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66)
166화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아쉬워했던 긴 논의가 끝나고.
로건은 다소 지친 얼굴로 떠들썩한 좌중을 정리했다.
“후우.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간단한 일부터 빨리 처리합시다. 우선 클레이튼 님, 마탑에 지원금이 얼마나 더 필요하신 거죠?”
“일단 마탑의 경비 문제와 제자를 뽑는 문제보다는 그 연구 비용의 문제가 더 크…….”
“예. 그 연구의 필요성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필요한 금액을 말씀해 주십시오. 얼마든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구체적인 조건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호쾌한 허락이 떨어졌다.
원하는 대로 다 퍼 주겠다는 듯한 어조에 클레이튼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데.
“다만 돈을 어떻게 썼는지는 확실히 확인할 겁니다. 드웨인을 통해서 자재 구입과 소모 비용에 대한 감사는 확실히 시킬 테니, 과하지 않은 선에서 필요한 금액을 말씀해 주십시오.”
로건이 확실히 선을 그었다.
호구 짓과 투자의 경계선을 분명히 하는 선을.
클레이튼은 그제야 자신의 상기된 표정을 자각하고 피식 웃었다.
실망하는 자신이 우스워서였다.
‘언제부터 내가 그리 자금에 여유가 넘쳤다고.’
더구나 확실한 증빙만 있으면 얼마든지 지원해 주겠다는 뜻이 아닌가.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대공자님. 일단 필요한 금액은 천만 골드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천만 골드.
너무나 쉽게 뱉어진 엄청난 액수에 좌중이 일순간 조용해졌지만.
“좋습니다. 드웨인, 그 정도 여유는 있겠지?”
“……예. 좀 빠듯하지만.”
“그럼 됐군. 클레이튼 경, 그럼 일단 연구 문제는 해결된 거죠?”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아닙니다. 조금만 더 애써 주십시오. 연구가 성공하는 그날, 그 모든 수고 이상의 보답을 해 드리겠습니다.”
“보답이라뇨! 이미 충분합니다!”
“예?”
“학파의 꿈을 실시간으로 이뤄 가고 있는 요즘이 제게는 보상입니다. 더욱 정진하여 영지에 더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웃으며 주고받는 덕담.
하지만 그 덕담 안에는 지금 클레이튼이 하고 있다는 연구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가신들 대부분이 이를 알아차리고 눈을 빛냈지만, 그 누구도 로건이 굳이 말을 하지 않고자 하는 일을 캐묻지는 못했다.
“그럼 다음으로 공방의 일이야 드워프 장인들을 사…… 흠흠, 데려오면 될 문제고, 공방의 예산도 충분할 테니 그건 상단 경험이 있는 필립에게 맡기겠네. 필립, 문제없겠지?”
당연히 긍정적인 답을 기대하고 물은 말.
그런데.
“……지금은 미루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회색 눈동자의 청년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왜지?”
하마르가 필립을 째려보고, 옆에 있던 데미안이 필립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는데.
필립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생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노예…… 크흠, 인간 시장이 존재하는 하룬 성은 내전의 주 무대 중 하나였습니다. 시장 자체가 마비된 지금 상황에서 드워프 장인들을 구하려 하면 원래도 비싼 몸값이 몇 배, 혹은 몇십 배로 뛰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적기가 아닙니다.”
“그럼?”
“앞으로 빠르면 한두 달, 늦어도 석 달 안에 다시 물량이 풀리게 되면 한꺼번에 풀린 물량으로 인해 장인들의 몸값도 확 내려가게 될 겁니다. 그때를 기다렸다가 매입…… 데려오시는 게 영지 입장에서 훨씬 낫습니다.”
물량, 매입 등등의 단어에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던 하마르도 그 말을 듣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필립. 돈 문제는 칼 같아.’
로건 역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도 조만간 행정 업무 대신 본업으로 돌려야겠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면서.
“그래, 필립. 아주 좋은 의견이었다. 하마르, 조금만 기다려 줘. 뜻은 알아들었지?”
“허. 알겠소, 주인.”
그렇게 공방에 관한 건도 정리가 되자, 로건의 시선이 헤인켈에게로 옮겨 갔다.
“아까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기사단 관련 문제는 아무래도 헤인켈 경과 같이 의논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경, 생각하신 바가 있다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공자님. 영주님께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 사람은 이제 은퇴를 생각하는 몸입니다.”
“어허. 어찌 그런 말을!”
패드릭이 안타까운 어조로 소리까지 질렀지만, 헤인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런 제가 기사단에 관련된 의견을 말하는 것은 그리 좋은 모양새가 아닌 것 같습니다.”
“으음. 사람 참…….”
