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71)
171화
“오, 클레오. 들어오라.”
익숙한 이인 듯 얼핏 반가운 기색까지 보이는 왕과 달리,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에 눈썹을 치켜올린 검공은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곧바로 열린 대전의 문 사이로 처음 보인 광경은 그의 눈가에 경련이 일게 하는 것이었다.
궁녀들이 들고 들어오는 화려한 궁중 음식들.
만찬에서나 볼 법한 호화로운 음식들을 들고 들어오는 궁녀들의 의상 또한 하늘하늘한 얇은 천 너머로 속살이 비치는 남사스러운 꼴이라 검공은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폐하. 이게 대체…….”
“아. 말했잖소, 제사라고. 추도식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 오늘이 27제의 마지막이니 너그러이 봐주시오. 하하하.”
그 말에 검공의 미간이 티 나지 않게 좁혀졌다.
27제(祭). 천상의 9대신에게 번갈아 3일씩 죽은 자의 넋을 기리는 추도식.
물론 세상 어느 나라의 추도식도 이렇게 술과 음식을 즐기는 법은 없었다.
검공은 실망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애써 화제를 돌렸다.
“저자는 처음 보는 이인 것 같사옵니다만?”
궁녀들을 시켜 음식을 정리하고, 그 옆에 소매에서 꺼낸 술을 올려놓던 사람 좋은 인상의 관리가 순간 흠칫했다.
“아, 본래 내궁부의 서기관이었는데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재주가 있어 이번에 시종장으로 뽑았소이다. 왕사께서도 앞으로 어지간한 것은 클레오에게 시키면 될 것이오.”
“미천한 자가 대공을 뵙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시종장의 태도에는 모자람이 없었지만, 지금 상황 때문인지 검공은 본능적으로 그가 거슬렸다.
“오늘 27제가 끝난 이후에는 폐하의 건강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거라. 약주도 줄이시도록 신경 쓰고.”
시종장에게 하는 말의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왕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
그런데 눈치가 없는 것인지.
“제가 어찌 폐하의 뜻을 움직이겠습니까. 저는 그저 명대로 따를 뿐이옵니다.”
시종장이 신경에 거슬리는 답변을 하고.
“걱정이 과하시오, 왕사. 내 어련히 조절할까.”
왕조차 다소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신하로서의 충언은 도리지만 군주가 거부하는데도 강요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지라, 검공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아니오. 공이 짐을 위하는 마음을 어찌 모르겠소. 다만 짐은 이제 그대가 지켜야 할 어린아이가 아니니 너무 과한 걱정은 자제해 주시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그래. 대화가 옆길로 샜구려. 어쩐 일로 여기까지 발걸음을 하셨소이까?”
“예. 다름이 아니오라…….”
검공은 불편한 주제를 피해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왕궁 앞에 엎드린 카이런 울브스에 대한 전하의 결정을 여쭙고자 왔습니다. 그자가 그곳에서 말라 죽기라도 하면 왕실에 관한 헛된 소문이라도 퍼질까 걱정스럽습니다.”
“아, 그 기회주의자 말이오? 안 그래도 슬슬 결론을 내리려고 했소이다. 아직 왕실의 내실이 회복되지 않았으니, 괘씸하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겠소이까?”
다행히 왕은 자신과 같은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단, 작위는 강등하고 변방의 작은 영지만을 남겨 두는 것과 함께 병권 또한 제한할 생각이오. 그리고 그 숨겨 둔 재산이란 것을 볼 때 최소한 왕실 마탑의 장로급은 동행하도록 하면 될 것 같은데.”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왕의 총기가 흐려지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검공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하하. 자, 딱딱한 볼일 끝났으면 왕사께서도 한잔하십시다. 설마 우리 사이에 일 얘기만 하고 가려던 것은 아니지요?”
왕의 권유에 억지로 술잔을 들어야만 했다.
‘내가 대낮에 술을 마셔 본 게 언제였더라?’
오늘따라 술이 유난히 쓰기만 했다.
* * *
“각하. 왕실에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살펴보심이…….”
그다지 즐겁지 않은 긴 잡담 끝에 왕실을 나서던 검공은 갑자기 자신을 붙잡는 궁내부원의 목소리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왜 내게 말하지?”
“클레오 님께서 폐하와 면담 중이신지라 여쭐 곳이 각하뿐이옵니다.”
“누군지 몰라도 폐하의 용무가 먼저다. 후에 다시 연락하라 통보하면 될 일 아니더냐.”
“하오나 그게…….”
쩔쩔매는 관리의 태도에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했던 검공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그리할 수 없는 통신이더냐?”
“예. 로건 맥라인 백작님의 통신입니다.”
꿈틀.
