 기울어졌다. 팽팽한 전장의 균형을 무너트릴 마지막 저울추, 그것이 우리에겐 맥라인이었던 거야.”
밀리고 있었으면서 무슨 팽팽한 균형.
헛웃음이 나왔지만, 이 분위기를 깰 이유는 없었다.
로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가리키는 요르단의 눈을 바라보았다.
“오늘 이 자리는 그 공을 치하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미 많은 공을 세웠지만, 앞으로도 더 잘해 주길 바란다는 뜻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변치 않을 약속을 하고자 한다.”
“그렇게 무거운 자리인 줄 알았으면 아버지께서 오셔야 할 것을 그랬습니다.”
“이미 가문의 모든 실권이 로건 공자, 자네에게 있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내 약속 따위는 받기 싫다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시든, 겸허한 자세로 받들겠습니다.”
“으하하하. 그래, 나는 자네의 그런 점이 참 좋아. 능력이 넘치면서도 겸손함을 유지하는 그 모습. 이러니 어찌 내가 아끼지 않을 수 있겠나.”
언제부터 아꼈다고.
자꾸 헛소리를 듣고 있자니 혀가 간질간질한 느낌이었지만, 다행히 인사치레는 그쯤에서 끝났다.
“나, 요르단 발터마임의 이름으로 공언하니. 전쟁이 끝난 후. ‘우리’가 대권을 차지한다면 맥라인의 현 비프로스 영지 지배권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칼리아 영지의 동쪽 절반까지 그 가문에 할애하는 바이다. 그리고 더불어 내 직권으로 전하께 상신하여 ‘후작’의 작위를 내리도록 하겠다!”
방 안에 진중한 음성이 울려 퍼지고.
공작의 선언이 끝나자마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고위 귀족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후작?!”
“허어어…….”
“역시 공작 각하…….”
“언제나 상벌은 확실하시지.”
로건조차 살짝 눈이 커질 정도였으니, 요르단 공작의 선언은 모두의 예상보다 한 발 더 나간 포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단 한 사람만큼은 얼굴이 시뻘게질 수밖에 없었다.
“각하! 그럼 저는……!”
“아아, 로저. 자네도 걱정하지 말게. 비프로스 이상의 영지를 하사할 것이니, 굳이 옛 고토에 큰 미련 두지 말라고.”
“각하. 하지만……!”
“그만! 로저, 지금 내 말을 의심하는 건가?”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그럼 됐지, 무슨 부언이 그리 많아. 자, 좋은 날 조금이라도 기분을 내자고. 다들 잔을 드세!”
“예!”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의 웃음꽃이 피어나는 수뇌부 회의였다.
* * * 콰아앙!
“빌어먹을! 뭐? 다른 영지?! 그걸 말이라고!”
와장창창!
로저 비프로스의 분노는 좀처럼 수그러들지가 않았다.
결국 그가 화풀이를 멈춘 것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이 잔해만 남아 여기저기 휘날릴 정도로 폐허가 된 뒤였다.
후욱. 후욱.
“빌어먹을…….”
분노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것은 이 상황을 해소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연사 석궁은 토모도에서 노획한 물건들만 분석해도 개량품을 만들어 낼 수 있어. 놈들이 넘긴 설계도, 그게 하향된 성능이라는 걸 공작은 몰라. 멍청한…….’
말이라도 꺼내 볼까 했지만, 그런다 해도 대세가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리베라티오? 그 미친 물건이 문제인데 분명히 제대로 된 제작법을 넘기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다고 그걸 지적해서 맥라인을 공격해 봤자…….’
질투한다는 소리나 듣겠지.
이래저래 외통수로 몰린 상황.
처음 원수가 아군으로 들어온다고 했을 때, 그때보다 황당한 기분을 느낄 수가 있을까 했었는데.
이 순간 그는 그때보다 더한 황당함과 막막함을 느끼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이대로 내전이 끝나선 안 돼.”
스스로 내뱉고도 움찔할 수밖에 없는 말.
다급하게 마나를 끌어 올려 혹시나 들은 이가 있을까 사방을 살핀 후에야 그는 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불쑥 내뱉어진 그 말은 생각하면 할수록 맞는 말 같았다.
고민에 잠긴 로저 비프로스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
“아슬란을 불러. 그리고…….”
늦은 밤, 로저 비프로스의 진영에서 아무도 모르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