그에 로건 역시 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경. 가문은 경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문을 위한 희생과 그 충성심에는 아무리 감사를 표해도 모자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헤인켈 경, 가문은 지금 경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조금만 더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 의견이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견이건 우리 기사단의 기사라면 헤인켈 경의 의견을 가장 존중할 것입니다. 저와 아버지를 포함해서요.”
그 말에 늙고 망가진 기사가 멍한 눈으로 상석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해할 것을 알기에 애써 피해 다녔던 주군의 안타까운 눈빛과 부드러운 미소가 지친 마음을 다시 한번 울렸다.
헤인켈은 깊은 한숨으로 회한을 뱉어 낸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모두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역시 그냥 굴리는 게 답일 것 같습니다.”
“……?”
회의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쏴아아.
눈빛에서도 소리가 난다면 이런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기대감과 그 자리를 대신하는 실망감.
변화하는 좌중의 분위기가 피부를 찔러 대는 게 확연히 느껴지는데.
헤인켈은 그중에서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주군의 황당한 눈빛이 가장 마음에 걸려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냥 굴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회의가 시작된 이래 가장 커다란 목소리.
늙은 기사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이제 우리 기사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철혈검의 전수 여부 아니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에 다시금 기대가 차오르고.
“기존의 기사단원들이 새 기사단원들의 교관 역할로서 철혈검을 전수하고 훈련을 주도하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 선임 기사로서의 입지도 인정해 주면서 새롭게 소속된 기사들과 단합도 노릴 수 있습니다.”
가신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표했다.
“교관 역할을 할 기존 기사들에게 특별 수당을 지급하는 것도 좋은 방편이 될 것입니다.”
언제 침울한 적이 있었냐는 듯, 헤인켈은 열정적으로 의견을 쏟아 냈다.
흡사 고목에 꽃이 피는 느낌.
본인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을 이어 가면서 헤인켈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그것을 본 패드릭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로건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의견입니다, 헤인켈 경. 그대로 실행하겠습니다. 역시 큰 도움이 되는군요.”
자신이 낸 의견이 정말 확실한 해결책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는 주군과 대공자.
그 모습에 헤인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잘됐어.’
가문에 오랜 시간 충성해 온 기사가 의욕을 되찾았다.
다치고 망가지더라도, 가문은 충성을 바친 이를 존중할 것이라는 사실.
로건은 헤인켈이 그것을 보여 주는 상징이 되어 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그 이유만으로도 헤인켈의 의견을 그대로 시험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느꼈다.
설령 다른 훨씬 좋은 의견이 나오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회의는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았다.
“자! 이제 주요 안건에 대한 의견은 모두 나온 모양입니다. 긴 시간 이어진 회의에 다들 수고가 많았습니다. 혹시나 아직 말씀하지 않은 안건이나 문제점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저 회의를 마치기 위해 꺼낸 말.
하지만 혹시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손을 움찔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로니안? 혹시 할 말이 있는 거냐?”
그 말에 좌중의 시선이 몰리자 로니안이 잠시 망설이다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예, 형님. 말씀드리고 싶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 뭐든 말해 보거라.”
가문의 회의 때 좀처럼 의견을 내지 않던 동생.
그 갑작스러운 변화가 기꺼웠기에, 로건은 눈을 빛내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가문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급작스레 몰려든 상인과 유민들이 많습니다. 그 때문인지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도난이나 강도 같은 영지민 상대의 범죄도 빈번해지고 있고요. 상황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조만간에 문제가 더욱 커질 것 같습니다.”
로니안의 말에 조용하던 가신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번졌다.
“그냥 축제가 막 끝나서 소란스러운 거 아니었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잡음이 많긴 했어.”
“병사들이 고생한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가신들 또한 로니안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했다.
“치안 문제라. 병사들을 치안 조에 더 많이 배치하고 순찰 시간을 늘리는 것으로…….”
“형님, 그보다는 제도를 아예 바꾸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도를 바꾼다고?”
“지금 병사들은 훈련, 경계, 경비, 파견, 휴식 조로 나뉘어서 번갈아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다른 일들은 몰라도 영지 내 치안을 담당하는 업무는 아예 전담 병사들을 만들어서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영지를 위해서도 나을 듯합니다.”
“호오? 치안대를 만들자?”
로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치안……대? 예. 치안을 전담하는 부대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연륜이 있는 병사들이나 은퇴한 기사들이 주축이 되면 전투병과도 분리가 되고, 적절할 것 같습니다.”
“오호라!”
“좋은데?”
“둘째 공자님도 역시 영민하셔.”
로니안의 말은 가신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끌어냈다.
‘이 녀석…….’
