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75)
175화
“이 동네가 이렇게 변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네.”
은발의 미녀가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다소 초췌한 안색에도 그 미모는 가려지지 않는바, 맥라인의 관저를 걷는 모든 이들이 한 번쯤은 그녀를 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유일한 일행인 여시종은 다소 여유가 느껴지는 상전과는 다르게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아가씨,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혹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괜찮아. 그는 아직도 날 잊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도 그렇게 파혼을 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대립하는 거야 당연한 거지. 자존심이 상했을 테니까. 하지만 확실해. 그 남자는 날 못 잊어.”
상전이 단언하자, 시종은 그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리이나 역시 시종의 불신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녀는 정말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 아름답고 고요한 이곳에서 로건 공자님과 만든 추억들, 어린 마음에 남겨진 소중한 순간들을 이렇게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눈물을 연기하던 그 순간.
세상의 온갖 감정이 다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를.
파혼 당시 자신과 격렬히 대립했던 것도 그만큼 자신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리이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자, 다시 한번 확인해 줘. 나 좀 힘들어 보여?”
“예, 아가씨. 화장도 그렇고 의상도 준비하신 그대로 완벽합니다.”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해 마련한 낡은 드레스마저도 일부러 고풍스러운 차림을 한 듯 보이게 만드는 미모.
시종의 눈에도 확실히 리이나는 예쁘긴 예뻤다.
“그래. 다시 맥라인을 붙잡고 가문을 일으켜 세운다.”
이 자신감이 과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물론 정말 그녀의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예, 아가씨. 그리되실 겁니다.”
시종의 목소리에 믿음이 부족하다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 해도, 내가 이 가문의 안채에 들어앉게 되는 것만으로 내겐 더 좋은 일일 테니까.’
리이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처연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이제부터 원하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완벽한 연기를 해내리라 다짐하며.
* * *
“누구?”
“공자님의 전 약혼녀 말입니다. 리이나 울브스…….”
“아니, 그 이름은 아는데 그 여자가 여길 왜 찾아와?”
“공자님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허?”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
로건은 최근에 들었던 울브스 가문에 관한 소문을 떠올렸다.
왕실에 전 재산을 기부하고 작위 강등, 원래의 땅도 잃고 변방의 영지로 유배되다시피 한 가문.
그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가문의 장녀가 자신을 찾아올 이유를 생각해 봤을 때, 그리 유쾌한 만남이 되진 않을 듯했다.
“됐어. 드웨인 자네가 적당히 응대해서 그냥 돌려보내.”
“공자님을 ‘직접’ 만나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뭐?”
“그렇다고 귀족 일행을 억지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괜히 무력을 썼다가는 뒷말이 나올까 조금 걱정됩니다.”
“억지에 억지로 응답하는 것뿐인데 뭘. 흠…….”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한창 바쁜 시기에 괜한 구설수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일단 가 보지, 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나 보게.”
무슨 헛소리를 하건 무시하면 그만이니까.
로건은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옛 약혼녀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끼이이.
응접실의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대기 중이던 이들이 일제히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가운데에 있는 여자.
‘리이나…….’
허리까지 내려오는 반짝반짝 빛나는 은발.
그에 어울리는 뽀얗고 투명한 피부와 흑요석처럼 새카만 눈동자.
또렷한 이목구비는 여전히 감탄사가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초췌한 표정과 그늘진 얼굴조차 감싸 안아 주고 싶은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미녀.
무채색의 수수한 드레스조차 화사해 보이게 만드는 그녀의 미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그 정체를 모른다면 말이지.’
로건이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옮기자, 그를 본 리이나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건 공자님.”
검은 눈동자에는 슬픔이 가득했지만, 행동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안쓰러워 보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
저 모습이 진짜건, 연기이건 대단하게 느껴져 로건은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오랜만에 보는군요, 공녀. 그런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먼 길 오실 만한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그 축객령이나 다름없는 인사에 검은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지만, 대답엔 막힘이 없었다.
