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86)
186화
“정말 이대로 괜찮겠느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야죠.”
“그래, 그렇지. 하지만 그러면 폐하께서 어떻게 나오실지…….”
스승의 노안에 수심이 차오르자, 로건은 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굳이 캐묻기도 그런지라, 로건은 그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집무실 앞에 섰다.
로건이 고개를 끄덕이자 문 앞에 서 있던 기사가 크게 방문을 알렸다.
“펠릭스 에스페란자 대공과 로건 맥라인 백작 드십니다.”
– 들라 하라.
끼이익.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곧바로 보이는 굳은 표정의 국왕.
로건은 내심 한숨을 쉬며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암살범 중 일부를 체포하였으나, 그들이 모두 자결하는 바람에 소속과 배후를 캐내지 못했습니다.”
그에 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렇던가…….”
그에 로건의 눈썹이 자신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역시나 나를 의심하는 건가.’
예상은 했지만, 기분이 좋을 리 만무한 일.
그런데.
“그만큼 놈들이 철저히 준비했다는 것이겠지. 그럼 못 찾을 만도 하겠지요. 수고하셨소, 로건 공.”
왕에게서 의외의 반응이 튀어나왔다.
“……예?”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에 로건도 놀란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왕은 이전과는 달리 웃는 얼굴로 로건을 보고 있었다.
거기다.
“일전에는 큰일을 겪은 뒤라 내가 다소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인 것 같소이다. 로건 공, 이 부족한 군주를 용서해 주시오. 내가 공이 아니면 그 누구를 믿겠소이까.”
자리에서 일어난 왕이 로건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까지 얹으며 그렇게 말하는 순간.
로건의 뒤에 서 있던 검공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폐하……!”
하지만 로건은 스승처럼 그렇게 웃을 수가 없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왕의 얼굴은 분명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뭐가 이상한지 딱 집을 수는 없어도 미묘한 괴리감이 느껴지는 그 웃음.
그렇게 웃는 이들을 로건은 잘 알고 있었다.
전생의 독립군 시절, 그도 정체를 감추기 위해 많이 했던 일이니까.
‘연기…….’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지만, 그것을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로건은 왕과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하하하. 당연한 것을.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지요. 이 모든 게 우리가 그간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사이가 다소 소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소이다. 이 기회에 우리 조금 더 가까워져 봅시다.”
“……예?”
“들라 하라!”
갑작스러운 왕의 명령.
하지만 그 명령과 함께 여러 가지 음식들과 술을 든 궁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연달아 들어왔다.
로건이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안색을 살짝 찡그리는데.
“폐하, 대낮부터 이러시는 건…….”
“아아. 대공, 굳이 이런 날까지 간섭을 하셔야겠소. 나와 로건 공이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하는 자리 아닙니까. 이리 와서 대공도 한잔하시오.”
스승의 만류조차 웃는 낯의 왕을 멈추지 못했다.
그렇게 로건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낮의, 그것도 왕의 집무실에서의 술자리가 시작됐다.
“하하. 클레오, 술을 좀 더 가져오너라.”
“폐하, 과음하셨습니다.”
“이 좋은 날 마시지 않으면 언제 마시겠느냐. 더 가져오거라! 그런데 플람마 맛이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술을 빚은 시기와 곁들인 음식마다 맛이 조금 다른 것이 그 명주의 특징…….”
“그래? 하하. 이렇게 또 하나 배우는군. 로건 공, 마음껏 드시오. 내 미안한 만큼 잔을 채워 주겠소이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사양치 않고…….”
어색하게 미소 짓던 검공조차 이내 빙그레 웃게 만든 즐거운 술자리.
대낮부터 이어진 그 술자리는 창밖으로 석양이 질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왕과 로건, 검공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를 파했다.
“즐거우셨습니까, 폐하.”
모두가 떠나가고 둘만 남은 자리.
미소 짓고 있던 왕의 얼굴이 클레오의 말을 듣는 순간 거짓말처럼 굳어졌다.