“아, 로건. 하……. 그래, 안내하거라.”
“감사합니다, 각하.”
제자가 왕실에 남겨 놓은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것도 그리 달갑지는 않은 일이라, 연신 굽실거리는 관리의 모습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생을 쌓아 온 명예에 흠집을 내 가면서 연 새 세상.
그 세상이 그가 짐작한 미래와는 조금 어긋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조금씩 무겁게 가슴을 누를 뿐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로건.]“……스승님? 왜 스승님께서 이 통신을 받으십니까?”
로건은 통신구에 비친 얼굴을 향해 예를 취하다 말고 당황했다.
[폐하는 지금 용무 때문에 바쁘신 듯하구나. 그냥 내게 말하거라.]그나마 그 스승조차도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모습.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아니다. 아직은.]“아직?”
스승의 미묘한 단어 선택에 로건의 안색이 굳어지는데.
[……신경 쓸 것 없다. 볼일이 있어서 왕실 통신을 이용한 것이 아니더냐. 용건이나 말하거라.]스승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캐묻는 것도 도리가 아니기에, 로건은 스승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거니 생각하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제 가신 중에 작위를 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미 논공행상의 보상으로 받은 수여권은 모두 사용한 상황이라 폐하께 간청드려 남작위 제수가 가능할지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지금 로건의 입지라면 그 정도야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말에 가뜩이나 좋지 않던 검공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작위를 말이냐? 로건, 원칙을 벗어나 권한을 남발하기 시작하면…….]“그것도 타락이겠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약속드립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애를 쓴 가신에게 적합한 보상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 실책을 늦게나마 만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로건은 최대한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 아예 바짝 엎드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연달아 한숨을 내쉬던 검공은 한참 후에야 포기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하아, 그래. 그 정도는 내가 말해 보마. 하지만 명심하거라, 로건. 이유 없는 작위 수여는 이게 마지막이다.]“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곧 소식 전해 주겠다.]“감사합니다, 스승님.”
통신은 검공의 답변 없이 그대로 끊어졌다.
아무리 자신의 요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태도.
‘진짜 무슨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걱정되는 스승의 모습에 잠시 고민하던 로건이 통신실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어흐흑. 공자님, 왜 저를 위해서. 이 못난 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어헝헝.”
감격에 겨워 얼굴이 엉망이 된 드웨인이 통신실로 뛰쳐 들어왔다.
로건은 결국 털보 행정관의 오열에 이은 격한 포옹을 억지로 떼어 내느라 한참을 애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웨인의 남작 임명권은 불과 일주일 만에 맥라인에 전해졌다.
* * *
“……이에 공헌한 바가 크므로 평민 드웨인 필스너를 남작위에 봉한다. 국왕 로저스 폰 그란디아, 대독.”
“우와아아아아!”
로건이 칙령을 읽자마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행정부서에 모인 모든 관리들과 시종들, 그리고 병사들까지.
드웨인을 둘러싼 모든 이에게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 것이다.
털보 행정관이 그동안 크게 잘못 산 것은 아닌 듯, 지켜보는 이들 대부분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흑.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일주일 전에도 오열하며 감격을 표했던 환호의 당사자가 다시금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고.
흠칫한 로건이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가 피식 웃으며 드웨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우리 형님이 귀족이 되셨다!”
“다시는 우리 무시하지 마! 엉!”
뚱보 3인방의 나머지 두 명의 외침을 시작으로.
“축하드립니다, 드웨인 남작님!”
“드웨인 필스너 남작님! 축하드립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축하 인사와 함께 드웨인은 그 커다란 덩치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인파에 휩쓸려 한동안 떠들썩하니 관저를 굴러다닐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 그 파비안이랑 로크만이라 했던가? 그 새로 온 관리들도 잘 부려 먹을 수 있겠지?”
아직 감정이 채 정리가 안 된 듯한 드웨인이 우는 건지 웃는 건지 기묘한 표정으로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들이 저보다 능력이 뛰어난 건 사실인데.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거야. 나 행정은 잘 모르잖아. 조금만 더 도와줘. 은퇴할 생각은 말고. 알았지?”
“예, 예! 공자님. 서류 읽을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앞으로도 서류 작업은 당신이 다 해 줘야 하니까.
다시 행정에서 손 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로건은 그 생각만으로도 흐뭇하게 웃을 수 있었다.
드웨인의 작위 수여는 생각보다 반향이 컸다.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기존의 행정관들이나 새로 뽑힌 관리들의 사기마저도 극한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 우리 맥라인 영지는 문관도 충성심과 능력을 증명하면 귀족이 될 수 있다.
