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네?”
“데이트. 아니, 아니지.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물었다.”
“아…… 하. 하. 하. 결혼……이요?”
전설에나 나오는 8서클의 빙계 마법을 맞은 것처럼 몸이 굳어 버린 로건은 눈알만 또르르 굴렸다.
에일렌의 시선이 옆에서 느껴지는 와중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결……혼?’
솔직하게 말해, 아예 잊고 있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만을 생각하며 줄곧 달려온 나날들.
극단적으로 말해 5~6년 뒤에는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미래를 상상할 여유가 있겠는가.
물론 처음 에일렌을 영입하려 했을 때는 결혼할 생각이 있었다.
미래에 초인이 될지도 모르는 여기사.
충분히 그만한 가치를 가진 인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 후에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특별한 감정이 생긴 것이 문제였다.
‘내가 제대로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녀를 아낀다면, 그렇다면 더욱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로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고는.
“아, 제가 잊고 있었던 게 갑자기 생각났네요. 잠시만…….”
후다닥.
되지도 않는 변명을 남겨 놓고 바람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굳어 있던 두 사람.
붉으락푸르락 시시각각으로 얼굴색이 변하는 에엘렌의 옆에서 그녀의 눈치를 보던 패드릭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내가…… 실수한 건가? 공녀?”
“아니, 아니에요. 아버님.”
생각 외로 차분한 에일렌의 목소리에 패드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로건 공자가 실수한 거죠.”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섬찟한 목소리에는 헛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들……. 무조건 빌어라.’
방문 너머 사라진 아들의 명복을 빌어 준 패드릭은 자신이 던진 폭탄의 여파를 외면한 채 조심스레 그 자리를 피했다.
‘뭐 이런 바보 같은…….’
얼떨결에 자리를 피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변명이었다.
차분히 말하고 설득하면 될 것을 왜 이리 도망쳐 나왔단 말인가.
“한심한…….”
어느새 성 밖으로 나와 버린 로건이 그제야 발길을 멈추고 한숨을 쉬고 있는데, 멀리서 에일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다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린 로건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쉰 뒤 크게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에일렌의 반응이 의외였다.
“공자가 그렇게 당황하는 거 처음 봤어요.”
피식 웃으면서 말을 꺼내는 그녀의 모습에 왜인지 안심이 되고, 그렇게 안심하는 스스로가 더 한심하게 느껴졌다.
“……미안합니다. 못난 꼴을 보였네요.”
“괜찮아요. 사실 저도 좀 당황스러웠어요. 공자처럼 도망갈 생각은 못 했지만.”
“……죄송합니다.”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죠.”
“예?”
멍하니 되묻는 로건에게, 에일렌이 웃으며 답했다.
“결혼이요.”
“아…….”
“오늘이야 그렇다 쳐도 앞으로 어른들 재촉이 점점 심해질 텐데, 그렇다고 바빠서 미루겠다는 말을 계속할 수는 없잖아요.”
“그건…… 그렇죠.”
“적어도 언제쯤에는 하겠다고 말해 놔야 이런 상황이 또 안 생기죠.”
그 말에 로건의 안색이 또 살짝 흐려졌다.
그 모습에 에일렌 역시 표정이 조금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가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혹시 로건 공자…….”
“……?”
“나 말고 따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건 아니죠?”
“저, 절대 아닙니다!”
훅 들어온 질문에 로건이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건 다행이네요. 저도 딱히 다른 사람은 없어서.”
“예……?”
순간 마주친 시선.
멍하니 서로를 보던 두 사람은 이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솔직히 처음에는 화가 났었어요.”
한참을 웃은 뒤 에일렌이 꺼낸 첫마디.
살짝 당황한 로건을 보고 빙그레 웃은 그녀가 하늘을 보며 말했다
“결혼할 연인……이라고 생각한 사람한테 거절당한 느낌이었거든요.”
연인.
사실 누가 봐도 그렇게 지내 왔지만 그런 단어를 직접 쓴 것은 처음이라 말을 하는 이도, 듣는 이도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거절이 아니라…….”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정말 결혼이 하고 싶어서 이곳에 왔던가 하고.”