“으음. 이거 억지로 웃기 힘들군.”
“……예?”
“즐거울 리가 있겠느냐. 그저 잘 지내 보자는 인사치레일 뿐이다. 일전에 바보처럼 속마음을 내보인 어리숙한 실수를 수습한 것이지.”
클레오의 눈이 커지자, 그것을 본 왕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거라. 힘없는 왕이 당연히 해야 할 처신이었으니.”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저는 그런 뜻이 아니오라…….”
“평생을 한 곳만 보고 살아온 대공은 몰라도, 로건 공은 내 뜻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잘 지내 보자는 내 의도를 제대로 받아들였겠지. 군주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으로 표한 우회적인 사과, 아니 굴복의 표시니까.”
뿌득.
30분 전까지만 해도 환하게 미소 짓던 왕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것은 단순히 술기운이 만들어 낸 감정의 표출 같지는 않았다.
쌓이고 쌓인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모습.
“이 모두가 내가 힘이 없기 때문이다. 왕실에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야. 빌어먹을!”
거친 욕설을 내뱉는 왕의 모습을 보며 묘하게 눈을 빛내던 클레오는 왕이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그 눈빛과 미소를 감추었다.
“내가, 왕실이 힘을 가질 방법이 필요해. 방법이…….”
그리고 그런 그의 귓가에 왕의 간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
“폐하. 제가 부족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클레오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 * *
“폐하께서 오해를 푸셨다니 정말 다행이다. 허허.”
스승의 뿌듯한 웃음은 단순히 술기운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그간 노심초사해 온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웃음.
하지만 그 웃음소리를 듣는 로건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냐? 술이 좀 과했더냐? 아니지, 너 정도 수준이라면 그 정도 술로 흐트러지지는 않을 텐데?”
“아, 아닙니다. 그냥 생각할 거리가 좀 많아서요.”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설령 그 배후에 정말 1왕손을 추종하는 반란군이 있다 한들, 너와 폐하의 믿음만 굳건하다면 절대 이 왕국을 흔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게 아니니까 문제지요.
로건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왕국 기사들의 우상이자 표본인 스승에게 굳이 왕과 자신 사이에 오고 간 연기 같은 추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 스승님. 그래도 혹시 모르니 폐하의 주변을 잘 살펴 주십시오. 반란군만이 아니라 내부의 ‘독’도 문제니까요.”
로건은 왕의 변화를 말한 것이었지만, 스승은 그조차도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그래. 쓸데없이 폐하의 귀에 헛말을 집어넣을 간신들 또한 내가 알아서 쳐 낼 것이다.”
과연 그러실 수 있을까요.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는 대답이라, 로건은 괜한 걱정거리를 계속 안고 가는 대신 나름의 대비책을 떠올렸다.
“스승님.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
“음, 그래. 뭐든 말해 보거라.”
스스로 받아들인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왕과 자신의 연기가 그만큼 훌륭했기 때문인지 스승의 표정은 환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이 틈을 타 왕국 최고 귀족 가문의 비선 이용권을 좀 얻어 내야겠다.
“이번 일을 교훈 삼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제가 저만의 정보 조직을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에스페란자 대공가에도 그런 조직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아, 그야 있긴 하지. 흠흠, 외부에는 비밀이다만…….”
여전히 자신에게만은 너그러운 스승의 대답에 로건은 안도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담당자를 보낼 테니 그를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조직을 만들 때 참고할 수 있게만 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마. 우리 왕국의 기둥이 될 너를 위해 뭘 못 해 주겠느냐.”
죄송합니다, 스승님.
본의 아니게 또 스승님을 속이게 되었지만…….
‘적어도 그 결과물만큼은 말씀하신 대로 왕국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로 로건의 발걸음은 플로이드 백작가에도 이어졌고.
“허허허. 내 사위를 위해 뭘 못 해 주겠나. 뭐든지 말만 하게!”
흔쾌히 비슷한 허락을 받아 낼 수 있었다.
