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76)
176화맥라인의 수확기가 지나가고, 거둬들인 세수로 인한 예산 편성이 끝났다.
맥라인과 비프로스 평야, 그리고 내전 후 확장된 다른 성들까지.
금액으로만 따지자면 8천만 골드가 넘는 어마어마한 예산.
하지만 그럼에도 로건의 표정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금광에서 자체 생산하는 금액에도 못 미치네.”
“……공자님. 지금 엄청 배부른 소리라는 거 아시죠? 몇 년 전을 기억하신다면 정말 그러시면 안 됩니다.”
어이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드웨인을 보며 피식 웃은 로건이 바로 말을 돌렸다.
“전후 내부 정비가 끝나 가니 다행이군. 우선적으로 마탑에 지원금 다시 편성하고. 아, 곡물이랑 마차, 지원자들 분류 다 해 놨지?”
“예.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그래. 그럼 필립 불러.”
“그런데 정말 하실 겁니까? 필립은 몰라도 그 사람은…….”
“드웨인. 두말하게 하지 마. 이미 하기로 했잖아.”
“……예.”
무언가 못 미더운 듯 표정이 찜찜한 드웨인이었지만, 지시를 어길 수는 없었다.
이내 필립이 집무실로 불려 왔다.
또르르.
눈앞에 따라지는 찻물 소리에 맞춰, 필립의 회색 눈동자가 좌우로 굴러갔다.
‘날 왜 불렀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행정 관리가 늘어난 만큼, 사실상 임시직이었던 필립은 최근 자주 태업을 하고 있었으니까.
지루한 서류 작업은 대충 끝내 두고, 물자가 넘치는 타운의 시장 상황을 파악하거나 소문을 수집하며 어떤 곳에서 뭐가 잘 팔릴지를 골몰하고 있던 요즘이었다.
그 상황에서 실권자가 이런 자리를 만들었으니…….
게다가 뒤쪽에서 지켜보는 행정 관리들의 수장, 드웨인 필스너 자작의 시선 또한 살벌하기만 했다.
그러니.
“요즘 일할 만해? 지루하지?”
“죄송합니다!”
질문이 나오는 순간 필립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반면.
‘왜 이래, 이놈?’
로건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제가 요새 딴생각을 하다가 사실 좀 일을 소홀히 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딴생각?”
“요즘 어느 지역에 어떤 물건이 유행하는지 소문을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무슨 장사를 하면 잘 될지 뭐 그런 것들을요. 제가 아무래도 너무 오래 이곳에 머물다 보니 방랑벽이 도져서……. 죄송합니다!”
“흠……. 그래서 결론은?”
“예?”
“그 딴생각의 결론 말이야. 우리 맥라인엔 뭘 팔면 잘 될 것 같고, 다른 데엔 뭘 가져다 파는 게 좋겠냐고.”
필립의 눈동자가 다시 굴러가는가 싶더니.
“맥라인의 영지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당연히 무기……는 안 파시겠지요. 아하하. 그럼 당연히 두 개의 평야에서 생산되는 곡물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필요한 것이라면 여전히 생필품입니다.”
막힌 둑이 무너지며 물이 쏟아지듯, 한 번 쏟아져 나온 필립의 말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영지 전체로 보면 여전히 유민들이 증가하고 있는데, 소작할 땅을 준다고 해도 기본적인 생활 도구들은 직접 만들어 쓰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장인의 명품까지는 아니더라도 수공예품이 넘치는 제국 동부의 대도시 루스펠하임에서라면 충분한 물량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왕이면 이곳의 곡물을 북부의 트리탄 영지에…….”
“아아. 그만, 그만. 잘 알겠어. 행정직보다는 상단을 운영하고 싶다는 말이겠네.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불안한 눈빛이 사라진 자리에 작은 불꽃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어쩌면…….’
로건의 긍정적인 말투에서 희망적인 예감을 느낀 것이다.
노예나 다름없는 계약을 한 뒤 임포릭이라는 물건으로 대박을 터트렸지만, 그 이후로는 심심하기 이를 데 없는 일만 해 왔는데.
최근의 지루한 인생이 확 달라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필립은 그 기대를 실제로 보답받을 수 있었다.
“사람은 적성과 재능에 맞는 일을 하는 게 맞겠지. 그래서 자네에게 맥라인 상단을 맡길까 해. 우리 가문이 후원하는 대표 상단으로 말이야.”