굳이 변명하려던 로건이 움찔하고.
“꿈꿔 왔던 것들이 현실이 됐고, 꿈만 꾸었을 때는 예상치 못했던 현실의 차가움도 다 극복해 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현재에 안주해 버린 내가 나도 모르게 공자한테 기대고 있었나 봐요.”
하늘을 바라보던 에일렌의 시선이 다시금 그의 얼굴에 꽂혔다.
“나 꼴사납죠?”
“……그럴 리가요.”
한심한 건 나예요. 당신이 아니라.
그렇게 대답을 하고 싶었는데.
“뭐, 감정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아요. 공자는 내게 기회를 줬고, 그래서 제 현실이 바뀌었어요. 고맙고 또 고마웠고, 그래서 저도 공자를 돕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공자가 좋아졌어요.”
“예?!”
갑작스러운 고백에 멍하니 얼어붙고 말았다.
“당연히 결혼할 사이라 생각해서 한 번도 묻지 못했네요. 로건 공자. 공자는 저 안 좋아해요?”
“다, 당연히 좋아…….”
순간 튀어나온 진심에 당황한 로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에일렌은 또 크게 웃었다.
“아하하. 다행이다. 에휴, 나 지금 속으로 되게 긴장하고 있었던 거 알아요?”
“……아. 그, 그게.”
“뭐 어쨌건, 그럼 됐어요. 서로 마음만 확인하면 됐지. 결혼 얘기는 말을 좀 맞춰 봐요. 또 미루더라도 말이에요.”
찡긋 윙크하는 에일렌의 모습이 각인 되듯 눈동자를 파고들고, 로건은 가슴속 꽉 막혔던 무언가가 뚫리는 후련함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또다시 마주 보며 웃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정말 왜 도망갔어요?”
“……사실 결혼에 대해 생각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좀 놀랐어요.”
“바보예요? 놀랐다고 도망가게? 제가 아버님 앞에서 얼마나 민망했는지…….”
“미안해요. 정말.”
할 말이 없어진 로건은 뻘쭘하게 하늘만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에일렌이 갑작스레 툭 물었다.
“그런데 로건 공자. 진짜 저와 결혼하는 게 싫은 건 아니죠?”
그 질문에 로건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저한테 과분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그리고 그 답에는 본인도 당황할 만큼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러자 에일렌이 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럼 우리 언제 결혼할까요? 임시 날짜라도 잡아 놔야 할 상황인데.”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슬며시 손을 잡는 에일렌.
어쩐지 남녀의 관계가 반대로 된 것 같은 느낌에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또 그만큼 사랑스럽기도 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예? 왜요?”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질 겁니다.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해도 아마 온전히 가정에 신경을 쏟을 수는 없을 거예요. 아마도 최악의 남편이 될 겁니다.”
나름의 진심을 담아 말했는데.
“……그게 다예요?”
에일렌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
“예?”
“정말 그게 다냐구요.”
“아, 아니. 그게 쉽게 말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적어도 5~6년은 훨씬 바빠질 게 뻔…….”
가정을 내팽개치듯이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 다 같이 죽을 수도 있다.
치명적인 그 말은 차마 내뱉지 못하고 꿀꺽 삼키는데.
에일렌이 한마디로 그 논리를 뒤엎었다.
“그럼 그 바쁜 일 좀 더 잘할 수 있게 안정적인 가정이 있어야겠네요.”
“……예?”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 한참 바빠질 일, 더 잘하기 위해서라도 안정적인 가정이 필요한 거 아니겠냐구요.”
“그, 그건 에일렌이 너무 피해를 보는…….”
“내가 왜 피해를 봐요?”
또렷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한점의 흔들림도 없었고.
“자신이 바쁘다는 걸 알고 반성하는 좋은 남편감이네요. 그리고 그 바쁜 것도 다 우리가, 우리 영지가 더 잘 살기 위함일 테고요. 그럼 나도 바쁠 게 뻔하고. 설마 내가 결혼하고 나면 기사 때려치우고 안방에 눌러앉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이어진 말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로건의 불안한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하……. 내가 바보 같은 생각을 했네요. 혹시나 나와 엮였다가 당신이 잘못될지도 모른다, 그런 걱정을 했어요.”
