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62)
162화- 아하하하하!
통신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형의 웃음소리.
전쟁 이후 처음으로 듣는 것 같은 큰 웃음에 로니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형수가 바로 나와 버렸을 때는 정말 찜찜했었는데.
“……다행이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주군은 강하시다고. 이제 좀 마음이 놓이십니까?”
“그래도 가족이란 게 쉽게 걱정을 안 할 수가…… 아니, 빅토르. 둘이 있을 때는 반말하라니까?”
“……그게 그리 쉬운 게 아니지 말입니다.”
오드아이 친구가 굳은 얼굴로 약간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나마 이 정도 반응이라도 보이는 게 발전이라면 발전.
로니안은 마음속 라이벌이라 생각하는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우리도 이제 축제 구경이나 하자고.”
“다녀오십…….”
“거참, 반말! 그리고 같이 가자니까?”
“……혼자 다녀와. 난 저택을 지킬 테니.”
“형님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게 너였는데?”
“주군을 걱정하는 게 아닙…… 끄응. 아, 아니야. 어차피 내가 그런 곳에 가 봤자 할 것도 없으니까.”
무표정한 친구의 재미없는 취향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단번에 무너트릴 방법 역시 알고 있었다.
“전쟁 때문에 창고에 쌓여 있던 장식품들도 많이 나왔다는데? 여자애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
움찔.
“뭐, 안 갈 거면 빅토리아 취향이나 좀 알려 줘 봐. 돌아가서 선물하게.”
“……간다.”
저 꿈틀거리는 눈썹은 기대감의 표현일까, 분노의 표현일까.
로니안은 속으로 키득거리면서 친구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안쪽이 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형님도 괜찮아지신 것 같으니 형수님과 잘 보내시겠지?’
생각해 보면 통신실을 나올 때 형수의 표정도 나쁘지 않았었다.
남녀 간의 일이야 자신은 잘 모르지만, 어쩌면 그때 이미 형님의 스트레스가 좀 풀렸던 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좀 더 능력이 있다면 형님의 짐을 더 많이 나눠서 들 수 있을 텐데.’
로니안은 언젠가부터 들기 시작한 자책 비슷한 생각을 다시금 곱씹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어차피 축제 기간에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니 적어도 며칠간은 앞으로의 계획이나 걱정 같은 건 잠시 내려놓고 이미 이뤄 낸 성과를 만끽하자.
로건은 그렇게 마음먹었지만, 주변 환경이 따라 주지 않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파티 초청장은 그저 애교일 뿐.
“로건 백작님! 한 번만 만나 주십시오!”
“어허, 내가 누군 줄 알고! 귀족끼리 안면 좀 트자는데 감히 병사가 앞을 막아?!”
“하하, 기사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로건 백작님께 다리만 놔 주시면……. 허허, 순진하신 기사님이네. 그러지 말고…….”
저택의 입구에서 바글거리는 인파는 로건이 밖으로 나갈 엄두조차 나지 않게 했다.
‘다 꺼지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안 그래도 왕궁에서 벌인 일 때문에 피의 백작(Earl of Blood) 같은 흉흉한 별명이 붙고 있는 마당이어서 당분간은 평판 관리를 좀 해야 할 판이라.
로건은 조용히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비슷한 느낌의 한숨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역시 여기가 더하네요.”
“피난처로는 적합하지 않죠?”
로건의 말에 에일렌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새롭게 재상이 된 플로이드 가문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본가에서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라고 핑계를 대긴 했지만, 사실은…….
“흠. 지금 상황에서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비번인 기사들도 아예 가문 문양을 가리고 수도를 돌아다닌다고 하더라고요.”
기사가 자신의 긍지라고 할 수 있는 가문의 문양을 가린다는 말은 물론 농담이겠지만, 그만큼 맥라인이 주목받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장인어른을 따로 뵈려 하면 더 난리가 날 테니, 아무래도 약속은 못 지킬 것 같군요. 적어도 지금은 축제가 끝나는 대로 바로 내려가는 게 최선일 듯합니다. 혹시 따로 다른 말씀은 없으시던가요?”