행정 부서의 서류 처리 속도가 훨씬 빨라지고 관리들의 얼굴은 여전히 피로해 보였지만, 한편으론 이상할 정도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것이 과연 얼마나 갈지는 몰라도.’
더구나 아직 마감하지 않은 관리직 지원자는 그사이 몇 배로 늘어났다.
적어도 당장 일거리가 많은 맥라인에게는 아주 긍정적인 일이었다.
* * *
“저기 저 바글거리는 사람들은 다 뭔가?”
“아, 관리 지원자들입니다.”
“관리 지원자? 문관들?”
“예. 헤인켈 님.”
“관리를 뽑는데 사람이 저렇게나 많이 몰린다고? 그거 좀 똑똑해야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영지가 유명해지면서 인재들이 여기저기서 다 찾아온다고 들었습니다. 듣기론 기사들도 수시로 등용을 청한다고…….”
“호오, 그래?”
병사의 말을 들은 헤인켈의 눈이 번뜩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관저로 찾아갔다.
“대공자님!”
“오, 헤인켈 경. 어쩐 일이십니까?”
“관리직 선출에 하루에 천 명씩 몰리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왔습니다.”
“어? 경이 행정 관리들에게도 관심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글도 알고 고등 교육도 받은 이들이 저 정도로 몰린다면, 지금 병사 모집을 하면 훨씬 많은 수가 지원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왕국 최고 실세로 떠오른 맥라인의 병사가 되는 일.
전쟁도 없는 시기이니 지원자가 폭발할 것이 뻔했으니까.
“아, 그렇지 않아도 마침 병사 모집도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기존 병사들만으로는 넓어진 영지에 필요한 최소 병력도 못 맞추고 있으니까요. 직접 맡아 주시겠습니까?”
석궁을 사용할 병력은 기존의 자경단만 확대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미래에 기사가 될 가능성 있는 이들을 최대한 많이 뽑아서 훈련시켜는 것도 반드시 해야 할 일.
로건으로선 이 노가신이 의욕을 가지고 그 일을 맡아 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헤인켈은 그 말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입니다. 선발 기준은 예전에 공자님이 말씀하신 그 감각 시험으로 하겠습니다.”
“예. 그래 주십시오. 혹여나 이상하시더라도…….”
“절대 아닙니다. 안 그래도 그 기준으로 뽑힌 녀석들이 다른 녀석들보다 포스가 훨씬 빨리 모이는 것 같았습니다.”
“……예?!”
헤인켈의 말은 로건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걸 느끼실 수가 있습니까?”
자기 자신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일.
그것을 포스를 잃은 기사가 할 수 있다고?
“예. 그게…… 포스를 잃고 나니 오히려 잃은 것에 대해 더 민감해진 것 같습니다.”
그게 된다고?
어떻게?
‘포스를 잃은 뒤에 더 민감해졌다? 그런 말은 전생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로건이 내심 당황하는 줄도 모르고 헤인켈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그래서 더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기사가 될 가능성이 있는 녀석들이 제대로 보이니까요.”
“아…… 예…….”
“그럼 정확한 필요 인원과 훈련 일정은 추후에 보고서로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예, 예. 그러시죠. 그런데 헤인켈 경. 그 느낌에 관한 이야기 좀 자세히 해 줄 수 있습니까?”
그제야 로건의 표정이 조금 달라진 것을 인식한 헤인켈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예. 그거야 어렵지 않지요.”
헤인켈은 부상으로 몸이 망가진 이후 변화한 감각에 대해 로건에게 자세히 털어놓았다.
‘흐음. 이럴 수가 있나.’
로건은 헤인켈의 말이 만들어 놓은 생각의 고리에 빠져들어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했다.
헤인켈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미 로건만이 예전부터 느끼고 있는 사실을 그가 확인한 것으로 증명이 되었으니까.
다만 그 과정이.
그의 말이.
무언가 강렬하게 로건의 무의식을 자극했다.
‘애초에 기사가 포스를 잃고도 살아나는 일 자체가 특이한 경우긴 하지. 더구나 헤인켈 경의 경우는 오러에 중상을 입은 것이니까. 더욱 특이한……. 그래, 오러!’
포스를 근원부터 흐트러트리는 파괴의 권능, 오러.
그리고 오러로 인해 포스를 잃고 난 뒤에 깨어난 감각.
‘전생에 내가 죽었을 때…….’
그 마지막에 보았던 장면.
그리고 회귀했을 때부터 얻게 된 초월적 감각.
그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순간, 로건의 손끝에서 일렁이기 시작한 황금빛.
그 빛은 밤이 깊어 갈수록 조금씩 그 진한 황금색 빛깔을 더해 가기 시작했다.
기존의 포스와는 확연히 다른, 상서로운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