“장난해요? 난 지금 어차피 맥라인 가문 사람이에요. 기사에, 약혼녀에, 이미 왕국에 알려질 대로 알려졌는데 이제 와 결혼만 안 한다고 바뀔 게 있을 것 같아요?”
위로받기가 무섭게,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에일렌의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푹 찔렀다.
어……?
그런……가?
새,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그러다 문득 자신이 했던 생각이 우스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일단 결혼한다고나 해요. 한 내년쯤? 그때 되어서는 다시 핑계를 찾아보죠. 우리가 조금은 덜 바빠지고, 서로 좀 더 마음에 여유도 있는 좋은 날에 하겠다고.”
그 말에 로건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에일렌을 바라보았다.
결혼 얘기가 나오자마자 도망간 남자.
어처구니없는 핑계.
‘분명히 화가 났을 텐데…….’
얼마나 실망했을까.
얼마나 화가 났을까.
그럼에도 자신을 감싸 주려고만 하는 여자.
이런 행동 또한 자꾸만 피하려 하는 자신을 향한 배려일 터.
작게 한숨을 내쉰 로건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흠칫 놀라는 모습. 깍지를 낀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이상하게 든든해서 자연스레 진심이 나왔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네요. 바보 같은 말이었어요. 미안해요.”
“자꾸 똑같은 말만 할 거예요? 지금…….”
“그러니까. 우리 결혼해요.”
“……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는 에일렌.
어느새 붉어진 두 눈에 또 미안함이 느껴지고, 달아오른 얼굴이 더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래서 더욱 힘주어 다시 말했다.
“결혼하자구요. 핑계 대기 위한 날짜를 잡는 게 아니라 정말로 진지하게.”
엉뚱한 걱정을 하던 조금 전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시간.
“지, 진짜예요?”
“예. 진심이에요.”
그 단순한 말 한마디에 환하게 웃음 짓는 에일렌을 보며 로건은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난…… 그냥 겁이 났던 거야.’
손안에 들어온 이 모든 것들이 언젠가 사라질까 봐.
책임지지 못 하는 일들이 벌어질까 봐.
애초에 그 모든 것들을 막기 위해 살고 있으면서, 혹시나 실패할까 두려워 겁을 먹고 있던 것이었다.
‘난 반드시 성공할 거야. 해낼 거야. 그러니까…….’
꽈악.
이 순간 또한 지켜 낼 것이다.
“고마워요.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품에 안고 서로의 심장 소리를 느끼는 이 순간이,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도록.
“사랑해요.”
“……?!”
입술에 와닿은 이 포근한 감촉을 언제까지고 추억할 수 있도록.
들판을 걷고 있는 연인들의 뒤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석양처럼 상기된 얼굴들은 꽉 잡은 두 손을 절대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아무런 대화가 없음에도 돌아가는 발걸음은 느리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타운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결혼식은 영지 일이 얼추 정리된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아요.”
“예?!”
“오래 기다리게 안 할게요.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바쁜 일이 많잖아요.”
여자의 얼굴이 샐쭉해지고, 남자의 등허리에 식은땀이 조금 흐르긴 했지만.
다행히 여자는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뭐, 그 정도야…….”
“고마워요.”
“그런데 그 위험한 일이라는 거, 끝까지 말 안 해 줄 거에요?”
“……때가 되면 말해 줄게요. 괜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요.”
“지금 그 말도 되게 걱정되는 거 알죠?”
“약속할게요. 꼭 그때가 되면 말해 주기로.”
“그래요. 약속.”
정식으로 청혼을 하고, 받은 날.
청혼을 한 남자의 손에는 반지조차 없었지만, 여자의 표정은 더없이 밝기만 했다.
그날 이후, 맥라인 타운의 사람들은 로건과 에일렌이 함께하는 모습을 전보다 훨씬 자주 보게 되었다.
“곧 결혼시키면 되겠군.”
그렇게 흐뭇한 표정으로 아들 연인을 보는 패드릭의 모습도 익숙해질 무렵.
리이나 울브스가 맥라인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