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33)
133화왕국에서도 수도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하룬 성은 왕국 최대 규모인 그란디아 평야에서 산출된 식량이 성 내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최대의 곡물 생산지이기도 했다.
1왕자파는 그 하룬 성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노렸지만, 또 한 번의 대회전에서 큰 피해를 본 이후에는 어떤 도발에도 흔들리지 않고 수성만 하고 있었다.
견고한 성, 무시 못 할 병력. 아무리 우위를 점했다고 한들 막대한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점령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2왕자파의 주력 귀족, 변경백들은 그중 누구도 그 희생을 감당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혹시나 피해는 볼 대로 본 상황에서 다른 자가 1왕자와 후안 더글라스 공작을 잡는 데 공을 세운다면 자신만 개털이 될 테니까.
그리고 요르단 공작 또한 우세한 상황에서 억지 모험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 수도 있다.
고립된 성안에서 식량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면 승리가 보이는 상황이니 더욱 무리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자연히 전선이 다시 고착화되며 전쟁이 지지부진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하룬 성 밖에서 진형을 고수하며 성을 반포위하고 있는 2왕자파에게 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하룬 성은 포기하고 그랑으로 가 즉위식을 치릅시다. 하룬 성만 남겨 놓고 주변의 모든 성을 정리해 버리면 제 놈들이 어쩌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물론 그것은 당위성은 물론, 회군 시에 벌어질 수 있는 기습의 위험성이나 전선의 유동성을 고려하면 그저 헛된 바람에 불과할 뿐이었다.
양 파벌의 수뇌부가 모두 침묵하고 있던 그 시기.
전쟁의 변화는 전혀 엉뚱한, 그러나 어쩌면 당연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 * *
“필립이 이끄는 상단으로 위장한 보급 부대가 무사히 전선에 도착했다는 보고입니다.”
“벌써요?”
“2왕자 측에서 군량을 대 주는 게 컸습니다. 식량은 따로 수송할 필요가 없으니 규모가 확 줄어 그만큼 기동성이 높아진 모양입니다.”
“탄창과 리베라티오뿐이라고는 해도 양이 상당할 텐데요?”
“필립이 자신이 아는 지름길이 있다고 하더군요. 국내 3대 상단 중 하나가 개척한 상행 루트라는데…….”
“호오. 형님이 끌어들인 인재라 역시 다르군요.”
드웨인은 로니안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뭐 가신으로서야 주군의 자제들이 사이가 좋은 것이 나쁠 리 없었지만, 눈앞의 이공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가 과했다.
영지의 좋은 일만 있으면 대부분은 결국 ‘형님 덕분에…….’로 이어졌으니, 우애를 넘어서 거의 신앙 같은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드웨인은 새삼 그것이 신기해서 넌지시 딴지를 걸어 봤다.
“필립이 뛰어난 건 사실입니다만, 그게 꼭 대공자님 덕분은 아니죠.”
작은 공자의 시선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데미안 나달이라는 행정관 덕분에 영지 운영 자체가 훨씬 편해졌다고 말하는 것은 행정관님이셨습니다. 그 사람도 형님이 데려온 사람이고요.”
“인재를 뽑다 보면 대박이 걸리기도 하고 쪽박이 걸리기도 하는 거죠. 대공자님의 능력이라기보다는 그저 운이…….”
“드웨인 행정관님. 지금 형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가요?”
칼같이 자르고 들어오는 말. 붉은 눈에서부터 스산하게 번지는 살기.
드웨인은 소름이 오소소 돋기 시작한 팔뚝을 쓸어내리며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럴 리가요! 대공자님께서 인복이 넘친다는 말이었습니다. 암요. 그렇고 말고요.”
“……형님께서 사람 보는 눈이 높으신 거지요.”
아무리 그래도 운도 좀…….
드웨인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황급히 털어 버리며 다시 말을 돌렸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운 내부에 시장이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외부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아무래도 다른 성보다는 타운 내부에 치안 병력을 더 투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뽑기 시작한 신병들은 아직 훈련소죠?”
“예. 설령 훈련을 마친다 해도 제대로 업무 수행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씁. 뭐, 어차피 정규 병사는 이미 한계치에 달해 있으니 마을 자경단들을 훈련 겸 두 타운에 번갈아 투입하세요. 물론 수당은 따로 챙겨 주시고.”
