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59)
159화로건이 수도에 입성한 날.
왕국과 왕실의 현안과 미래를 논하던 왕실의 대전은 왕족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란디아의 천 년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일.
그 과정을 지켜본 수많은 병사와 귀족들의 입을 통해 로건 맥라인에 대한 악명은 순식간에 그랑 전체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 날.
“로저스 전하를 뵈러 가겠소. 안내해 주시오.”
로건의 그 한마디에 왕실기사단장 프란시스코 로메로 백작의 안색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말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설마 왕이 될 왕자를 어떻게 하지는 않겠지?’
그 믿음 하나로 프란시스코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뒤를 따르는 맥라인의 기사들과 로건의 굳은 표정이 흉흉한 살기처럼 느껴지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 * *
“로건 공자.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곧 왕자님께서 나오실 겁니다.”
검공의 저택을 지키던 기사의 말에 주변의 모든 시선을 끌어모으며 행진하던 행렬이 멈춰 섰다.
“왕자도 잡아 가두거나 죽이려는 걸까?”
“설마…….”
“설마는 무슨, 어제 일 못 들었어?”
“사람을 이렇게 모은 것도 어쩌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이들이 늘어나자, 일행의 가장 앞에서 로건과 맥라인 기사단을 안내하던 프란시스코는 그제야 살짝 이상함을 느꼈다.
분위기에 휩쓸려 잊고 있었던 간단한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로건 공자는 검공의 제자잖아. 왕자가 여기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테고. 굳이 내가 안내할 필요가 있었나?’
이래서야 자신을 비롯한 왕실기사단의 기사들이 맥라인의 심부름꾼처럼 보일 것이 아닌가.
그 자각에 그의 안색이 굳어지는 순간, 저택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좌우에 독수리의 문양을 갑옷에 새긴 에스페란자의 기사들을 거느린, 백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3왕자. 로저스 폰 그란디아.
그의 등장에 사위가 고요해지는데.
우습게도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은 왕자가 아닌 로건에게로 몰렸다.
저벅. 저벅.
이내 다소 굳은 표정의 왕자가 얼어붙은 표정의 기사들과 함께 천천히 계단을 내려서자.
쿵.
“로건 맥라인이 고귀하신 핏줄, 로저스 폰 그란디아 전하를 뵙습니다.”
왼쪽 무릎을 꿇고, 오른 주먹을 심장에 가져다 댄 극공경의 자세.
그대로 깊이 고개를 숙이는 로건의 모습에 지켜보던 많은 이들의 눈이 커졌다.
쿵. 쿵.
“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로건의 뒤를 따라 일제히 예를 취하는 맥라인 기사들의 목소리.
그 박력 넘치는 외침이 거리에 만연했던 침묵 속의 긴장을 확실하게 누그러트렸다.
다소 굳은 표정이던 3왕자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고.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왕자를 경호하던 루이스 하이온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허리춤의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로건 공…….”
“이제야 비로소 예전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약속……이라.”
복잡한 표정의 3왕자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그런 약속을 했었더랬지. 그래, 그랬어……. 하…….”
그 작은 웃음은 이내 통쾌한 웃음소리로 변해 사방을 울렸다.
“……으하하하하! 그 약속이 이렇게 이뤄질 줄은 상상도 못 했소이다. 수고 많았습니다, 로건 공.”
3왕자가 로건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로건을 만난 이래 처음으로 하는 반 존대.
하지만 그 한마디가 현재 로건의 위치를 공고히 해 주었다.
3왕자, 아니 차기 왕이 될 자가 예의를 갖춰 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루이스에게서 3왕자를 인계받은 로건은 왕자를 바로 왕궁으로 모셨다.
그리고 전국의 국민들에게 새로운 왕의 즉위를 알리는 공문을 발표한 뒤, 즉위식 때까지 왕자를 호위한다는 핑계로 왕궁에 눌러앉았다.
“와, 왕궁의 경비는 전통적으로 왕실기사단의 책임입니다! 로건 공.”
“그렇다는군요, 왕자님. 그리할까요?”
“왕실기사단이 믿음직했다면 내가 검공의 저택에 머물러야 했을까. 로건 공, 그대가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오.”
