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55)
155화
“이런……!”
백금발 머리 청년, 1왕자 로히터 폰 그란디아의 옆에 있던 기사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젊은 얼굴인데도 확연하게 빛나는 붉은빛 포스블레이드를 보니, 2왕자파가 숨겨 놓은 비밀 전력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변수가 될 만한 강자는 아니었다.
“박살 내!”
무표정하게 소리친 로건의 지시에 따라, 가까이 있던 기사들의 손에 들린 붉은 돌이 갈라진 허공의 틈새로 우박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꽈아아아아앙!
본진을 돌파할 때 거의 쓰지 않았던 마법 폭탄 수십 개가 엄청난 굉음을 내며 일시에 터졌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본래대로라면 사방으로 터져 나갔어야 할 충격파까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 결계가 다 받아 냈고.
그 안에서 충격파가 반사되어 폭발력이 자체적으로 증폭되는 효과까지 있었다.
결국 투명한 결계가 모두 사라지고 폐허가 된 막사가 모두의 시야에 나타났을 때.
로건은 숯덩이가 된 시체들의 가운데서도 옅은 화상만 입고 살아난 1왕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다른 기사나 마법사들이 충심으로 감싸 안은 결과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무의미할 뿐이었다.
“목숨 한번 질기군.”
“가, 감히……. 이놈! 썩 꺼져라!”
그 황당한 반응에 조금 놀려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포위망을 구축한 적군 병력이 움직이려는 낌새가 보이고 있었다.
스각.
로건은 구구절절 시간 끌 생각도 없이 1왕자의 목을 단칼에 날려 버렸다.
허무하게 바닥을 구르는 1왕자의 머리.
로건이 그 목을 칼끝에 꽂아 들어 올리며 크게 소리쳤다.
“로히터 폰 그란디아의 목을 잘랐다!”
부언은 더 필요 없었다.
내전이 끝나고 왕으로 올려야 할, 그 구심점을 잃은 1왕자 군은 그 외침 하나만으로도 공황 상태에 빠져들 테니까.
그런데.
– 잡아 죽여! 맥라인의 목을 가져오는 자! 더글라스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1억 골드를 보상하겠다!!
무슨 마법인지 갑자기 전장 전체에 울려 퍼진 분노한 목소리가 아주 잠깐이나마 전장을 적막에 잠기게 했다.
구체적인, 그리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현상금.
“멍청한 소리를.”
로건은 비웃음을 날리며 혀를 찼다.
최소한의 머리가 있는 자라면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그 허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전을 일으키게 한 구심점이 사라진 더글라스 공작가가 과연 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아 있을지.
설령 남아 있다고 한들 과연 그런 보상을 할 여력이 있을지.
그리고 최선의 최선을 가정해도, 그때 공작이 정말로 그런 거금을 줄 마음이 있을지.
어느 모로 생각해 봐도 후안 더글라스의 외침은 분노를 참지 못한 발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 광기 어린 전장에서 차분하게, 여유를 가지고 사고를 이어 갈 수 있는 소수의 생각일 뿐.
“우와아아아!”
“공격해!”
“빨간 머리! 빨간 머리다!”
그들을 잡기 위해 포위망을 구축하려던 1왕자 군에게는 그저 인생을 바꿔 줄 보물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다수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공작가는 왕실과 다름없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권력의 상징 같은 것이었으니까.
눈이 뒤집힌 것처럼 광분하며 달려오는 병사들의 모습에 자신의 착각을 깨달은 로건이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 했다.’
최근 들어 새삼, 자신이 그리 똑똑하지 않다는 것을 본의 아니게 자꾸 느끼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아이기스 성에서 연사 석궁을 든 자경단과 일반 병사들이 성문을 통해 줄줄이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 정도.
에스페란자 기사단과 자신들이 만들어 낸 성과에 파벌의 정예들이 회군한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로건은 더욱 쉽게 결심할 수 있었다.
일이 어떻게 꼬이건 간에.
“이대로 2왕자 군을 친다! 깃발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라! 성의 병력 역시 2왕자 군에 집중시켜!”
2왕자만 없애면 이 전쟁은 끝난다.
“대공자님, 하지만 지금 주변에 1왕자 군들이…….”
“이쪽은 우리 힘만으로 돌파한다! 석궁기마대는 뭉쳐서 사방 경계! 접근하는 놈들을 모조리 쏴 버리고 기사단은 나를 따라 길을 뚫는다!”
“예!”
다소 무모한 결정일 수도 있었다.
큰 희생이 따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이것으로 모든 걸 끝낼 수 있다.
그러니.
“로건, 2왕자 곁에는 요르단이 있을 거다. 놈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어.”
