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어차피 반반이었어. 괜찮아. 3왕자를 만나게 해 주시는 게 어디야. 스승님은 천천히 설득하면 돼.’
수도의 밤길.
지붕 위를 달리던 로건은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했다.
검공이라는 확실한 패는 손에 넣는 데 실패했지만, 그에게는 다른 써먹을 패가 있었으니까.
‘3왕자를 설득하는 거야 손바닥 뒤집기나 마찬가지고…….’
죽거나 평생 유폐될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왕이 될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모험을 해 볼 것인가.
보통 사람들도 웬만하면 후자를 택할 선택지.
로건이 보았던 3왕자라면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얻어야 할 것은 자신과 가문에 더해 그 3왕자의 힘이 되어 줄 세력들.
‘뜻대로 되어야 할 텐데…….’
그렇게 한참 동안 어둠 속을 달린 로건의 발길은 화려한 꽃들이 수놓아진 문양을 지닌 저택 안으로 이어졌다.
“이건 조건이 너무 엄청난데, 정말 지킬 생각이 있기나 한 건가.”
로버츠 플로이드 백작은 평상시라면 이미 숙면 중이어야 할 한밤중에도 잠들지 못하고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를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은 고작 얇은 종이 두 장.
전쟁으로 인해 비워질 변경백의 한 자리를 원하는 대로 주겠네. 우리에게 오게.
비슷한 내용의 또 다른 편지 한 장을 덮어 버린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전, 하룬 성에서 크게 충돌한 양 파벌의 피해가 양측 모두 제법 컸다는 소문은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의 여파가 바로 지금 그의 손에 들린 편지들이었다.
양 파벌이 이제 서서히 중립 세력들에게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공식적인 세력은 아니지만 가장 먼저 중립을 선언한 검공 덕분에 수도 근처, 그중에서도 특히나 에스페란자 영지 주변의 귀족 중 다수는 중립을 선언했다.
물론 그렇다고 1, 2왕자 파벌에 비할 만한 세력은 아니지만, 그들이 어느 한 편을 들면 균형을 기울게 하기에는 충분한 힘.
그랬기에 두 파벌에서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달콤한 조건으로 유혹하는 것은 또 얘기가 달랐다.
‘검공께서도 자체적으로 중립을 철회하겠다는 가문은 막지 않으실 거야. 강요라면 모를까.’
그리고 이런 상황이 되자, 불과 반년 전 자신의 ‘보물’을 빼앗아 간 놈팡이 놈이 남긴 말도 다시 떠올랐다.
“최대한 중립을 지켜 달라고 했었지. 이걸 예상한 걸까? 에이, 설마…….”
“예상한 것 맞습니다.”
“헉!”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로버츠 플로이드가 그야말로 펄쩍 뛰어올랐다.
“누, 누구냐!”
그리 강하지는 않지만, 명색이 포스유저로서 평기사급 실력은 가진 그였기에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택에 펼쳐진 방어, 경보 마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하지만 이어서 들려온 목소리는 갑작스러운 난입보다 그를 더 놀라게 했다.
“접니다, 장인어른.”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검은 복면을 벗어들자 드러난 얼굴은 또 생소하기만 했다.
“로건 공자? 아니, 그 머리색…… 눈은 또 왜?”
“먼저 이렇게 예의 없게 찾아뵙게 된 것을 사과드리겠습니다. 남들 모르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어진 로건의 말은 로버츠 플로이드의 얼굴을 점점 굳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처음 나온 답은 그 표정대로 부정적이었다.
“확실히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하나, 이건 가문의 운명을 걸어야 할 일일세. 나로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기 어렵네.”
어렵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지만, 로버츠 플로이드의 낯빛은 어둡기만 했다.
만약 딸이 의탁한 가문이 아니었다면 당장 고개를 내저었을 것 같은 느낌이 다분한 어조.
하지만 로건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것은 중립 귀족들의 힘을 전부 모아도 미약하다 생각하시기 때문 아닙니까, 장인어른?”
“부인하지 않겠네. 게다가 자네가 굳이 중립 세력을 모을 구심점으로 나를 택했다는 것은, 펠릭스 각하께서는 이미 거절하셨다는 뜻일 테지?”
로버츠의 추측에 로건은 쓴웃음을 지었다.
“스승님은 제가 더 설득해 볼 생각입니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해 보이셔서요.”
“글쎄……. 그분이 하신 말씀도 있는데 과연 뜻을 거두실지…….”
안색이 더욱 어두워진 백작은 긴 한숨으로 답했다.
