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91)
191화
“시, 실례했습니다! 지나가셔도 됩니다!”
행상인 행세를 할 때는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하고, 아예 뒤통수를 치기도 했던 제국의 국경 수비대가 바짝 얼어붙어 경례했다.
들고 있는 깃발이나 기사들 갑옷의 문양이 타국의 귀족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데도 마치 자국의 상급자를 대하는 태도.
그 모든 것이 로건이 내민 초청장에 새겨진 황금용의 문양 때문이었다.
“확인 끝났습니까?”
“예! 진품임을 확인했습니다. 시간을 지체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제국 상급기사의 태도는 지나치게 정중했고, 그것은 그의 부하로 보이는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사들이 전부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그 뒤의 바짝 얼어붙어 있는 병사들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그들이 잘못한 것이라고는 수상한 무력 집단, 그것도 확실히 타국의 기사로 보이는 20명을 멈춰 세운 것뿐인데 말이다.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나?’
독립군 당시, 아니 굳이 전생이 아니더라도 얼마 전 크라우네 때문에 왔을 때만 해도 제국 국경수비대의 태도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일개 행상인과 국가 사절을 대하는 방식이 같다면 그거대로 이상한 거지만, 그 태도가 과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고작 이거 하나로…….”
로건의 손에서 팔랑이는 초청장.
그 손짓에 따라 기사들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종잇장 하나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이 웃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멀리 떨어진 국경의 병사들이 초청장 하나에 죽는시늉까지 하게 만드는 지배자라…….
다시금 그를 초대한 자에 대한 상념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황제…….’
지그문트 반 세인트 3세.
제위에 오르자마자 대륙 서부의 강국, 아스만을 병탄하고 제국의 영토를 1/3이나 확대한 황제.
그리고 전생대로라면 5년 뒤에는 그란디아와 동부의 소왕국들을 완전히 복속시킬, 아레스 제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정복 군주.
그는 동대륙을 완전히 점렴하고 제위를 물려 준 뒤에도 상황이라 불리며 제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 자가 나를 찾는다……. 왜?’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쭉 생각해 온 것이지만, 아무래도 한 가지 이유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무기 때문일 확률이 높아.’
그중에서도 연사 석궁.
연사 석궁은 본래 제국이 그란디아 정복 전쟁에서 등장시켰던 무기였으며, 아마 이 시점에서 이미 개발 중일 수도 있는 무기였다.
자신들이 개발 중인 무기를 옆 나라에서 먼저 사용한 놈이 있다?
자신이라도 그놈이 궁금할 것 같았다.
‘뭐, 배 째라고 해야지.’
내가 먼저 만들었다는데 어쩔 것인가.
그렇다고 황제가 직접 초청한 자신을 바로 어찌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닌 다른 이유라고 해도 그가 취해야 할 자세는 똑같았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되, 제대로 아는 건 없어 보이게.’
제국의 황제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것보다는 무시당하는 게 차라리 낫다.
그렇게 생각을 가다듬고 있자니.
“주군,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상념이 너무 길었는지, 말이 없던 빅토르가 옆으로 다가와 자신을 재촉했다.
“아……. 그래, 가야지.”
만약 생각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가서 부딪쳐 보면 된다.
황제를 직접 만나 그 실체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데에는 도움이 될 테니까.
푸르륵.
말의 투레질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정리한 로건은 다시금 서쪽을 향해 질주를 시작했다.
* * * 애초에 날짜를 빡빡하게 잡은 만큼, 낮 동안은 일행의 질주가 계속해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해가 지고 야영을 할 때면, 로건은 검술 수련과 명상을 반복했다.
주변 기사들의 시선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에는 수련만큼 좋은 것이 없었으니까.
황제에 대한 기대와 걱정, 그리고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혹여나 생길지도 모를 영지나 왕국의 문제.
그 복잡한 상념들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에는 그대로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주군, 대련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되고말고.”
그 과정에서 기사들이 자신을 보고 배우는 것이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고.
로건은 기꺼이 빅토르의 대련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 상황에 수련이라……. 확실히 대단하군, 로건 맥라인.’
거목에 기대앉아 공터를 바라보는 루터 카일의 눈빛은 복잡했다.
‘황제가 불러서 가는 길인데 긴장도 되지 않는다는 건가.’
보통이라면 잠도 제대로 못 잘 것 같은데, 저 붉은 머리 애송이는 며칠 동안 행동에 전혀 변함이 없었다.