“예전의 무례를 사죄드리고 저희 가문과 맥라인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흠, 새로운 관계라. 그런 말을 하려면 카이런 울브스 ‘자작’이 직접 오는 게 낫지 않았겠습니까?”
상대의 아픈 상처를 슬쩍 건드려 봤지만, 이는 그녀 역시 예상한 것이었는지 이번에도 쉽게 답이 나왔다.
“아버지께선 가문의 복권을 위해 무리를 하시다 그만 쓰러지셨습니다. 그럼에도 직접 오시겠다는 것을 한사코 말리고 제가 온 것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 옛 친구나 친구의 자식에게 고개를 숙이기는 싫었겠지.
그 정도는 로건도 이해했다.
“저런,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런데…….”
대화를 길게 끌고 싶지 않았던 로건은 좀 더 세게 나가기로 했다.
“우리 맥라인으로선 굳이 구원을 따지지 않더라도 울브스의 조력이 필요 없는 상황입니다. 충분히 알고 있으실 것 같은데요.”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럼 조건을 말해 보시죠.”
“예?”
“그냥 빈손으로 와서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을 텐데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 예, 예. 그렇습니다.”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녀가 이내 준비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시겠지만, 저희 울브스는 가문의 복권을 위해 많은 것을 투자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경쟁력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저희…….”
“짧게 부탁드립니다, 공녀. 내가 좀 바빠서.”
“……울브스가 대를 이어 쌓아 온 상인으로서의 ‘인맥’은 물질적인 자산보다 큰 재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흠. 하지만 그 큰 재산을 활용할 최소한의 자금도 없을 텐데요. 지금의 울브스는.”
연달아 날아오는 뼈를 때리는 말들.
‘역시 아직은 날이 서 있어. 조금 더 감정을 담아서…….’
서글픈 표정을 지은 리이나가 입술을 깨물며 다시 한번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도움을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공자님. 옛정을 생각하시어 저희 가문을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저 절실한 감정 표현 중 몇 퍼센트나 진심일까.
리이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연기로 느껴진다는 것을 자각한 로건이 무의식적으로 실소했다.
‘내가 아직도 이 여자한테 피해망상이 있나? 아니면 정말 연기를 하는 건가.’
알 수도 없었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말을 하러 굳이 이 멀리까지 온 것입니까? 새로 받은 영지가 여기와 정반대쪽으로 알고 있는데, 왜 주변에 부탁하지 않고요?”
그 말에 리이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스스로도 놀란 듯이 황급히 눈물을 닦아 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감정이 좀 격해져서.”
흔들리는 로건의 표정을 확인한 리이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면서도 처연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이 나라에 맥라인과 척을 진 가문을 도와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공자님, 제발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세요.”
붉은 눈동자의 흔들림이 더욱 커진 것을 확인한 리이나의 눈이 살짝 휘어졌다.
‘확실해. 이 남자, 나를 포기 못 했어.’
그러나.
‘어우, 난 너의 그 눈물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고 이 여자야.’
로건이 흔들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이유는 리이나의 기대와 정반대였다.
미녀의 눈물.
그것은 확실히 유효한 무기였지만, 지금은 대상이 최악이었다.
로건은 소름이 돋아 오른 팔뚝을 자신도 모르게 쓸어내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척을 지다니요. 우린 그저 파혼하고 대가를 주고받은 것으로 끝난 관계 아니었나요?”
“그것을 증명하는 것만으로도 저희 울브스에는 큰 도움이 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리이나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다시 눈물을 흘릴 듯 애처롭게 보였다.
‘이래서야 누가 보면 내가 악당이라고 생각하겠군.’
전생의 악몽 같은 일을 자꾸 떠올리게 만드는 저 얼굴을 얼른 치워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우리 맥라인에도 도움이 될까요?”
가문 대 가문. 귀족 간의 일은 결국 대부분 이득으로 다 설명이 되는 것이었고, 우리가 얻을 이득이 없으니 관두자는 말이었는데.
‘역시. 쉽게는 안 된다 이거지? 하지만 여기서 바로 결혼 얘기를 꺼내면 내가 너무 싸 보여. 그럴 순 없지.’
