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며칠 전, 그란디아 왕성.
“과연 현명하십니다, 폐하.”
재상, 로버츠 플로이드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자 국무회의에 참석한 대신들 모두가 똑같이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익숙한 광경.
거기까지만 했으면 딱 좋았을 텐데.
항상 같은 말이 덧붙었다.
“그럼 이 건은 제가 로건 백작과 상의해 본 뒤 다음 회의에 다시 안건으로 올리겠습니다.”
꿈틀.
국왕 로저스는 그것이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리게 느껴졌다.
평상시라면 웃어넘겼을 얘기에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올렸을 정도로.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리려는데.
“폐하, 어디 불편하시옵니까?”
군주의 마음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얼간이가 더욱 심기를 건드렸다.
아니, 알면서 그러는 것일까?
……그럴 리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
왕은 점점 신경질적으로 흘러가는 생각을 한편에 눌러둔 채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아니, 아니오. 좀 피로해서 그런 듯하오, 재상. 오늘 회의는 이쯤 하겠소.”
“……알겠습니다, 폐하.”
재상이 그렇게 고개를 숙이며 물러서는데.
쓸데없는 목소리들이 말꼬리를 잡고 이어졌다.
“하루 빨리 국모가 되실 분을 찾아야겠습니다, 재상.”
“맞습니다. 긴 밤에 홀로 외로우시니, 피곤하실 수밖에요.”
“하하하. 정말 그래야겠습니다.”
신하들이 군주와 친하면 이렇게 농담을 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우리가 친했던가?
……언제부터?
까득.
쾅!
로저스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치자, 일순간 대전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대신들의 당황스러운 듯한 시선이 모이자 그는 곧바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빌어먹을…….’
이 무슨 바보짓인가.
군주가 격한 감정을 내보이다니. 그것도 이런 시답지 않은 이유로.
“흠흠. 혼사는 적당한 때가 되면 그때 내가 먼저 말하겠소. 아직 연치가 어린데 국사를 서두를 필요는 없소이다.”
애써 차분히 말해 보는데.
엉뚱한 이가 엉뚱한 말을 꺼냈다.
“팔먼 백작의 말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닙니다, 폐하.”
로버츠 플로이드.
또 무슨 속셈이냐.
왕은 자꾸만 삐딱하게 흘러가는 생각을 애써 통제하며 표정을 최대한 온화하게 유지했다.
“무슨 뜻이오?”
“폐하께서 성혼하시어 하루빨리 후계자를 생산하셔야 이 나라의 미래가 든든해지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웃으며 하는 그 말이 왜 이렇게 고깝게 들릴까.
자기도 모르게 또 삐딱한 말이 튀어 나갔다.
“내가 그 전에 죽기라도 한단 말이오?”
“폐하.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재상, 아니 그 로건 맥라인의 장인이 당황하는 것이 가슴속에 저열한 쾌감을 만들어 냈다.
그러면서도 그런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래서일까.
정말 숨기고 싶었던 속마음이 툭 하니 튀어나왔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상관없지 않나. 그러면 어차피 왕이 될 사람은 정해져 있는데.”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왕자를 왕으로 만들어 버린 자 말이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지으면 그대가 정말 나의 충신 같잖아.
‘한심하군. 내가…….’
자리에 더 앉아 있다가는 계속해서 못 볼 꼴을 보일 것 같아 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쿠궁.
신하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대전의 문을 나서자, 익숙한 얼굴이 그를 맞이했다.
“폐하. 모시겠습니다.”
끄덕.
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데도 충실한 왕실 시종장, 클레오는 그의 불편한 심기를 읽은 듯 바로 움직였다.
그러다 한참을 걸어 답답한 마음이 조금 풀렸다 싶을 때.
“폐하. 회의에서 불편하신 일이 있으셨습니까?”
클레오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말을 걸어 왔다.
그래, 이런 재주가 있는 자라 곁에 둔 것이지.
왕은 자신이 최초로 승진시킨 신하를 조금은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의 치부를 숨김없이 말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별것 아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소신은 그저 용안이 어두워 보이시길래…….”
“아니, 그럴 것도 없다. 국사를 논하는 자리에 어찌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흔한 일이다. 흔한 일…….”
왕은 왕인데, 진짜 왕이 아닌 것 같은 더러운 기분.
그래. 최근 들어 자주 느끼는 흔한 일일 뿐이었다.
“그럼 평소처럼 약주를 올릴까요?”
익숙한 신하가 답답한 마음을 능숙하게 긁어 주었다.
“그리하거라.”
그래, 그나마 이런 작은 위안이라도 없으면 답답해서 어찌 살까.