“……네, 없었어요.”
– 그런데 결혼식은 언제 올릴 거냐?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아버지의 말이 스쳐 지나갔지만, 에일렌은 애써 담담하게 답했다.
물론 슬쩍 원망 어린 시선이 로건에게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청혼도 해 놓고는.’
허리춤에 매인 프리구스의 서늘한 냉기가 갑자기 싸늘하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자기 입으로 그 말을 꺼내기에는 왜인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일까.
“그럼 좀 더 쉬세요, 에일렌 경. 아무리 경호 조라도 지금은 굳이 내 옆에 있을 게 아니라 따로 쉬고 있어도…….”
뿌듯하기만 했던 ‘경’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임무는 임무니까요. 전 신경 쓰지 마시죠.”
“…….”
“…….”
급속도로 차가워지는 분위기.
이상하게 강조된 한마디가 마음에 무척이나 걸렸다.
“혹시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전. 혀. 요.”
뭔가 있구나.
로건은 그렇게 느끼면서도 연신 입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무슨 말을 어찌해야 할지 전혀 몰랐으니까.
그러다 한참 후에야 꺼낸 말이.
“사람이 원래 가까운 사이일수록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야 하는 겁니다. 기분 나쁜 일 같은 것도 다 말을 해야 서로 의가 상하지 않지. 말없이 알아주길 바라는 건 좀 아닌…….”
“네, 알겠습니다.”
“…….”
“…….”
왜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더 나빠졌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 찜찜하다. 찜찜해. 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한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잘못은 고사하고 최근에는 즉위식 준비 때문에 얼굴도 못 본 날이 다반사였다.
만난 날이 있어야 잘못을 해도 할 것이 아닌가.
억울한 마음에 슬쩍 째려보려 했는데.
그 순간 마주친 도끼눈에 로건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내가 독심술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거참.’
아무리 여자를 몰라도 지금 머릿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으면 역효과라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었다.
로건은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한참을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아!!”
“……?”
“제가 그걸 잊고 있었군요. 정말 미안합니다.”
로건은 딱딱했던 에일렌의 표정이 스르륵 풀리는 것을 보며 더욱 확신을 얻었다.
“휴가를 준다고 해 놓고 제 호위 근무를 시키다니. 너무 배려없는 짓을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들어가 쉬셔도…….”
까드득.
로건은 갑자기 들리는 섬찟한 이 가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아. 하하. 이게 아니…….”
“아하. 이게 호위 근. 무. 였군요.”
갑옷 입고, 검도 차고, 옆에 서 있는데.
그럼 뭐……?
“그럼. 명대로 쉬러 가겠습니다.”
쾅!
로건은 부서질 듯 문을 닫고 나서는 에일렌의 뒷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대체 왜 그러는 건데……?!
말을 해 줘야 알지!!
소리 내 꺼낼 수 없는 한탄을 속으로 삼키면서.
* * *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좀 누그러질 거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싶으면, 일단 조금 지켜보도록 해. 괜히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계속 말 걸면 더 곤란해진다. 결혼 두 번 한 아비의 말이니 믿어라.]
대충 들어도 왠지 좀 이상한 충고라는 직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아버진 다 정략결혼이셨잖습니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말에 한숨만 쉬고 있자니 통신구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하하하. 그래도 쉬라고 했다고 바로 공녀를 찾는 것을 보니 확실히 장가갈 때가……]뚝.
로건은 쓸데없는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아 통신을 끊어 버렸다.
긴 한숨과 함께 통신실을 나온 로건은 말없이 발걸음을 빨리했다.
‘휴식은 무슨 휴식이냐. 그러니 자꾸 잡생각만 들지. 역시 해야 할 일이나 하루빨리 처리하는 게 좋아.’