“그리하겠습니다.”
이공자님도 확실히 꼼꼼하시단 말이지.
형제가 모두 검술 천재에 지성도 뛰어나고.
대체 이 영지는 얼마나 큰 복을 받은 건지.
드웨인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마지막 서류에 인장을 찍은 로니안이 그가 돌아서기도 전에 먼저 책상에서 일어섰다.
“또 하마르에게 가십니까?”
“당연하죠. 형님이 각별히 챙기라고 하셨는데.”
“그렇다고 매일 가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전선에서 들려오는 영지의 활약은 다 연사 석궁과 리베라티오 때문입니다. 그 생산의 핵심이 하마르인데 어찌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편한 점은 없는지 계속 살펴야지요.”
“과연 훌륭하십니다.”
“뭘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요.”
* * * 콜록. 콜록.
“힘들어 뒈지겠네. 하마르 님, 오늘도 작은 공자가 올까요?”
“독종이야, 독종. 지 형보다 더해. 매일 감시라니……. 절대 게으름 피우지 말고 라인 관리 잘해! 자기 형을 닮았다면 이상이 생기는 순간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말을 뱉은 하마르와 옆에 있던 테마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꼼수 한 번 걸렸다가 6개월 동안 휴가를 빙자해 ‘드워프의 낭만’이라 이름 붙여진 무기 생산 작업에 시달렸다는 하마르의 일화는 이미 드워프들에게 유명한 것이었으니.
테마르는 갈고리 손으로 소름이 돋은 팔뚝을 벅벅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철저히 감시하겠…….”
“이거 미안하군요. 저는 그냥 응원차 방문하는 것뿐이었는데.”
“헙!”
“자, 작은 공자!”
대화를 나누던 두 드워프가 거의 자기 키만큼 펄쩍 뛰어올랐다.
갑자기 나타난 붉은 머리의 귀공자.
하마르의 가슴속에 화인처럼 남아 있는 누군가보다는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 무섭기 짝이 없었다.
“하. 하. 하. 우리는 그냥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거였습니다. 그렇지 테마르?”
“그, 그렇습니다, 작은 공자님. 그냥 열심히 공방을 돌리면서 영지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마음, 그뿐입니다.”
“…….”
“…….”
“…….”
어색한 시선의 교차.
이내 로니안이 피식 웃으며 하마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드워프들에게는 믿기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
“전쟁도 지지부진한 상태라고 하니 휴식 시간을 좀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동안 너무 일만 시킨 듯하군요.”
“가, 감사하…….”
퍽!
“……컥. 왜, 왜요?”
“하하하. 작은 공자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 영지를 위한 일인데 이 중요한 시기에 휴식이라니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테마르는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친 하마르가 내뱉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인간이 뭘 잘못 먹었나 싶은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
그 표정을 보며 하마르가 두 눈을 부릅떴다.
‘덥석 받아들이는 순간 그 휴가는 지옥이 된다. 이 붉은 눈의 종자들은 악마야, 악마! 절대 낚이면 안 돼!’
악마의 동생이 눈을 말똥말똥 뜨고 지켜보고 있으니, 하마르는 말로는 할 수 없는 진심을 눈으로만 토해 낼 뿐이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그의 간절한 텔레파시는 테마르에게 닿지 않은 것 같았다.
“기껏 쉬는 날을 주신다는데, 왜……?”
하. 이런 답답한 놈을 봤나.
좀 전까지 하던 이야기를 다 까먹은 듯한 테마르 때문에 가슴을 치는데.
“며칠 정도 쉬세요. 시장에 여러 가지 볼거리나 먹거리도 생겼다는데 구경도 좀 가시고요.”
“……진짜……요?”
“그럼요. 1차 보급분은 잘 도착했고, 필립 공이 돌아올 때까지 아직 2차 보급은 여유도 있으니까요.”
“진짜, 진짜입니까?”
“그렇다니까요. 속고만 사셨나.”
어. 네 형한테 늘.
하마르는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진심을 입 밖으로 토해 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가, 감사합니다! 이놈아! 너도 숙여!”
“전 아까부터…… 아이 씨.”
감격한 표정으로 연신 허리를 숙일 뿐.
