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67)
167화 ‘오늘인가……. 기사단 정식 훈련이라…….’
호르헤는 새벽의 서늘한 공기를 마시며 방문을 나섰다.
아직은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맥라인 타운의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사이로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도.
“여어, 짐! 같이 가!”
“부지런쟁이가 웬일이야. 오늘은 좀 늦었네?”
“마누라 바가지 때문에 잠을…….”
그 누구보다 일찍 아침을 시작하는 농부들의 밝은 얼굴에, 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어렸다.
‘좋은 곳이야.’
내전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몰락한 칼리아 영지와는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 맥라인이라. 허허, 차라리 잘됐다. 가거라. 가서 자유를 찾아라. 못난 주군 따라서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살지 말고.
모시던 주군의 초라한 웃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호르헤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의 나이 마흔, 최상급기사로서는 절정기라 봐도 무리가 없는 나이.
이 시기에 어쩌면 수십 년간 이어질지도 모르는 감시와 제약을 받으며 세월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비겁하다고?
자신은 왕의 명령으로 내려진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고른 것뿐이다.
군주의 군주, 즉 이 나라 기사들의 진정한 주군인 왕의 명을 따른 것뿐이지 기사의 도리를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라는 변명은 자기 자신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적국에 투항한 최악의 불명예는 아니라지만.
‘깃발을 바꾼 기사. 그래, 그게 나다. 그런 만큼 이곳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아 보겠어.’
최상급기사라는 자원은 어느 영지, 어느 나라에 가도 우대받을 수 있는 인재다.
실제로 왕국의 실세로 떠오른 맥라인 영지에도 최상급기사는 영주와 그 아들, 로건 맥라인밖에 없을 정도니까.
배려를 해 준 옛 주군에게도 언젠가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옛 칼리아 기사단장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호르헤는 맥라인의 핵심이 되어 보겠다 재차 다짐했다.
‘이제 시작이다.’
칼리아 영지에서 맥라인 타운으로 온 지 이제 고작 삼 일째.
처음으로 이곳의 진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만난다.
맥라인 기사단을.
“형님,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어느새 따라붙은 옛 심복 덴밀이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소심한 걱정을 내뱉었다.
그에 호르헤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텃세는 있겠지. 하지만 병합된 입장에서 뭘 어쩌겠느냐. 그저 참아야지.”
“단순 병합도 아니고 얼마 전까지 서로 칼부림을 주고받던 적이었지 않습니까. 텃세 정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다 참아야 한다. 절대 사고 칠 생각하지 마.”
“그래도 형님 체면이 있는데요. 만약 너무 심하다 싶으면 제가 책임지고 나서겠습니다.”
“……나서서 뭘 어쩌게?”
“그냥 제가 사고 한 번 치고 쫓겨나더라도 형님께 함부로 하는 놈은 사라지게…… 으아아압! 죄송합니다!”
“헛소리 말고 절. 대. 로. 참아라. 알겠냐?”
“예, 예. 그러니 이거 좀…….”
호르헤는 그제야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던 덴밀의 귀를 놓아주었다.
앞으로 한동안은 무엇보다 정신 무장이 필요한 때.
‘나는 자존심 따윈 없다. 깃발을 바꾼 기사다. 나는 자존심 따윈 없다…….’
그렇게 속으로 주문을 외듯 몇 번이고 다짐한 그가 숨을 깊게 들이쉬고 기사 연무장으로 들어가는데.
뻑.
들어서기가 무섭게 기사 하나가 어깨를 부딪쳐 왔다.
“아이 씨, 입구에 서서 지금 뭐 하는…….”
벌써 시작인가.
속으로 한숨을 내쉰 호르헤의 눈에 자신보다 먼저 울컥한 덴밀의 일그러진 표정이 보였다.
‘참으라니까. 이제 시작인데.’
호르헤의 손이 덴밀을 막기 위해 움직이려는 순간.
“우리 눈 좀 똑바로…… 어? 그 갑옷은……? 헉! 새로 오신 분들이군요! 이런,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눈앞의 기사가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어……?”
“……?”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서두르다 보니 앞을 제대로 못 봤네요.”
정말로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뭐지?’
상상한 것과 전혀 다른 상황에 호르헤와 덴밀이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지는데.
“랜던! 무기 챙겨 오라니까 대체 어디까지…… 어? 거기 뭐야?”
멀리서 다가오는 덩치 큰 기사.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심중의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게 진짜 시작이군.’
호르헤가 다가오는 기사를 보며 각오를 다지는데.
“어? 호르헤 경? 칼리아의 최상급기사 호르헤 경 아니십니까?”
순식간에 웃는 얼굴로 변한 거한이 자세를 낮추며 빠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이거 반갑습니다. 맥라인 기사단 4조 조장 핸더슨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얼떨결에 내민 손이 거세게 흔들리는 것 이상으로 호르헤의 눈동자가 폭풍처럼 흔들렸다.