* * *
“이번 일도 수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탓이 커. 피동적으로 전해지는 정보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했던 거지.”
[예. 저도 동의합니다.]“그래. 그래서 우리 맥라인도 가문만의 정보 조직을 만들까 한다. 매번 정보 길드나 다른 가문에 의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
[좋은 결정입니다, 공자님.]“그러니 자네가 그 조직의 수장이 되어 줬으면 해.”
통신구 속 데미안은 기계적으로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 예? 왜 그런 자리를 저한테……?]“이번 일로도 도움을 받았고, 충분히 재능이 있어 보이니까.”
전생에 네가 엄청나게 잘했거든.
……라는 말 대신 그럴듯한 핑계를 갖다 붙였다.
[그냥 잔머리에 불과한 아이디어일 뿐이었는데요.]물론 그 핑계 역시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로건은 최근에 들은 보고를 떠올리며 웃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맥라인 영지의 성들 주변 마을에 주기적인 보고 체계를 만들어서 정보망을 구축한 게 자네라던데?”
다행히 전생의 이블 브레인은 현생에서도 그 재능을 어느 정도 발휘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만 전생과 비교하면 아직 자신감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았지만.
[그, 그거야 영지 구석구석의 소식을 빠르게 알려고 얕은꾀를 쓴 것에 불과합니다.]“그래. 나는 지금 그 얕은꾀가 필요해. 그 꾀를 전국으로, 혹은 제국까지 확장해 줬으면 하거든. 가능하면 외부에 티가 안 나도록 말이야.”
[저, 저에겐 과분한 일입니다, 공자님.]“월봉 세 배.”
[……뭐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피식.
그래, 자신감이 부족하다면 욕심으로 채워 주면 된다.
“에스페란자 대공가와 플로이드 백작가에서 요령을 가르쳐 줄 거다. 거기서부터 배워서 네가 만든 체계에 적용, 변화시켜 봐. 특히 중점을 둬야 할 것은 왕궁의 정보고.”
[예, 알겠습니다. 하면 바로 수도로 올라가면 될까요?]“그래.”
왕이 나를 의심하는 상황에 아무 조치도 없이 영지로 내려갈 수는 없으니까.
다시는 이렇게 어이없게 뒤통수를 맞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소한 왕궁, 왕의 정보는 철저하게 수집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영지로 내려간다.’
로건은 조금도 웃지 않던 왕의 눈을 떠올리며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후.
그보다 더욱 신경 써야 할 소식이 들려왔다.
– 신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아레스 제국의 황실 특사가 왕궁을 방문한다.
양국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특사의 방문 소식.
왕국의 귀족들 대다수의 이목이 집중될 사건이 터진 것이다.
* * *
“제국의 사절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통고만 하고 방문을 하던가요?”
“그럴 리가 있겠느냐. 즉위식 이후부터 이미 이웃 나라들에 소식을 알렸으니 조금 늦게 반응이 온 거겠지.”
“그래도 왕실에는 미리 알리고 오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래, 그랬다더구나.”
검공의 말에 로건이 멍하니 되물었다.
“예?”
“폐하께서는 알고 계셨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사신이 국경에 도착할 때가 다 되어서야 알려집니까?”
“큰일이 있었잖느냐. 폐하께서도 그 때문에 깜박하셨다고 하셨다.”
아니,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어떻게……?
로건이 황당한 눈으로 스승을 바라보는데.
“친선 사절인데 조금 늦게 알려졌다고 문제 될 게 있겠느냐. 그만 들어가자꾸나.”
멋쩍은 표정의 스승이 로건의 시선을 외면하며 앞장섰다.
로건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폐하와 따로 대화하신 뒤 바로 나에게 알려 주셨을 텐데…….’
왜인지 스승의 태도가 변한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지금은 훨씬 중요한 문제가 있었으니까.
‘설마 최악의 경우는…… 아니, 아닐 거야. 아직은.’
갑작스러운 제국의 사절, 그 이유가 선전포고는 아니길.
로건은 자꾸만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달래며 대전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