“충심으로 따르겠습니다.”
“프란시스코 백작?”
“……명을 따르겠습니다.”
왕실기사단장의 표정이 일그러지기는 했지만, 그로서도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일.
그때부터 왕궁 그랑피아에는 맥라인 기사단과 그 병력이 왕실수비대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리를 잡은 바로 다음 날, 로건은 임시 국무회의라는 명목으로 수도에 있는 모든 귀족을 왕궁에 불러모았다.
– 로건 맥라인 공…… 듭시오.
작위도 붙지 않은 애매한 호명.
왕궁 대전을 지키는 내관들로서도 처음 말해 보는 탓인지 목소리가 흔들렸지만, 그 흔들리는 목소리에 웃음 짓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대전 내부에 착석해 있던 귀족들은 이내 정문을 열고 들어서는 붉은 머리 청년을 보며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일어서실 필요 없습니다. 앉아 계십시오. 작위도 없는 이 사람한테 이런 과례는 버겁습니다. 가뜩이나 늦어서 죄송한데.”
로건은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본론을 말했다.
“제가 바쁘신 여러분을 굳이 이리 불러 모은 이유는 새로운 내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로저스 전하의 즉위식 전이긴 하지만, 그 즉위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업무를 맡을 대신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내각. 그렇다면 이 자리에 있는 그들이 새로운 대신의 후보라는 뜻이었다.
파벌에 치여 숨죽이고 살았던 귀족들의 눈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 보이는 욕심과는 달리,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흠흠. 반역자들을 몰아내고 새 나라를 만든 것이 바로 로건 공자 덕분인데 우리야 공자의 뜻을 믿고 따를 뿐이지, 어찌 욕심을 내겠나.”
결국, 공식적인 자리임을 감안한 듯 부드럽지만 정중한 어조의 로버츠 플로이드 백작이 웃으며 먼저 말을 꺼냈고.
그에 호응하듯 다른 귀족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는 말씀입니다!”
“이 자리에 공자의 혜안을 따를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추천해 주시는 인재라면 무조건 믿어야지요.”
혜안? 무조건 믿어?
그 지나친 아부들에 로건은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상황 자체가 자신이 의도한 것.
눈가에 경련이 일 것 같은 마음을 억눌러 가며 로건이 다시 말을 이었다.
“흠. 그럼 별다른 의견이 없으신 거 같으니,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제 ‘부족한 사견’으로 뽑은 대신들 ‘후보’ 명단입니다.”
로건이 특정 단어들을 강조하며 귀족들에게 미리 준비한 자료를 돌렸다.
그 자료를 훑어본 귀족들은 하나같이 작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름은 둘째치고, 가장 위쪽에 있는 이름만으로도 로건의 속셈을 확실히 알 수 있었으니까.
[재상 : 로버츠 플로이드 백작]왕국의 문관 대신 중 최고의 위치에 장인이 될 사람의 이름을 떡하니 박아 넣었다.
그리고 그 아래쪽의 명단 역시, 로버츠 플로이드 백작과 평소에 가까웠던 이들의 명단.
능력보다는 친분 위주의 인선.
얼핏 보면 나라를 말아먹기 딱 좋은 주관적인 명단이었지만,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아하하. 사…… 흠흠. 로건 공자가 이 부족한 사람을 이리도 높게 평가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이 한 몸, 나라를 위해 기꺼이 헌신하겠네.”
이미 모든 얘기가 되어 있었음에도 로버츠 플로이드는 어색하지 않게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명쾌한 인선입니다.”
“역시 로건 공자. 식견이 뛰어나십니다.”
“모두 동의합니다!”
명단에 이름이 있는 이들은 있는 대로, 없는 이들은 없는 대로 콩고물이라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전생에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었던 1왕자파의 문관들은 모조리 참수했다. 적어도 그놈들보단 나을 거야. 파벌에 밀려 파면당했던 이들도 있으니.’
장인이 될 로버츠 플로이드 백작의 추천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완성한 명단지만, 최소한 그가 기억하는 전생의 내각보다는 나을 것이다.
‘내 말에도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런 기대를 하면서 로건은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혹시 이견이 있으시면 즉시 말씀해 주십시오.”