로건은 지난 며칠간 미루어 둔 일을 하기로 했다.
‘그 김에 산책도 하고.’
그것이 비록 복면을 쓴 밤 산책일지라도.
타다닥.
이제는 왜인지 정문으로 오는 것보다 담을 넘어 창문으로 들어오는 게 익숙하다는 생각이 드는 저택.
다만 이번에는 외부의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목적일 뿐이라 귀신처럼 서재의 창문을 통해 들어선 로건은 서슴없이 기세를 드러낸 채 방문을 열고 저택의 복도를 걸었다.
“아! 이제야 오셨군요. 승차를 축하드립니다, 로건 공자. 이제 각하라고 해야 하나요?”
“하하.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제가 어떻게 대공 전하의 오른팔인 루이스 님께 공대를 받겠습니까.”
마침 저택의 복도를 지나던 스승의 부관이자, 전생의 대장과도 정겹게 인사를 나누고.
“대공께서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계셨는데요.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멈칫.
자신이 왜 필요한 것이 있음에도 며칠간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는지에 대한 자각도 뒤늦게나마 들었지만.
“하하……. 그동안 일이 좀 많았던 바람에……. 스승님께서 이해해 주시겠지요.”
“조금 화가 나신 것 같기는 한데. 하하, 뭐 로건 공 때문은 아니겠지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 때문 맞는 거 같은데.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로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모르는 길도 아니고,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일 보십시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로건은 웃으며 헤어진 루이스 하이온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지하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르르릉.
“……이제야 오는구나.”
석문을 힘으로 밀어젖히자마자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
수련 시에는 유독 엄격했던 목소리긴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살기를 품은 것처럼 들리는 것은 아마도 착각…….
“벽을 넘게 도와 달라던 놈이 3일 뒤에나 와? 내 시간이 아주 흘러넘치는 줄 아는 모양이구나.”
……이 아니구나.
설마 3일 밤을 여기에 계셨던 것은 아니겠지.
따로 언질도 주지 않으시고.
로건은 어색하게 웃음 지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뭐가?”
“예?”
“뭐가 죄송하냐는 말이다.”
순간적으로 바쁜 일이 많아서라는 변명을 떠올렸던 로건은, 이내 스승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듣기 좋은 소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꿀꺽.
“……폐하의 곁에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심어 두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칠십도 넘은 이 스승을 다시 관직에다 처박아 놓은 것이냐? 한마디 상의도 없이?”
대번에 타박하는 말이 튀어나왔지만, 살기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래도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는 것보다는 낫구나.”
피식 새어 나오는 스승의 미소에 로건 역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상근직이 아닌 자문역으로 마련했습니다. 본래는 재상직을 드릴까 했는데…….”
“무슨 끔찍한 소리를! 그랬다간 즉위식에서 네놈에게 직접 치도곤을 놓았을 것이야!”
“그래서 바꿨습니다. 새 시대를 시작하는데 공신인 제가 즉위식에서 처맞을까 봐서요.”
“오호. 다 예측을 하셨다?”
“그럼요.”
“……뻔뻔한 낯짝이지만, 그래도 몇 주 전에 핑계를 대던 면상보다는 낫구나. 그래, 좋다. 검을 들어라.”
“옙!”
스릉.
스승의 얼굴에 어린 미소를 보며 로건은 기분 좋게 검을 뽑았다.
그런데.
“잠시 벽 너머를 봤다 한들, 직접 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지. 오러를 버틸 수 있다니, 돌아가기 전까지 죽도록 굴려 주마.”
넘실거리는 붉은 오러가 소름 끼치는 기세로 영혼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후 로건은, 스승이 의외로 뒤끝이 길다는 것을 넘치도록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스승은 이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제자를 다그치는 와중에도 속으로는 한가지 바람만을 되새기고 있었다.
‘선을 지키려는 노력. 지금처럼만이라도 해 주거라. 정말 너만은 변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