“큼. 아무튼. 설사 에스페란자 공작가가 나서 주고, 중립 세력을 죄다 끌어모은다고 해도 파벌 중 하나에 맞서기도 힘드네. 엄청나게 위험하다는 말이지. 심지어 지금은 그들이 꽤 급해졌는지 말도 안 되는 달콤한 조건으로 유혹하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도 그런 말을 하는가? 실제로 이미 파벌에 들어가 전선으로 향한 가문도 있어.”
“그 역시 알고 있습니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눈앞의 장인, 로버츠 플로이드 역시 2왕자 파벌에 합류하려 했을 테니까.
‘시기는 조금 이르지만.’
플로이드 외에 전생에 중립을 유지하지 않고 파벌의 유혹에 넘어갔던 가문들은 이미 다 출병을 확인한 후였다.
그러니 로건이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이었다.
놈들에게 붙을 만한 이들은 이미 모두 붙었으니.
“다만 장인어른께서 모르시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그 연합에 힘을 보탤 저희 맥라인의 전력이 변경백 둘, 혹은 셋 이상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전쟁에서 자네 가문이 활약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그건 좀…….”
“최근에는 칼리아 후작의 군대를 물러서게 만들기도 했지요. 물론 그 초인, 폭풍검이 함께한 정예였습니다.”
그나마도 영지에 남아 있는 전력은 포함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말까진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게 정말인가?”
과연 반색하는 백작은 직전과는 확실히 다른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다만…….
“에일렌 공녀도 현장에 있었습니다. 직접 물어보셔도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마 이제 곧 통신이 가능해지실 겁니다.”
“뭐, 뭣이?!”
“그게 확실하지 않겠…….”
“내 딸을 전쟁터에 끌고 갔다고?! 그것도 폭풍검이 있는 곳에?! 너, 너 이 미친 새……!!”
로건은 딸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대가로 한동안 식은땀을 흘리며 분노한 장인을 달래야만 했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백작이 진정한 후에는.
“그럼 맥라인과 에스페란자 공작 가문이라……. 거기에 남은 중립 귀족 세력을 더하겠다면 확실히 가능성이 있겠군. 적어도 가문이 날아갈지도 모를 절반의 도박을 하는 것보다는 나아 보여.”
“그럼……?”
“기꺼이 함께하겠네. 잘 부탁하네, ‘사위’. 아, 물론 이 모든 것은 검공 각하가 움직인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네.”
“……물론입니다.”
내전 발생 8개월 차.
아직 중립을 취하고 있는 귀족 중 그나마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는 플로이드 백작가의 가주, 로버츠 플로이드가 로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전날과 같은 경로, 같은 방식으로 스승의 저택에 진입한 로건은 예전에 비해 다소 초췌한 안색의 3왕자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등 뒤에서 들린 갑작스러운 목소리에도 3왕자는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복면을 벗은 로건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오랜만이군, 로건 경.”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일전에 한 약속을 지킬 때가 된 것 같아 찾아왔습니다.”
“하…… 약속이라…….”
파리한 안색의 왕자가 푸른 눈을 번뜩이며 로건을 바라보는데.
로건이 말을 돌리지도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날 말씀드렸던 대로 로저 비프로스를 처리하고 오는 길입니다. 이제 저는 왕자님을 이 나라의 군주로 만들어 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왕자님께서 원하신다면 말입니다.”
“음…….”
군주라는 말에 살짝 상기된 얼굴.
하지만 3왕자, 로저스 폰 그란디아는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후.
“나는 왕궁도 아닌 공작의 저택에서 칩거하며 보호를 받고 있고, 그대 역시 그 자랑스러운 핏줄을 감춰 가면서 이런 나를 만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그게 가능하겠는가?”
“가능합니다.”
일말의 지체도 없이 나온 로건의 대답에 왕자의 눈빛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1, 2왕자의 파벌은 서로 싸우는 데에 여념이 없기에 그 세력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줄어든 세력을 단숨에 끝장낼 만한 병력을 제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저희 가문의 힘은 중앙 전장에서 이미 증명됐습니다. 그리고 그 두 배 이상의 화력이 영지에 대기 중입니다.”
“허?! 그게 정말인가?”
단순히 두 배라고 말을 했을 뿐인데 눈을 번뜩이는 왕자의 모습.
‘전쟁의 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거지? 좋아, 바람직해.’
로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스승님을 설득해 중립 세력만 움직여 준다면, 시간이 지나며 줄어들었을 양 파벌의 잔여 병력쯤은 쉽게 쓸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결국 날 지지하게 할 것이다?”
3왕자의 눈빛이 점점 더 살아나기 시작했다.