“저, 정말입니까?”
필립이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놓고 가문의 깃발을 달고 그 후원자를 명시한 귀족 상단은 든든한 자본과 권력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는 장점 때문에 일반 중소 상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용 거래가 가능했다.
더군다나 지금의 맥라인이라면 사실상 왕국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가문.
기본만 해도 왕국 상계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위상을 갖게 될 것이었다.
무엇을 거래하든, 무슨 짓을 하든 말이다.
웬만한 상인들은 맥라인과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적당한 이익 감소를 각오하고 맥라인 상단에 물건을 떠넘길 것이다.
‘그런 상단을 나에게 맡긴다고? 대체 뭘 믿고? 아 맞다. 계약…….’
순간 흥분했던 마음이, 자신이 직접 서명한 노예나 다름없는 계약서를 떠올리자마자 싸늘하게 식었다.
누가 운영을 하건 왕국에서는 이득을 볼 것이 확실한 상단.
그 대표자로 사실상 노예인 자신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지루하게 서류 작업이나 하는 것보다는 나아. 예상 이상의 수익을 안겨 주면 평가도 달라지겠지.’
필립이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며 주먹을 불끈 쥐는데.
“왕실과 상인 길드에 사전 서류 작업은 다 해 놨고, 자네 말대로 넘치는 곡물도 천만 골드 어치는 준비해 두었어. 잡부로 쓸 지원자 천 명과 호위로 쓸 기사 30명, 그리고 자네 상행을 보조해 줄 열 명의 관리들까지 딸려 보내 주지.”
“……예?”
기대보다 더한 말이 들려왔다.
“왜, 모자라?”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 정도면 시작으로서는 넘칩니다!”
“그래. 예비 자금으로 천만 골드짜리 쿠퍼스 뱅크 계좌도 만들어 놨으니 대륙 동부의 대도시에서는 얼마든지 유통해도 돼.”
“천만을 더…….”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금액에 필립의 눈이 살짝 풀리는가 했지만.
“그리고 상단 수익금 0.5%는 자네 성과급으로 주지.”
이어진 말에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아. 아으아…… 지금 뭐라고 하셨……?”
“성과급. 0.5%라고.”
“아, 예. 제 귀가 잘못된 줄……. 하하. 자본금 2천만으로 시작하는 상단의 성과급 0.5%…….”
그렇게 중얼거리던 필립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다시 자리에 앉고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앗 뜨거!”
피식.
“천천히 마셔. 그리고 천천히 생각해 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바로 출발해도 되고,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면 더 줄 수도 있어.”
“제, 제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왜 이렇게 크게…….”
“내가 자네와 상단에 바라는 것은 딱 두 가지야. 하나는 상단의 기본인 이익을 내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 거래 지역을 제국으로 해서 그 안에서 독자적인 인맥과 상행 루트를 만들어 놓는 것.”
“제국…… 말씀입니까?”
왕국의 대형 상단 중에 제국과 거래를 하지 않는 상단은 없다.
그 커다란 시장에 뛰어들지 않은 상단은 거상이라고 볼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로건이 말한 두 번째 조건은 단순히 일반적인 상행 루트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자네는 장사를 잘하고, 믿을 수 있는 인맥들을 만들어 놓으면 되는 거야. 제국 내부에.”
로건의 다독이는 말에도, 필립의 눈빛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확실히 눈치도 있고…….’
전생의 황금충은 왕국의 유민 출신으로 제국 내부에서 10대 거상의 지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맥라인의 깃발을 달고 국제 상단을 시작한다면, 아무리 시간과 자본을 투자한다고 한들 제국 내에 전생의 황금충만큼의 영향력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제국이 능력자를 우대한다고는 해도, 자국민과 외국인을 똑같이 대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철저하게 차별하지.’
국적을 버리고 제국으로 귀화하는 것도 능력이 증명된 자에 한해 가능했다.
적어도 기사급이나 마법사, 상인이라면 그 기준이 더욱 높아 자수성가한 대상인 급은 되어야 했다.
그 후에도 충성을 증명한다는 핑계로 10년간 국가가 벌이는 일에는 최우선 징발 대상이 되는 수준.
그러니 제국 전쟁 전까지 필립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제국 동부에서 무시 못 할 영향력을 갖추는 것 정도였다.