“그래도 어떻게든 해낼 겁니다.”
‘어떤 위험도 감수한다.’
로건은 어쩌면 자신도 전장의 광기에 물들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은 1왕자 군의 본진을 향해 진군할 때와는 또 달랐다.
쩌어억.
“아아악!”
“괴물 새끼!”
“죽어!”
황금빛 거검이 지면을 가로로 가르고 순식간에 수십의 시체를 양산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기세.
하지만 그 시체들의 뒤에 있던 병력은 겁도 없이 다시 로건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면에서 꾸역꾸역 밀려오는 남, 자작가의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뒤에는 뒤처지는 자의 목을 날려 버리는 발터마임 기사단의 기사들이 있었다.
압도적인 수를 자랑하는 왕국 최’대’의 기사단.
최’고’의 기사단 에스페란자와 격돌하던 이들의 반수 이상이 로건과 맥라인 정예의 앞길을 막기 위해 아이기스 성에서 반전하여 투입된 것이다.
그것도 더없이 비열한 수법을 동원해서.
전면에서 압도적인 무력으로 길을 뚫던 로건조차 나아가는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하자, 그 뒤를 따르던 맥라인 기사들 역시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로건은 결국 최후의 수를 꺼내 들었다.
“리베라티오 사용을 허가한다! 최대한 길을 뚫어라!”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 두었던, 기사들이 대여섯 개씩밖에 챙기지 못한 마법 폭탄에 대한 사용 허가, 아니 사용 권장 명령이 떨어졌다.
“커어억!”
적의 목을 쳐 날리는 순간, 맥라인의 기사 로젤리오는 자신의 가슴을 파고드는 적의 검을 느꼈다.
‘수가 너무 많아……. 젠장.’
다행히 이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는 것을 보니 심장은 살짝 비껴간 것 같았지만, 전투를 지속할 수 없는 치명상.
더구나 더욱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은빛 갑옷에 그려진 불꽃 문양, 그 안쪽에 넣어 둔 마법 폭탄들이 그 충격에 일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 게 느껴진다는 것.
다른 동료들이 움직이기 편하게 서너 개 정도만 챙긴 것에 비해, 그는 열 개가 넘는 리베라티오를 챙긴 상황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이것들이 폭발한다면…….
‘동료들도 다 죽는다.’
– 욕심부릴 게 없어서 그것도 욕심부리냐?!
– 흉갑 불편해지면 폭탄 쓰기도 전에 칼 맞고 죽는다.
– 그 전에 가슴 공격당하면 끝 아냐? 우리가 당할 정도면 기사의 공격일 테고, 그 정도 충격을 받은 흉갑의 압력이면 연쇄 폭발 일어날 텐데. 으으, 로제. 너 그러면 적 끌어안고 자폭해라. 우리랑 같이 죽지 말고.
오랜 세월 그와 함께했던 친우이자 동료들의 악담이 연달아 떠올랐다.
‘썩을……. 리오, 이놈. 혓바닥 조심하라니까. 진짜 그렇게 됐잖아.’
“로제!”
평상시에는 그렇게도 듣기 싫던 장미(Rose)라는 애칭이 유독 더 짜증스럽게 들렸다.
그 안에 담긴 안타까움이 여실히 느껴져서 더더욱.
하지만 그 덕분에 로젤리오는 간신히 힘을 짜낼 수 있었다.
절로 무너지려는 육체에 억지로 힘을 더한 그가 친구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지 마!!”
가슴에 박힌 검을 빼면 그대로 힘이 빠져 무너질 것 같아, 로젤리오는 목이 날아간 적의 시체를 끌어안고 그대로 적진을 향해 뛰어들었다.
“아들을 부탁한다, 리오!!”
생에 마지막 고함을 질러 보지만, 핏물이 같이 터져 나오는지라 목소리가 제대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다. 설령 듣지 못했더라도 리오는 아들을 돌봐 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전쟁에 나서면서 서로 약속한 것이었으니까.
가문에서도 챙겨 줄 것이라 생각은 하지만, 맥라인의 기사가 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그로선 가문보다는 친구가 더 믿음직했다.
그는 가문에 충성한다기보다는 동료를, 친구를 버릴 수 없기에 이 무모해 보이는 전쟁에 참여한 것이니까.
‘부탁한다. 리오.’
시야가 어두워졌는데도, 마지막으로 떠올린 아들의 얼굴은 선명했다.
‘미안하구나, 러셀.’
남겨진 아들에 대한 사과와 동시에.
그의 몸을 중심으로 반경 수십 미터를 뒤덮는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꽈아아아아앙!