리이나는 사전 작업을 위한 다른 수를 꺼내 들었다.
“저희 울브스는 인맥을 통해 맥라인의 특산품을 세상에 팔아 큰 이득을 안겨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그 말에 로건의 눈빛이 바뀌었다.
“음?”
이건 좀 뜻밖이었다.
그냥 뇌물이나 준다고 하면 무시하고 돌려보낼 생각이었는데.
“특산품? 어디 계속 들어 보지요.”
“내전에서 그 가치를 증명한 맥라인의 신무기들이야말로 맥라인의 특산품이 아닐까요? 저희 울브스에게 맡겨 주신다면, 최소한 원가의 30배 이상의 수익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허……?”
“단순히 왕국에 국한되지 않고 동쪽의 소왕국 연합이나 서쪽의 제국까지, 대륙 동부 전역에 유통망을 가진 저희 울브스 가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뭔가 했더니.’
로건의 흥미가 단숨에 식었다.
“그 얘긴 못 들은 거로 하지요. 잘 돌아가시오, 리이나 공녀.”
단숨에 일어서려는데.
“로건 공자! 제발 옛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얘기를 들어주세요!”
그의 앞에 황급히 다가온 리이나가 무릎을 꿇었다.
옛 인연?
떠오르는 것은 분노뿐이라,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 듯, 리이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특히나 그 폭탄, 시제품을 본다 해도 어차피 재현하지 못할 소모품. 그것을 값비싼 상품으로 생각하여 판매하신다면 맥라인 영지는 왕국이 아닌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부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저희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진심으로 간절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
하지만 로건의 대답은 같았다.
“맥라인의 무기는 판매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공녀.”
차갑게 대꾸하고 돌아서는데.
‘좋아. 이 정도면 일반적인 제안은 할 만큼 했어. 이쯤에서 제대로…….’
결연한 표정을 지은 리이나가 다시 로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이 싫으시다면 더 좋은 제안도 있습니다.”
“예?”
“제가 공자님과 혼약을 맺겠습니다. 그것으로 두 가문은 완벽한 신뢰를 얻고 그를 통한 상호 간의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떠세요?”
자신만만한 표정.
좀 전까지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던 얼굴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는 듯한 그 표정에 로건은 어이가 없어졌다.
“무슨 착각을 하고 있나 본데…….”
“네?”
“차라리 그 전보다 못한 조건입니다. 전혀 끌리지 않는군요. 제가 왜 공녀와 결혼을 합니까?”
그 단호한 대답에 리이나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무너졌다.
“그, 그런……. 아! 혹시 예전의 일 때문이시라면 사, 사과드릴게요. 더글라스 공작가에서 압박이 와서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던 일이에요! 원하신다면 당시에 주고받은 문서도 보여 드릴 수 있어요!”
그 급작스럽고 쓸데없는 해명에, 로건은 그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더 할 말이 없다면 그럼 이만. 무사히 돌아가십시오, 공녀.”
그 말에 리이나의 표정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러다 로건이 문을 열려는 순간에야.
“자, 잠깐만요! 공자님!”
한 톤 더 올라간 리이나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질기군. 이 여자.’
한숨이 절로 나오는데.
“공자님. 정말 저를 사랑하지 않으셨나요?”
“……뭐?”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로건이 황당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호, 혹시 약혼녀 때문이라면 저, 저는 첩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공자님만 저를 원하신다면, 저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처연한 표정에 이어진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 결국 그는 무례한 웃음소리로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
“푸하하하하!”
또 울어?
너 정말 대단하다.
“하하하하. 아, 이거 미안합니다. 하하하. 아니. 아흐. 흠. 흠. 이거 정말 죄송하지만,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 말합니다. 난 당신한테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공녀.”
“아니, 그럴, 그럴 리가…….”
“무언가 서로 간에 큰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길게 바래다 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공녀.”
문을 열어 주며 정중히 허리를 숙인 로건.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리이나는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도망치듯 응접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