그 범위가 어디까지일지, 즉 전생의 황금충이었던 재능이 어디까지 개화할지를 알 수 없을 뿐.
“그 인맥이란 게 어느 정도 수준을 원하시는 겁니까? 단순 거래 상대를 말씀하시는 건 아닌 것 같고.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수준? 아니면 혹시 절대 배신하지 않는 수준을 원하시는 겁니까?”
“……후자면 좋겠군.”
어렵겠지만, 그렇게 예상하고 기대치를 말해 본 것인데.
“사람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뭐?”
“이미 제국의 대도시에 확고한 거래처를 뚫어 놓은 거상과 최소 5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시작하기에는 너무 무리한 조건이에요.”
필립은 예상외의 답을 내어놓았고.
다행히 둘 다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범위 내의 것이었다.
“충분하군.”
“예?”
“그러면 사람을 붙여 줄 테니 한번 실행해 봐.”
“저기, 공자님. 제 말 똑바로 들으신 것 맞죠?”
“어. 안 그래도 딱 네가 원하는 사람을 불러 놨어. 드웨인, 그 사람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옆에서 불안한 얼굴로 지켜보던 드웨인이 느릿한 발걸음으로 움직이고.
필립은 황당한 눈으로 로건과 드웨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예?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닌데요?”
제국의 대도시에 확고한 거래처를 뚫어 놓은 거상이라니, 말은 간단해도 왕국에 몇 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중 하나는 지난 내전에서 사망했으며.
하나는 가문 자체가 몰락했고.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끼이익.
“……어?”
“불렀나, 로건 공자.”
“에이. 섭섭하게 왜 그러십니까, 외삼촌. 편하게 말씀하시라니까.”
로건의 보기 드문 환대에도 똥 씹은 표정을 버리지 못하는 이.
왕국 3대 상단 중 곡물 상단으로 유명한 카이로스 상단의 현 대표이자 카이로스 가문의 후계자, 베론 카이로스였다.
“카이로스 상단의 대표님이 자네를 보좌해서 상단을 도울 것이야. 인맥 하나는 어마어마하지 않겠나?”
“헐…….”
필립이 외마디 감탄사를 흘리는데.
“자. 외삼촌, 인사하시지요. 맥라인 상단의 대표가 될 필립 클로드입니다.”
“하아……. 그나마 성은 있군. 귀족인가?”
“아니요. 먼 선대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성만 있는 평민입니다.”
“지금 나더러 평민의 부하가 되라…….”
“싫으세요? 흠, 카이로스 가문이 배가 불렀나 보네요, 아직.”
“……면 돼야지. 암,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베론 카이로스 님.”
“그……래. 잘 부탁하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모든 거래의 결정권은 필립에게 있습니다. 외삼촌은 인맥 소개와 보좌면 충분합니다. 아시겠지요?”
“무, 물론이지.”
똥 씹은 표정이 억지웃음으로 변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보였지만, 필립은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두 달 전.
맥라인 전투에서 후안 더글라스의 목이 잘려 나갔을 때.
카이로스는 가장 먼저 항복을 택한 가문 중 하나였다.
그 전에 이미 가문의 기사단은 박살 나 있었으며, 병사조차 얼마 남지 않았던 상황이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하지만 그 후로도 카이로스 가문은 암담한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내전이 끝나고 이 나라를 휘어잡은 가문 중 하나가 과거에 카이로스가 매몰차게 외면했던 맥라인이었고.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암담한 미래뿐이었으니까.
결국, 카이로스 가문의 늙은 가주 사이먼 카이로스는 자신의 딸에게 철판을 깔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 제발 살려 다오. 그래도 너의 본가 아니냐.
그런 전서를 받은 메리안은 매우 미안한 얼굴로 로건에게 말을 전했고.
“무시해도 된다, 로건. 나는 딸 된 도리로 그냥 말만 전했을 뿐이니까. 나도 버림받은 딸이잖니.”
“아닙니다, 어머니. 마침 딱 필요한 일이 있었으니까요.”
로건은 그 제안을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베론 카이로스가 맥라인에 오게 된 것이었고, 맥라인 상단의 출범은 순조롭게 시작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불꽃 문양의 깃발을 세운 대규모 상단 행렬이 맥라인 타운의 중심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