“으아아! 이 개자식들아!!”
기사단 내에서 인망이 높았던 로젤리오의 죽음을 시작으로.
몇몇 맥라인의 기사들은 자신이 죽을 것 같으면 아예 적을 붙들고 자폭을 택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독기 어린 눈으로 달려들던 적들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의 위로 마법 폭탄들을 연달아 던져 대기까지 하자 주춤하던 맥라인의 진격은 다시금 속도를 받기 시작했다.
그때, 패드릭이 속력을 높이며 앞으로 나섰다.
“로건. 잠깐 물러서라. 어떻게서든 길을 뚫어 주마!”
“아버지?”
“저기 요르단 놈의 회색 대가리가 보인다. 놈의 목을 자를 놈은 너밖에 없으니…… 으라압!”
쩌어억.
본인의 한계를 넘어 1.5배는 더 높이 솟구쳐 오른 붉은 포스블레이드가 전면의 적을 양단했다.
“넌 힘을 아껴라! 반드시 놈 앞으로 보내 주마!”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 지쳐 가는 몸.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손.
패드릭의 모습은 이미 탈진 직전처럼 보였다.
그 와중에 주변에는 온통 적들뿐.
이 와중에 아군 최강자인 자신이 손을 쉬라고?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지만.
“우리를 믿으십시오, 대공자!”
“단장만큼은 못해도!”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
프람버. 엑토르. 제이디.
맥라인의 가장 오래된, 중년의 수위기사들.
헤인켈과 패드릭의 사실상의 제자나 다름없는 이들이 연이어 가주의 옆에 섰다.
“길을 열어 드리겠소!”
중급의 경지에 불과한 기사들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들 모두가 패드릭 못지않은 기세를 보였다.
“차아압!”
우렁찬 기합과 함께 붉은빛 포스블레이드가 전력을 다해 전면을 가르면.
“으랏차!”
“여기도 있다!”
중년 기사들이 몸을 내던지다시피 하며 그 허점을 메웠다.
3인방의 몸에는 상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갔지만, 그 덕분에 기사단의 전진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물론 안타깝게도 호기만으로 꿈이 현실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패드릭이 말했던 요르단의 얼굴이 정말로 눈앞에 보일 때쯤.
그들이 가진 리베라티오가 거의 떨어져 간다는 것을 눈치챈 2왕자 군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후미에서는 1왕자 군이 쏟아지는 쿼렐의 비를 뚫고 접근해 오고 있는 상황.
사실상 적진 한가운데 포위망이 완성되어 버린 것이다.
로건이 이를 악물며 다지 전면으로 나서려고 하는 그때, 패드릭은 보았다.
피식.
요르단이 실제로 비웃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착각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네놈 얼굴이 구겨지는 걸 봐야겠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아 오르는 분노와 함께 패드릭은 칼을 뒤로 돌렸다.
“로건!!”
“예?!”
어리둥절한 아들의 시야 위로.
패드릭은 평평하고 납작하게 변형된 포스블레이드를 들어 보였다.
평상시에는 절대로 되지 않던, 평범한 최상급기사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포스블레이드의 변형.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떻게 이걸 해냈는지도 몰랐다.
그저 솟구친 분노와 한순간의 영감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포스블레이드.
당황하던 로건이 굳은 표정으로 살짝 그 위로 올라서는 순간.
“가라!”
탄성이 극대화된 포스블레이드가 갑옷을 입은 건장한 청년의 몸을 수십 미터 위의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허공에 적!”
“각하께 간다!”
“막아!”
소리를 지르는 부하들을 보며 요르단은 굳은 안색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검공은 다른 초인 3인방의 합공에 점차 밀리고 있었고, 맥라인의 정예는 이미 완벽하게 연합군 병사들에게 둘러싸였다.
후미의 에스페란자 기사단이 조금 걸리기야 하지만, 그놈들이야 맥라인을 처리한 뒤에 작살 내면 그만이다.
‘희생되는 병력이야 1왕자 군으로 메꾸면 되니까.’
구심점을 잃은 1왕자파의 귀족들은 결국 자신에게 모일 것이다.
아무리 명목상이긴 하지만 그들의 주군을 죽인 맥라인과 검공 연합군에게 갈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1왕자를 죽여 준 저 애송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은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놈은 내가 직접 상대하마! 나머지 놈들이나 정리해!”
마지막 최후 정도는 멋지게 장식해 줘야지.
“어설프게 도망갈 여지도 주지 않겠다, 로건 맥라인. 내가 직접 죽여 주지.”
왕국 초인 무력 서열 이인자, 요르단 발터마임이 살기 어린 미소로 로건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