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43)
143화달이 환하게 떠오른 밤.
전란에 시달리는 나라답지 않게 수도 그랑의 밤은 고요하기만 했다.
고풍스러운 저택의 창문 너머로 그런 그랑의 밤거리를 내려다보던 장년의 남자가 어느 순간 인상을 찡그리며 돌아섰다.
“누구냐!”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깔리는 기세.
왕국 최강의 오러유저가 만들어 낸 맹렬한 기세가 사각을 통해 몰래 스며들던 그림자의 온몸을 칭칭 묶었다.
그러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새까맣게 차려입은 복면인의 입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니다, 스승님.”
“……로건?”
황당한 목소리와 함께 기세가 풀리자마자 그림자는 바로 복면을 벗었다.
벗겨진 복면 안에서 갈색 머리, 갈색 눈동자의 로건을 본 펠릭스 에스페란자 공작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냐, 그 꼴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야 할 일이라서 말입니다.”
“허……. 이런 짓에 쓰라고 귀신 그림자를 가르친 것이 아닌데?”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을 찾아왔구요.”
“쯧. 그래. 떳떳이 할 부탁은 아닌 게로구나. 도둑처럼 숨어든 것을 보니.”
혀를 찬 검공은 피식 웃으며 제자를 타박했지만.
“예. 떳떳하게 드릴 수 없는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이어진 제자의 말에는 안색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무슨 부탁이더냐?”
“우선 먼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 부탁을 들으신다면 화를 내지 마시고 한 번쯤 깊이 생각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뭔데 그리 거창한 전제를 깐단 말이냐, 너답지 않게. 그냥 말하거라.”
“3왕자님을 지키기 위한 제의를 드렸던 그때,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고 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거절하셔도 좋지만, 그 말씀대로 한 번만 깊게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자꾸 강조하니 점점 불안해지는구나.”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스승과 제자 사이에 흔히 있을 만한 부탁은 아닐 것이다.
그가 불길한 마음에 미간을 좁히는데.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서로 간만 보던 1, 2왕자 파벌의 주력들을 본격적으로 충돌시키고 오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틈에 중립 세력을 모아 쇠락한 파벌들의 뒤를 칠 생각입니다.”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스승님께서 그 구심점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본격적으로 나온 제자의 부탁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심각해져만 가는 국내의 상황에 심화만 쌓여 가던 차였다.
그런 심화에 기름을 끼얹는 제자의 부탁에 검공은 놀랐고, 또 그만큼 크게 실망했다.
“나더러 이 전쟁에 끼어들라는 말이구나.”
“……예.”
“나는 이미 왕위 계승전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맹세했다. 그것도 네가 그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를 해서! 그새 까먹은 것이냐?”
“그때는 상황상 그것이 가장 좋았기 때문입니다. 3왕자님을 지키기 위해서는요. 그리고 지금 제가 드리는 부탁 또한 궁극적으로는 스승님이 지켜야 하는 3왕자님을 위한 부탁이나 다름없습니다.”
“뭐?”
“저는 3왕자님을 왕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스승님께서 도와주시던, 도와주시지 않던 간에 말입니다.”
검공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것 아닌가 싶었지만, 제자의 진심 어린 눈빛을 보고는 곧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허……. 지금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냐? 네 말대로 된다면 맥라인에선 양 파벌의 공격을 막아 내야 할 텐데?”
“스승님이 도와주신다면 쉽게, 아니라면 좀 어렵게 되겠지요.”
“……뭐?”
“최악의 경우라도, 저와 가문의 모든 것을 갈아 넣는다면 파벌의 와해까진 힘들어도 1, 2왕자의 목을 칠 자신은 있습니다.”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로건의 말에, 검공의 표정이 일변했다.
“불경하다! 로건!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스승님이 도와주신다면 그 길이 훨씬 편해지고 피도 덜 흐를 테니까요.”
“허어…….”
“어차피 제 계획대로 된다면 왕손인 1, 2왕자의 자식들이 모두 어린 지금, 왕실법에 따라 3왕자님에게 왕위가 돌아가겠지요. 그리고 그때가 되면 스승님은 그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파벌들과 싸워야 할 겁니다.”
담담한 제자의 표정에, 검공은 그 일이 정말로 사실이 될 것 같아 섬뜩함을 느꼈다.
“지금 네가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현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자의 말을 듣자 답답한 마음에 혼란이 더해졌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도 안 된다. 나는 이미 맹세를 했고, 그것을 어길 생각이 없다.”