* * * 쪼르륵.
창가를 비추는 달빛이 환하게 집무실을 밝히고, 잔 안에 떠오른 작은 달이 고요하게 마음을 달래 주는데.
오늘 대전에서의 실수가 유난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직도 멀었구나. 나는…….’
쭈욱.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화끈한 느낌이 이내 시원하게 가슴을 씻어 내렸다.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는 기분.
“클레오.”
“예, 폐하.”
멀리 문 근처에 시립해 있던 충실한 신하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이 술의 이름이 뭐랬지? 오늘따라 유독 맛이 좋구나.”
“제국의 명주 중 하나인 플람마라고 합니다, 폐하.”
“플람마?”
“예. 고대어로 불꽃이라는 뜻이라 하옵니다.”
멈칫.
“……그래. 그럴 만하군. 그대가 추천한 술이던가?”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송구하다니. 칭찬을 하는 것인데. 하하.”
“황공하옵니다.”
“황공하기는, 내가 고맙지. 이 술만큼 내게 위안이 되는 게 없어.”
“…….”
쪼르륵.
다시 한번 잔을 채워 들어 올리니, 어느새 또다시 차오른 달이 눈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불꽃이라…….’
하필 그 이름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일까.
평상시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 또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자네는 로건 맥라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을까.
클레오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내란을 종식시키고 폐하를 옹립한 일등 공신이지요.”
왕국의 아무에게 물어도 비슷하게 나올 만한 정석적인 대답이었다.
조금 더 덧붙인다면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는 말도 나올 테고.
“그래. 그렇지…….”
자신과 나이 차이도 몇 살 나지 않으면서 왕국을 뒤바꾼 자.
그리고 아무것도 없던 자신을 왕으로 만든 자.
분명 고마웠고, 고마워해야 하는 사람이 분명한데.
“나는 왜…….”
그가 거슬리는가.
자조 섞인 넋두리.
누가 들으면 곤란한 말이라, 끝말은 그저 홀로 삼키고 말았다.
그러다 이내 왕인 자신이 왜 곤란해해야 하는가 싶어서 또 화가 나고, 또 그런 자신이 한심해 실소가 나왔다.
만연한 달빛과 별빛이 어느 순간부터 아름답기보다는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사건이 일어났다.
“죽여!!”
복면을 쓴 스무 명에 가까운 자객들이 왕궁 내궁의 정원 깊숙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사색에 잠긴 왕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최소한의 호위만을 동행하고 있던 상황.
그나마 다행이라면 검공의 오른팔이자 최상급기사인 루이스 하이온이 세 명의 호위 기사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폐하를 지켜라!”
상급 셋. 중급 열다섯.
일순간에 적들의 견적을 낸 루이스가 상급기사 둘에게 왕을 맡기고 적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빠르게 적들을 처리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아아악!”
“괴, 괴물!”
“물러서지 마! 왕을 죽여!”
어떻게 왕궁의 심처까지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복면인 중 루이스를 막아 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복면인 일곱 명을 순식간에 참살한 루이스는 상급으로 추정되는 복면인 셋을 동시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의 곁에 남겨 두었던 에스페란자 기사단의 상급기사 둘도 복면인들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 내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스각.
“아악!”
루이스의 검이 또 한 번 붉은 빛을 토해 냈을 때.
습격자들의 대장으로 추정되는 이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고, 그 순간 놈은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모두 후퇴한다!”
“어딜!!”
루이스가 바로 뒤를 따라붙었지만.
“이거나 먹어라!”
번쩍!
다른 복면인 둘이 품 안에서 스크롤을 꺼내 찢으며 하나는 루이스에게, 하나는 왕에게로 던졌다.
“막아!!”
심상치 않은 마나의 유동을 느낀 루이스의 안색이 확 굳어지는데.
우르르릉.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펼쳐진 마법이 루이스의 시야와 감각을 차단하며 주변을 새까만 암흑으로 물들였다.
본능적으로 쫓던 걸음을 멈추고 방어 태세로 돌아섰지만.
‘……공격이 없어?’
긴장감과 의혹이 겹겹이 쌓여 가던 그때, 마법의 효과가 사라지면서 반쯤 폐허가 된 정원의 모습이 드러났다.
루이스의 시선이 황급히 뒤로 돌아가고.
“폐하!”
그의 입에서 탄성과 함께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무언가 강렬한 마법에 당한 듯 부하 중 한 명이 새까맣게 탄 채로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왕은 무사했으니까.
그러자 다시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짧은 접전의 순간 여기저기가 파헤쳐진 정원의 모습이었다.
그렇다. 그저 온통 폐허가 된 정원.