‘대체 뭐야? 얘들 왜 이래?’
그의 뒤에 선 덴밀 역시 혼란스러운 눈으로 핸더슨과 호르헤를 번갈아 보며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헉? 최상급기사? 그?’
처음 호르헤와 부딪쳤던 평기사 랜던은 자신의 조장 핸더슨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수준 높은 기사에게 실수해서만은 아니었다.
저기 저 최상급기사의 손을 잡고 흔들고 있는 조장, 핸더슨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힘들지? 그런데 우리 기사단이 가장 힘들었던 게 언제인지 아냐? 테스론 기사단을 막 합병했을 때였다. 그때 초기에 텃세나 태업 때문에 좀 분위기가 안 좋았거든.
– 당연한 거 아니냐고? 그 당연한 일 했다가 우리 영주님한테 죽을 뻔했다. 적도 아니고 우리 영주님한테!
– 너 훈련하다 주마등 본 적 있어?! 지금 훈련은 그때 비하면 체조야, 체조!
– 그런데 지금 윗분들이 기사단 내의 ‘차별’과 ‘평등’에 관한 문제로 회의까지 했다. 이게 뭔 말인지 알아?
– 이적한 기사들에게 텃세를 부렸다가는 우리가 다 엿 된다는 말이다. 절대! 절대 텃세니, 태업이니 하는 말이 나와선 안 돼! 가문 회의 같은 거 안 했던 그때도 영주님이 악마로 보였다.
– 이번에 잘못되면 영주님뿐만 아니라 대공자님도 우릴 같이 갈굴 거다. 너 우리 그 씹어먹을 승마 훈련이 누구 때문에 생겼는지 모르지? 영주님 부자가 다 악마로 변신하면 우리는 진짜 훈련 중에 죽을 수도 있어.
– 이적한 기사들 입에서 텃세에 텃이라도 나오면, 그리고 그게 만약 너 때문이면, 앞으로 네 인생이 터질 줄 알아라. 알겠냐?
실로 무시무시한 협박.
이미 저 무식한 조장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려 본 4조의 조원들은 뼈에 스며드는 공포로 인해 그 협박을 머릿속 깊숙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지금도 악수 중인 핸더슨의 눈초리가 힐끔힐끔 자신을 향하는 것이,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목숨이 간당간당하게 될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랜던은 눈앞의 기사들에게 바짝 다가갔다.
“우와아! 최상급기사시라니,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 가르쳐 주십시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 얼마 전까지 서로 칼질하던 사이인데.’
‘니들 그새 다 까먹은 거냐?’
좌우에서 이어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친절함의 공세는 호르헤와 덴밀의 혼을 빼 놓았다.
그런 그들에 대한 이상한 환대는 그 뒤로도 쭉 이어졌다.
“아이고, 호르헤 경.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분명히 전쟁에서 서로 칼질한 기억이 있는 얼굴이 영광을 운운하고.
“여기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제가 잘 아는 여관이 있는데, 거기 바비큐가…….”
악귀 같은 얼굴로 부하를 베어 넘기던 기사가 맛집을 추천해 줬다.
그들은 결국 처음의 각오와 상반되는 문화적 충격을 받은 채 숙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한 것은 그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무슨 속셈이 있는 겁니다!”
“맞습니다. 이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함정입니다. 우리가 이 수작에 넘어가 마음 놓고 헤헤하는 순간이 바로 놈들이 함정을 터트릴 순간일 겁니다.”
“그들이 뭐 하러?”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던 옛 부하들이 호르헤의 한마디에 침묵했다.
왜 가만히 두어도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자신들에게 오히려 주인들이 숙이고 들어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들은 절대로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추측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 이곳에 순수한 맥라인 기사단 출신은 저나 디그롬 녀석을 포함해도 30여 명밖에 없습니다. 이제 와서 다른 기사단에 텃세를 부린다는 것도 이상하죠.
유독 호의적으로 굴었던 덩치 큰 기사, 핸더슨의 말뿐.
“어쩌면 이게 바로 맥라인 기사단이 강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 말에 한때는 맥라인의 적이었던 이들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졌다.
* * *
“사고 친 놈 없지?”
“난 네가 제일 걱정이야, 핸더슨.”
“에이, 무슨 소리야. 난 완벽하게 단속하고 있다고.”
디그롬의 말에 핸더슨은 코웃음을 쳤다.
조장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조원들에게 전달할 때 자신의 협박까지 더하니, 제 조원들은 아예 이적한 기사들을 모실 자세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디그롬이 다른 조장들을 둘러보았다.
대공자와 사이가 밀접한 1, 2, 3조의 젊은 천재들만 빼놓고 만들어진 이 야합의 장은 기사단 내의 여론을 통제(?)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모든 것은 자신들이 살기 위하여.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디그롬이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떤 다음 말을 이었다.
“뭐, 다들 잘 지내는 것 같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긴장 놓지 마. 이대로 정기 훈련까지 쭉 이어져야 해.”