“그렇게 대답하실 줄 알았습니다.”
“뭐?”
“그래서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나라가 완전히 망가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맹세를 다시 고려해 주셨으면 해서요.”
“네가 지금 감히 뭐라……?!”
검공이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로건은 흔들림 없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스승님의 명예가 얼마나 무거운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나라의 운명보다는 가볍지 않겠습니까. 스승님, 지금의 상황을, 이 나라를 봐 주십시오.”
“……실망이구나, 로건. 돌아가거라.”
“스승님!!”
“너는 지금 내 삶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
검공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로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내 말 한마디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섰다고 생각하느냐? 요르단이나 후안 놈이 바보라서? 아니면 이 내가 평생을 일궈 온 힘이 그냥 무시해도 괜찮을 정도로 하찮아서?”
“그건…….”
“명예란 그런 게 아니다, 로건. 쉽게 바꿀 수 있는 말 한마디를 안 바꾸는 고집을 명예라고 하는 것이 아니야! 명예란 내가 평생을 걸어온 삶, 그 삶 자체를 말하는 거다.”
“스승님…….”
잠시 숨을 고른 검공이 말을 계속했다.
“나는 한평생 내 입으로 내뱉은 말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왔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살아왔어. 만약 중요한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려고 노력했고, 결국엔 지켜 왔다.”
“……”
“칠십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나이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모두가 내 말을 믿었다. 설령 바라보는 길이 다르다 해도 내 말을 존중했고 그것이 다시 내 힘, 내 명예가 되었다. 그게 내 삶이고, 내 삶이 곧 명예다.”
“하지만…….”
로건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검공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막았다.
“내가 한 맹세를 스스로 바꾸라는 것은 단순히 말 한마디를 바꾸는 게 아니야! 여태껏 살아온 내 인생을 부정하고, 깨트리라는 말이다. 알겠느냐?”
“스승님!”
“나라고 어찌 나라가 망가지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이 좋을까. 네 말대로 내 명예를, 인생을 무너트려 나라를 구할 수 있다면 망설일 이유도 없겠지. 그런데 그게 되겠느냐는 말이다! 나는 전혀 답이 보이지 않는데, 너는 무엇을 보고 그리 확신하느냐?!”
길게 내뿜는 한숨 속에 그동안 숨겨 왔던 가슴속에 들끓는 심화가 배어 나왔다.
그 끓어오르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낀 로건은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 놨던 진실의 일부를 토해 냈다.
“확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님. 그저 해야 하는 것이죠.”
“그게 왜…….”
“어떻게 해서든 이 내전을 빨리 끝내고 권력에 눈먼 종자들을 걸러 내지 않으면 이 나라가 제국에게 먹힐 테니까요”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스승의 표정이 당황으로 얼어붙었다.
“선왕 폐하의 죽음. 이상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제국이 했다는 증거는 전생에도, 현생에도 없었고.
“그분의 죽음 뒤에 그랑 노블레스에서 일어난 일. 지나치게 빠른 내전의 점화. 이상하지 않으셨습니까?”
몇몇 자신이 벌인 일을 덧붙였으며.
“저는 얼마 전에 제국에 잠행을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확신했습니다.”
이 역시 시골에 미래의 적이 될 마도사 하나를 조지러 갔을 뿐이지만.
“제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이 말만큼은 진실이었다.
그가 회귀 이후 벌여 왔던 모든 무리수의 끝.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막고자 하는 일.
왕국민 대다수가 착취를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 가고, 왕국 전체가 제국을 위한 실험장으로 변해 버리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것.
그렇기에 로건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끌어다 대고 있음에도 떳떳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제자의 눈을 바라보던 검공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석연치 않은 점은 많았지. 하지만 네 말을 온전히 믿기에는 너무도 큰일이다.”
“당장 그것을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눈앞에 온통 어지러워지고 있는 나라만 봐 주십시오. 제게 이 나라를 최대한 빠르게 안정시킬 계획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좋아. 됐어.
불끈 주먹을 쥔 로건은 드물게 혼란스러운 감정을 드러낸 스승을 보며 차분히 말을 꺼냈다.
그가 생각해 온 계획을.
그리고 3왕자를 왕으로 만들어 이 나라를 갱생시키고자 하는 큰 그림을 하나의 숨김도 없이 모두 말했다.
그것으로 스승을 설득할 수 있기를 바라며.