치안대라는 명칭도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 스스로 이런 걸 생각해 내다니.
치안대는 제국의 대도시에서나 시행 중인 제도이지만 나름 성과가 증명된 방식이었다.
다만 작은 영지일 때는 굳이 따로 치안대를 둘 정도로 치안에 신경 쓸 필요도 없어서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피식.
“좋은 생각이다. 그리하자꾸나. 그건 네가 직접 해 보거라, 로니.”
“예? 제가요?”
“그래. 의견을 낸 사람이 너니까 네가 직접 치안대를 만들어라. 두 타운과 비프로스 성 같은 큰 성을 중심으로 운용하면 성과가 있을 것 같구나.”
“……예, 형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한다. 앞으로도…….”
“예?”
“잘하라고.”
히죽.
“예, 형님.”
그렇게 그날의 회의는 로건의 기묘한 미소와 함께 끝이 났다.
* * *
“헤인켈 경. 잠깐 얘기 좀 하시죠.”
“대공자님…….”
“아버지께서 영지를 주겠다고 하신 것을 거절하셨다 들었습니다. 아깝지 않으십니까? 피데스 자작령을 만들 기회였는데.”
피데스(Fides).
고대어로 충성과 신의를 뜻하는 단어로, 아버지가 헤인켈에게 자작위를 내리며 하사한 성이었다.
“……자식도 없는 이 사람이 굳이 영지를 가져서 뭘 하겠습니까. 제 사후에 가문에 누만 될 뿐입니다.”
“아직 정정하신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포스를 잃었더라도 건강하게 사는 건……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습니까. 주군을 구하려다 얻은 상처입니다. 오히려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
로건이 멍한 눈으로 헤인켈을 바라보았다.
“영주님의 배려도, 걱정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거절한 것뿐이니 굳이 부담 갖지 마시라고 전해 드려 주십시오.”
“……저희는 어떻게든 경의 희생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아버지도, 저도 경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 드릴 생각이 있습니다.”
“압니다. 제가 잃은 것에 대해 보상해 주고 싶으신 마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 마음을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버지께서 몇 번이나 거절당하셨다고 침울해하십니다.”
진심 어린 로건의 목소리가 전해지고, 헤인켈이 짧은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젊어서 영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영주님이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자신은 언젠가 과거 맥라인의 영광을 부활시킬 것이라고, 그 길을 꼭 함께해 달라고.”
“…….”
“젊은 영주님은 항상 저에게 그 말씀을 강조하셨고, 그런 영주님의 꿈은 어느샌가 제 꿈이 되었습니다.”
“경…….”
덤덤하게 읊조리는 헤인켈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물론 우리는 그러다 현실에 부딪혔고, 좌절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꿈을 잊고 살았는데 그 꿈을 공자님이 이루어 주셨지요.”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럴 리가요. 물론 저도 작은 공이 있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서 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레 고개를 숙이는 헤인켈을 보며 로건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공자님 덕분에 꿈을 넘치도록 이뤘습니다. 그러니 이 이상 제가 뭘 바라겠습니까.”
헤인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그 미소는 진실로 후련해 보였다.
남은 미련이 전혀 없다는 듯 탈속한 모습.
그래서 더 어디론가 떠나 버릴 것 같은 느낌이라, 로건은 황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직 우리는 경의 힘이 필요합니다. 기사가 아니더라도, 그 경험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을 겁니다. 영지는 몰라도 은퇴는 다시 생각해 보시고…….”
“예, 은퇴는 번복하겠습니다.”
“……에?”
아버지에게 부탁받았던 일이 너무도 쉽게 이루어지는 순간.
로건이 오히려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하고 말았다.
“지금 뭐라고……?”
“힘을 잃고, 스스로가 부족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주님의 요청도 무시하고 은퇴를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회의를 하면서 다시 깨달았습니다. 아직 제가 이 가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
“기사로서는 무리지만, 병사들을 훈육하는 교관으로서는 충분한 역할을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물론 카이솔론 교관이 훌륭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저는 저만의 방식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를 병사 담당 자문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가문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헤인켈 경…….”
자작위까지 얻은 사람이 병사들의 교관을 자청하는 광경에 로건은 뭐라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이뤄진 꿈에 만족하며 살기보다는 더욱 커진 꿈을 보고 싶습니다. 영주님, 공자님과 함께 좀 더 꿈을 꾸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헤인켈 경. 어떤 꿈을 꾸시건 그 이상의 것을 볼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로건은 그저 이 충신이 원하는 대로 꿈을 꿀 수 있도록. 아니, 그 이상으로 크고 화려한 꿈이 이뤄지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만들겠다.
그렇게 몇 번이고 다짐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