‘시체는?!’
약간의 핏자국이 그들이 남긴 흔적의 전부였다.
왕을 습격한 놈들이 동료의 시신까지 수습해서 도망쳤다고?
더구나 이런 강력한 스크롤이 있으면서 왜 처음부터 안 쓰고? 무슨 제약이라도 있었나?
온갖 의문이 루이스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왕을 보필하는 것이 먼저였다.
루이스가 심중의 의혹을 한편에 밀어 둔 채 왕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폐하, 무사하십니까?”
그 물음에 왕이 멍하니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충격이 가시지 않은 표정.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아. 그래, 난 괜찮다. 수고했네. 빨리 사제를 부르게. 테닌 경부터 살려야지.”
루이스는 왕이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감사합니다!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크게 소리쳐 사람을 불러 보지만 다가오는 이는 없었고, 다른 상급기사 페론이 직접 정원 밖으로 나가 사람을 불러온 뒤에야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왕실 정원 경비의 근무 교대 순서가 누군가에 의해 완전히 꼬여 버린 순간에 일어난 사건.
왕궁 심처에서 일어난 국왕 암살 미수 사건은 일순간에 내궁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 * * 쾅!
“흔적도 찾을 수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왕이 느끼고 있는 분노를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었다.
당시엔 그저 당황스럽고 멍할 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자각이 들면서 인내심의 한계를 맞이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분노 앞에서 왕실 마탑의 탑주, 체이슨 리버필드는 백발의 머리를 숙이며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마법으로 흔적을 지웠습니다. 현장에서 시체가 된 이들이 흘린 피 말고는 핏자국조차 남기지 않았습니다. 생명 추적, 흔적 추적 마법이 전부 듣지 않습니다. 놈들 가운데 초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사전에 철저히 준비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찾을 수 없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불같은 눈길에 체이슨 마탑주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고, 그를 대신하여 옆에 선 검공이 왕의 말을 받았다.
“체이슨 탑주를 탓할 때가 아닙니다, 폐하. 일단 소문이 퍼지는 것부터 막아야 합니다.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기에 나라가 혼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책임자 처벌은 제가 직접하고, 입단속도 제가 하겠습니다.”
“놈들이 누구일지 짐작은 가나?”
“……어쩌면 잠적한 1왕손을 추종하는 무리일 수도 있습니다.”
검공이, 로건이 왕실을 점령했을 때 이미 사라지고 없던 유일한 왕손을 언급했다.
“클래비스? 그 어린아이 말인가?”
“당시 1왕자 파벌의 기사들 중 1왕손과 같이 사라진 이들이 꽤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그들이 제일 유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끄응. 뭐 아무래도 좋소. 대공, 대공께서 범인 색출에 힘써 주시오. 클래비스건 아니건, 철저히 뿌리 뽑는 것을 목표로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마법으로도 흔적을 찾지 못한 이들을 어찌 잡아야 하나.
그런 고민에 앞서 검공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일단 군주의 분노를 달래고 봐야 하니까.
“내 호위 병력은 한동안 두 배로 늘리겠소. 이만 물러나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집무실을 나서는 왕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왕국의 정점에 있는 강자들에게 사태 수습을 맡겼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까.
‘왕실 마탑주가 못 찾을 정도면…….’
이 들끓는 분노를 해결할 대상을 찾아내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폐하. 모시겠습니다.”
왕의 집무실에서 침실까지 이어지는 길까지, 이제는 궁내부원이 아닌 기사단이 호위하기 시작했다.
왕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루이스의 얼굴을 보며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대공 각하라면 놈들을 박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비록 그가 아무도 믿지 못할 입에 발린 말을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 알겠다.”
마음이 조금은 안정되는 느낌.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래비스, 그러니까 1왕손이 무사하다 한들 그를 따르려는 귀족들이 있을까?”
“……예?”
“아니, 아니다.”
왕은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스스로 놀라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생각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세력도 없는 클래비스를 왕으로 만들려면 나를 죽이는 것만으로는 안 되지. 로건과 검공이 인정할 리 없으니까. 그렇다면 맥라인과 에스페란자 대공가를 꺾어야 한다. 거기에 힘을 합칠 바보들이 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자 최근 가슴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열등감이 다시금 수면 위로 치솟아 올랐다.
붉은 머리, 붉은 눈을 가진 자신만만한 얼굴의 남자가 다시금 그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루이스.”
“예, 폐하.”
“이 상황에서 내가 죽는다면 누가 왕이 될까?”
루이스는 그 물음에 차마 답을 하지 못했고.
왕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만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로건 맥라인이 수도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