하지만 그의 긴 설명을 들은 스승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참의 침묵 뒤 나온 말은 로건의 기대와는 너무 달랐다.
“……그래도 내게는 네 말이 내전을 더 심화시키겠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구나. 근거가 빈약해.”
“스승님…….”
“더구나 네 말대로 모든 게 이루어진다 해도. 요르단이나 후안 녀석이 1, 2왕자 전하를 끼고도는 것처럼, 너 역시 3왕자 전하를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겠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맹세를 깬 나는 뒷방 늙은이로 만들고 말이다.”
“……예?”
아예 없던 생각은 아닌지라, 마음의 빈틈을 찔린 로건이 조금 늦게 반응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한 박자 늦게 그 실수를 통감하며 입술을 깨물었지만, 검공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단호했다.
“다르다고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다르지 않다.”
“스승님!”
“후안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원래 그런 놈이었지만, 요르단 녀석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너와 가까웠지.”
“……그게 무슨?”
“언제나 패기만만하고 자기 뜻대로 사람을 움직일 줄 알았다. 그리고 항상 이 나라의 바람직한 개혁 방향을 말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때의 요르단 녀석은 진심이었지.”
생각지도 못했던, 너무도 당황스러운 말에 로건이 할 말을 잃었을 때.
“녀석이 변한 것은 공작의 위를 잇고, 자신의 딸이 왕자를 낳은 후부터였다. 권력이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는 말, 그 말이 그리 실감 나게 다가온 것도 녀석 때문이었지. 그런데 너는, 너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어찌 확신하느냐?”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그것을 어찌 확신하느냐는 말이다.”
“저는 그런 쓰레기들을 많이 봐 왔으니까요.”
“뭐?”
이번에는 로건의 대답이 검공을 당황하게 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잃을 것도 많은 법이다.
많은 것을 가짐으로써 삶이 평안해지고 즐거워질수록, 그것을 잃는 일이 무서워진다.
그렇기에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종종 무리수를 두기도,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평범한 사람이 악인이 되어 가는 가장 흔한 과정.
타락.
더구나 본인이 그것을 무마할 만한 힘이 있는 사람일수록 그렇게 타락하기가 쉬운 법이었다.
‘요르단 공작도 그런 쪽이었다는 것은 놀랍지만.’
전생의 로건은 그런 귀족들을 무수히 봐 왔다.
자신의 손익을 위해 타인을 해치지 않는 것.
일반인에겐 당연한 관념이, 힘을 가진 인간일수록 흐릿해졌다.
그리고 로건은 용병으로, 독립군으로 사회의 음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이.
그런 이들에게 지독하게 시달리며 살아온 자였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미래를 모르는 만큼, 제가 변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만약 제가 변한다 해도 그 방향이 스승님이 말씀하신 쪽은 아닐 겁니다.”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혐오하는 것을 닮아 가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로건의 눈동자에 반짝이는 빛이 또렷한 진심을 전했다.
그 눈을 바라보던 검공이 결국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요르단 녀석도 그 비슷한 말을 했었다.”
“……예?”
“만약 네 말대로 되더라도 넌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뭐, 그리 쉽게 변할 놈 같지도 않고.”
꺼림칙한 말이 끼어 있었지만, 스승의 어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것을 느낀 로건이 주먹을 불끈 쥐는데.
이어지는 말은 그의 기대와는 달랐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확신이 들지 않는구나. 네가 말한 일이 내 맹세를 깰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스승님!”
“내 도움이 없어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증명해 보거라. 적어도 내 너를 방해하지는 않을 터이니.”
“하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3왕자님을 왕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분의 의중도 여쭤봐야 하지 않겠느냐.”
“아…… 예. 그거야 당연……하지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로건이 어벙한 표정을 짓다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스승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은 내 저택에 와 계시다. 내가 다른 이의 눈을 피해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한번 그분의 의중을 여쭈어보거라.”
“……감사합니다.”
“그만 가 보거라. 내일 같은 시간 이 자리에 3왕자님이 계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너를 만난 적이 없는 것이다. 그 정도면 되겠지?”
그대로 몸을 돌리는 스승은 그 이상 말을 허락하지 않았고.
로건은 아쉬움 속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떠나간 지 한참 후.
“어떤 것이 정말 옳은 길인지 모르겠구나……. 만약 저 녀석 말이 맞다면, 나는…….”
짙은 탄식 섞인 한마디가 무겁게 내려앉으며 복잡한 검공의 심정을 대변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