“알겠습니다, 디그롬 경.”
“그런데, 차기 기사단장에 대한 지시는 아직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음. 그에 관한 말은 없었다.”
“저희야 디그롬 경이 단장이 되면 좋겠는데…….”
조장들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디그롬은 고개를 저었다.
“대공자님의 성격상 그건 어려울 것 같다. 최소한의 신뢰만 확보되면 실력만 따지시겠지.”
“그래도 순수 맥라인 출신 중 처음으로 상급의 경지에 오르시지 않았습니까.”
“운이 좋았던 거야. 너희들도 운 좋게 열 번만 연달아서 죽을 고비 넘어 봐.”
“그 전에 죽죠, 보통.”
“그러니까 운이 좋았다고. 내가 아이기스에서…… 으으, 생각만 해도……. 아무튼. 그 천재 3인방도 금세 경지에 오를 테고, 저기 저 핸더슨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별거 아니야.”
디그롬의 말에 나머지 기사들이 놀라서 커진 눈으로 핸더슨을 돌아보았다.
그에 핸더슨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함으로써 무언의 긍정을 표했다.
철혈검이라는 뛰어난 중급 검술과 연이어진 전쟁이 맥라인 기사들의 수준을 전체적으로 높여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전 디그롬 경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모든 것은 영주님과 대공자님이 결정하실 일이다.”
디그롬은 자신을 위하는 소수의 의견(?)을 가볍게 묵살했다.
“모든 것은 가문을 위하여!”
“위하여!”
그렇게 회의의 끝을 고하려는데.
“크, 큰일 났습니다!”
쾅!
“이번 정기 훈련을 대공자님이 주도하신답니다! 영주님 참관하에요!”
급하게 뛰어 들어온 기사 하나가 절망적인 소식을 전했다.
그 순간 맥라인의 수위기사들이 주변의 동료들을 향해 일제히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대체 누구야?!”
“난 아냐 절대!”
“실수한 놈 잡아 와!”
“대체 어떤 놈이……!”
기사들이 생존을 위해 만든 야합의 장은 금세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 * *
“생소한 얼굴들이 많군. 반갑다. 내가 로건 맥라인이다.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예!”
단상 위에 올라선 뒤 짤막하게 던진 소개말.
300명이 훌쩍 넘는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꽂혀 들었다.
‘확실히 많아.’
이번에 얻게 된 칼리아 영지에서 이전한 기사만 200여 명.
거기에 맥라인의 이름이 유명해지면서 몇 주 사이 등용을 청해 합류한 자유 기사들도 있었다.
대부분 내전에서 주군을 잃은 자들이었지만, 원래 자유 기사는 사고를 쳐서 쫓겨난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검증이 필요했고.
아버지가 면접과 정보 길드 녹스를 통해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는 이들을 열 명 넘게 걸러 냈음에도, 총 스물두 명의 자유 기사가 맥라인에 합류했다.
가문의 위상이 올라갔다는 게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표정만 보아도 느껴지는 것 같아 로건은 또다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왜인지 바짝 긴장해 있는 기존 기사단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것이야 지금 해 줄 말 한마디면 확실히 해결될 터였다.
“자! 새롭게 태어난 맥라인 기사단의 첫 정기 훈련이다. 새로운 얼굴들이 많으니, 기존의 훈련과는 조금 다른 형식을 취하겠다.”
“……?”
모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로건을 향할 때.
로건은 웃으며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통보했다.
“우리 기사단 훈련은 조금 힘들기로 유명하다. 하니 기존의 맥라인 기사단이 교관이 되어 새로운 얼굴들이 우리 훈련에 적응할 수 있게 돕는다.”
그 말에 기사단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표정이 변한 것은 아무래도 바짝 얼어붙어 있던 기존 맥라인 기사단이었다.
“뭐야? 우리 안 굴러?”
“우리가 굴리……는 쪽이라고?”
“누가 잘못한 게 아니었어?”
그 어리둥절한 마음들은 결국 한 가지 방향으로 수렴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기존의 기사단원을 우대해 주다니?
우리 기사단에 언제부터 그런 좋은 관례가 있었다고?
그러니 이건…….
‘시험이다.’
엉뚱한 생각이 맥라인 기사들 머릿속에 동시에 떠올랐다.
“불안한데?”
“어. 나도.”
“우리가 교관이라고 너무 막 대하면…….”
“……우리가 구를 각이지.”
“자자. 평등하게. 평등하게. 똑같이. 똑같이.”
그들이 들뜬 마음 가운데서도 조심스레 서로를 단속할 때.
이적한 기사들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작정하고 굴리겠다는 건데.”
“어쩐지 잘 대해 주더라.”
“그만큼 더 힘들겠군.”
“그래도 견뎌야지.”
“물론이지.”
서로의 오해가 교차하는 가운데.
새로 태어난 맥라인 기사단의 첫 정기 훈련이 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