이견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전하께는 이대로 아뢰겠습니다. 모든 귀족의 ‘합의’가 이렇게 빠르다니, 전하께서도 기뻐하시겠군요.”
합의?
두 사람만의 합의겠지.
로건과 로버츠 백작을 제외한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똑같았지만.
당연히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물론 정식 임명은 폐하의 즉위식 이후가 될 겁니다. 명단에 이름이 오르신 분은 그 동안 충분한 준비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로건은 대전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난 미소를 지었다.
전생에는 누가 행정에 능력이 있는지 따위에는 관심을 둔 적이 없었기에, 소문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유명한 기사나 마법사도 아니고 유명한 행정가라는 소문 같은 게 날 리도 없겠지만.
그러나 최소한의 보완책은 있었다.
“세부 실무진은 대신 파벌 때문에 실직한 구 관리분들을 우선 등용하고, 부족한 인력은 행정 아카데미의 졸업생으로 구성하겠습니다. 이견 없으시죠?”
“없습니다!”
모인 귀족들 가운데서 진심으로 웃고 있는 몇 되지 않은 귀족 중의 하나.
로버츠 플로이드의 호쾌한 대답과 함께 ‘임시 국무회의’는 짧게 그 끝을 고했다.
* * * 내전이 끝나고 한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모든 것이 말끔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맥라인 영지에서 벌어진 최후의 결전을 정리하는 데에만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그 모든 과정을 마무리한 검공이 수도인 그랑으로 돌아오는 데 또 일주일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검공이 그랑에 입성했을 때.
수도는 로건이 벌인 일로 떠들썩해져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검공은 곧 무거운 표정으로 로건을 찾아 나섰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느냐? 왕손들은 고작 열 살을 갓 넘은 어린아이들이었다.”
“후환을 남겨 놓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뭐, 이미 사라진 1왕손은 결국 놓쳤습니다만.”
자신의 타박에도 왕실의 핏줄을 마저 죽이지 못한 것만이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제자를 보며 검공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정녕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 생각하느냐?”
“예, 그렇습니다. 로저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를 생각하면 이것이 최선입니다.”
“네 욕심은 아니고?”
“물론입니다.”
물끄러미 바라본 제자의 눈에는 정말 사심이라곤 없어 보였다.
하지만 검공은 그게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이 일을 하려고 먼저 수도로 온 것이냐? 내가 막을까 봐?”
“……굳이 스승님의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변명은……. 하, 됐다. 뭐 다행히 더러운 일이라는 건 자각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스승님.”
로건의 표정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미 벌어진 일을 이제 와 괜히 그르칠 생각은 없다. 안심하거라.”
“……감사합니다.”
“하지만 하나는 명심하거라. 이미 네가 지금 한 번 선을 넘었다는 것을.”
“예?”
“지금 네 말에는 일리가 있고, 이유가 있다. 그러니 이번엔 그냥 넘어가겠다. 하지만 나는 걱정이 되는구나.”
많은 뜻을 담은 검공의 눈빛이 로건의 흔들리는 눈빛과 마주쳤다.
“무슨 말씀을……?”
“네가 지켜야 할 선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거라. 그 선을 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아지는 순간, 너도 요르단이나 후안 녀석과 똑같아지는 거다.”
“스승님, 그건…….”
“일전에 분명 놈들과 닮지 않겠다 장담했었지? 나를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말아 다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내 로건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글쎄다.”
“……?”
“내가 처음에 봤던 네 녀석이라면, 아까 내 물음에 솔직하게 답하지 않았겠느냐. 그러려고 날 떼어 놓고 수도에 먼저 온 것이라고.”
움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순간적으로 로건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런 제자를 보며 검공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사람은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다, 로건. 한 번 뱉은 말은 목숨 걸고 지키던 내가 널 지키기 위해 변했듯이.”
“그건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내 선택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너 역시 스스로 변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거라. 그리고 꼭 명심하거라. 신하는, 아니 사람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그 선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사람은 괴물이 되는 거다. 네 손에 죽은 요르단 녀석처럼.”
검공은 그 말을 끝으로 그대로 자리를 떠났고, 로건은 돌아서는 스승의 뒷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