“예, 그렇습니다. 어떤 귀족도 새로운 나라에서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기회를 마다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대의 스승이 돕지 않더라도 말이지?”
“맥라인은 이미 충분한 힘이 있습니다, 전하.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더욱 유리해질 것입니다.”
간단하지만 확실한 전략.
오랜만에 만난 3왕자의 얼굴에서 그제야 웃음꽃이 피었다.
‘지금 당장 계속해서 스승님을 설득하는 것은 역효과야. 이제는 돌아가서 간혹 통신으로 말씀드리는 게 낫겠지. 이제부터는…….’
로건은 그날부터 며칠간, 전생에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굳건히 중립을 유지했던, 그리고 결국 개털이 되어 몰락했던 중립 세력의 중진들을 은밀히 만나러 다녔다.
로건이 그리는 가장 확실한 계획을 이루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 * *
– 리베라티오와 연사석궁의 생산량을 최대로 늘려라. 자경단 훈련도 더 늘리고.
파벌의 탈퇴를 선언한 직후부터 로건이 영지에 주문한 일.
로건이 수도에 들렀다가 영지에 도착했을 때, 그 일은 이미 한창 진행 중이었다.
“석궁과 탄창, 리베라티오의 생산량은 기존의 1.5배 이상으로 늘렸고, 자경단은 이제 거의 2만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다만 수확기에 가까워진 시기에 훈련 시간이 늘어나 불만이 좀 있습니다만…….”
“그 정도는 괜찮아. 수고했다, 로니.”
“아닙니다, 형님. 당연히 제가 해야 했을 일인데요.”
로건은 몇 년 사이 꽤 듬직한 모습으로 자란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중앙 전선 소식은?”
“일주일 전 마지막 충돌 이후로 쭉 소강상태라고 합니다.”
“뭐? 왜?”
너무 이르다.
아직 그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보지는 않았을 텐데?
로건의 의문 어린 시선을 받은 로니안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저도 모르죠. 아마도 서로 병력을 추스르며 여력을 끌어모으기 위함이 아닐까요?”
“……뭐, 그렇겠지.”
조금은 찝찝했지만 여기서 전선의 상황을 완전히 들여다볼 수는 없다.
로건은 쓸데없는 걱정 대신 당장 가문의 전력을 확충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좋아. 우리가 없는 동안 참 잘해 주었다. 받아라, 이건 그 상이다.”
“예?”
“얼른 받아. 영지를 무사히 지킨 대가라고 생각하고.”
로니안의 눈길이 자신을 향해 툭 내밀어진 검에 닿았다.
검신에 음각된 룬어조차 화려한 장식으로 보이는 유려한 검신에 푸르스름한 냉기가 흘러나오는 검.
일견하는 것만으로도 꽤 고등급의 아티팩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월광의 기사 플란츠가 쓰던 검이야. 프리구스(Frigus)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더구나. 고대어로 냉기라는 뜻이다. 4클래스 급은 되어 보여.”
“이걸 왜 굳이 제게? 형님이 쓰셔도…….”
“룩스가 자연 마법을 각성했다. 그러니 난 필요 없어.”
“아……!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었군요! 와!!”
눈이 거의 두 배로 커진 듯한 로니안이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그래도 이건 제가 안 받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뭐?”
“그럼 형수님께 드리세요. 저는 이 마네(Mane)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혹시 모르죠. 마네도 룩스처럼 자연 마법을 각성할지.”
룩스는 드워프 대장인의 혼이 들어간 명품. 그 하위 형태라고 할 수 있는 마네는 룩스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하마르가 의도해서 또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모를 동생이 아니건만.
“이건 우리가 없는 동안 가문을 지켜 낸 공을 생각해 주는 거다. 네가 써도 돼.”
아슬란이 아버지에게 뺏긴 벨로치타스 대신 사용하던 한 등급 낮은 검은 이미 헤인켈에게 주었다.
로건은 당연히 이 검은 로니안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모든 가신들이 같이 받아야지요. 제가 아니라.”
“허, 이 녀석…….”
“말씀드렸듯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맥라인의 차기 안주인이 되실 형수님의 안전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그건 너……. 흠.”
“예?”
“아니, 아니다. 뭐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리하는 게 낫겠지.”
약혼녀라는 것을 떠나, 에일렌 역시 초인이 될 가능성을 가진 인재.
로니안이 아니라면 에일렌에게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 왠지 웃고 계시는데요, 형님? 역시 형수님 생각에…….”
“네가 대견해서 그런다. 인마!”
피식.
이제는 정말 어찌 될지 모르는 미래.
다가오는 혼란을 예감하면서도 로건은 잠깐이나마 후련하게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