“아. 다만 저, 아니면 기사들과 같이 다니셔야 합니다. 하마르 공은 이미 우리 영지에서 가장 중요한 인재이니까요. 몸을 아끼셔야 합니다.”
말은 또 얼마나 이쁘게 하는지.
하마르는 이 작은 공자가 악마 같은 형과는 전혀 다른 천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 * *
물론 하마르가 바로 첫날부터 완전히 마음을 놓고 휴가를 즐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악마의 동생이니까 함정일 수도 있어.’
미약하게 남은 경계심이 행동을 조심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미 타운 내에 크게 들어선 시장에서 판매하고 있는 각종 먹거리들과 맥라인에서 찾기 힘들었던 맥주가 입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의 경계심은 풀리기 시작했고.
3일째가 돼서는.
“작은 공자! 새롭게 생긴 꼬치 가게가 있던데, 그게 맥주 안주로 아주 그만이오. 오늘은 거기부터 시작합시다!”
아예 영주관에서부터 로니안을 끌고 시장으로 출근을 시작한 하마르였다.
등에는 무려 직접 만든 오크 통을 지게 같은 기구에 올려 짊어지고 있었다.
거의 자기 덩치만 한 크기의 휴대용 오크 통의 뚜껑에는 짚(Straw)을 말린 것을 가공해 만든 대롱이 하마르의 입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그는 등 뒤의 오크 통과 연결되어 상시 맥주를 마실 수 있게 만들어진 이 물건을 빨대(Straw)라고 부르며 애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니안은 그 쓸데없이 과한 창의력에 감탄을 표하는 대신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 발을 뺐다.
“으음. 너무 이른 시간이 아닌가요?”
“무슨 소리요? 시장이야 당연히 아침이 제일 바쁘지!”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거야 준비하는 상인들 얘기였다.
로니안이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하마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마르에게 끌려 시장의 노점을 전전하는데, 어느 순간 로니안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포스유저?’
포스를 무언가로 살짝 가려 놓은 듯한 느낌의 남자가 그의 근처를 스쳐 지나간 것.
로건만큼 초월적인 감각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로니안 역시 포스코어의 수련자.
순수하기 그지없는 에너지의 집합체, 포스코어는 이질적인 느낌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했다.
차라리 지금 지나간 행상이 일반적인 포스유저였다면 오히려 로니안의 이목을 끌지 않았을 것이다.
‘모종의 수단으로 포스를 가리고 행상 행세라.’
나른하게 늘어졌던 신경이 곤두서자, 그때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그의 감각에 하나둘 걸려들기 시작했다.
‘전면에도 하나. 뒤쪽에 둘.’
그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놈들은 하나가 아니었다.
“이야, 이 고기 정말 맛있는데? 이게 뭐요? 쥐? 에이, 설마 찍찍 그 쥐? 으웩! 미리 말을 해 줘야지!”
“당신이 그냥 처먹었잖아! 돈 내!”
로니안은 노점상과 입씨름을 하는 하마르의 곁으로 조금 더 다가섰다.
“작은 공자님! 이 드워프 양반이 글쎄…….”
며칠간 꽤 얼굴을 보인 까닭에 친근감을 표현하는 노점상.
그 뒤로 스쳐 지나가는 사내는 무려 포스유저 중급인 것 같았다.
“아아, 나도 봤어요. 하마르 님, 그냥 계산하세요.”
“작은 공자?!”
로니안은 그 ‘적’에게서 자연스레 시선을 거둔 채 태연히 응대하며 조금 더 하마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억울한 표정의 그를 이끌고 조금씩 티가 나지 않게 사람이 적은 시장의 외곽으로 이끌었다.
‘정말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 우리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 하마르를 주시해. 슬슬 하마르에 대한 소문이 날 수도 있고, 습격이나 납치 시도가 있을 수 있어. 그러니 어떠한 경우라도 보호해야 해.
형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면서도 이런 사태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수신호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타운 내에 배치된 병사와 기사들에게 보내는 신호.
“역시 외곽 쪽이 새로 장사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지. 좋은 선택이오, 작은 공자.”
다행히 시장 음식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 버린 하마르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시시덕거리며 꼬치구이를 또 하나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빨대를 쭉쭉 빨아 맥주를 들이켠 드워프의 표정은 이미 조금씩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하마르의 얼굴에서 함박웃음이 거의 사라지지 않고 있을 때 즈음.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