나이에 비해 놀라운 수준의 무력을 가진 것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릇도 크다는 거겠지. 확실히 영웅이라 불릴 만해.’
루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감탄이 나오면서도 씁쓸한 기분.
그 영웅이 밟고 올라선 발판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위가 강등되고, 영지의 절반이 몰수되었으며, 검공의 휘하 에스페란자 기사단에 묶여 자유도 잃게 만든 원흉.
솔직히 원망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다 내 업보지. 자꾸만 남을 탓하고 싶은 건 그만큼 내 속이 좁다는 것일 뿐이고.’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장인에게 ‘휩쓸려’ 전쟁을 일으켰다.
그가 받은 관대한 처분의 명목이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욕심이 있었기에 동조한 일들.
지닌 능력 이상의 것을 얻기 위해 욕심부리다 추락한 것에 구차한 변명을 가져다 붙여 봤자 스스로만 더 추해질 뿐이다.
지금은 그저 그럼에도 목숨을 건지고, 직계 가솔이나마 무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 뿐.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자, 자신을 제압해서 쓰러트린 원수이자 동시에 이 관대한 처분을 받을 수 있게 해 준 은인인 사람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 나는 자네가 내 제자를 도와줬으면 해.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야. 지켜보다가 그럴 만한 인재라고 생각이 들면…….
애증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 노회한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검공. 하지만 이렇게 흘러가는 대로 대충 사는 것도 그리 성미에 맞진 않는군요.’
루터는 결심이 서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자신보다 훨씬 어리고 미래가 창창한 젊은 영웅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애송이. 기왕 대련할 거면 나와 해 보는 건 어때?”
일순간 적막에 잠기는 공터.
모든 일행의 시선을 받으며 거인이 씨익 웃었다.
“저야 언제나 환영입니다.”
로건은 루터의 말이 기꺼웠다.
사실 오러에 대한 감을 잡아 가는 시기,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미묘한 감각에 신경이 조금씩 곤두서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초인과의 대련은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난 대련이라고 해도 살살 하는 법은 몰라. 내 전투 방식상 그러면 본 실력의 3할도 안 나오거든. 괜찮겠나?”
“전력을 다하셔도 좋습니다. 잊으셨나 본데, 위켄 공도 저를 꺾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루터 카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참에 그 말 뼈다귀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새겨 줘야겠군.”
사납게 미소 지은 초인이 등에 메고 있던 웬만한 성인의 몸만 한 워 해머를 꺼내 들었다.
당장이라도 애병, 워로드를 휘두르며 달려들 것 같은 모습.
하지만 거인은 그러는 대신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인상을 팍 찡그렸다.
“흠……. 애써 만든 야영지가 무너지면 안 되니 자리를 옮기지.”
눈을 반짝이며 대련을 기대하던 기사들의 얼굴에 실망이 떠오르게 만드는 뜬금없는 배려.
로건은 은근히 자상한 거인의 배려에 피식 웃으며 그 뒤를 따라갔다.
쿵.
“자, 오너라.”
야영지와 조금 떨어진 숲속의 넓은 공터.
그 말과 함께 자세를 잡은 루터 카일의 전신에서 살벌한 기세가 솟구쳐 올랐다.
그 거대한 덩치를 더욱 커 보이게 만드는 압박감.
“그럼, 사양치 않고.”
로건은 그 압박감을 고스란히 흘려보내며 루터의 전면으로 달려들었다.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의 모습만 보이는 듯한 착시 현상.
루터는 순식간에 공간을 압축하는 듯한 로건의 움직임에서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을 보았다.
그 소름 끼치는 귀신같은 움직임.
‘검공!’
그가 이를 악문 순간, 워 해머가 수평으로 전방의 공간을 쓸었다.
뻐어어엉!
전면의 공기를 터트려 버릴 듯한 거센 일격.
하지만 그 공격의 대상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고, 어느새 로건의 검에서 솟구쳐 오른 황금빛 포스블레이드가 뱀처럼 휘어지며 루터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었다.
‘뒤!’
루터는 그 공격을 무시하며 그대로 뒤쪽으로 망치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거센 충돌음.
하지만 역시나 아무런 충격이 느껴지지 않는 손의 감각에 루터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자신의 공격은 빗나가고 적의 공격은 정확히 그의 급소를 가격했다.
첫수부터 수 싸움에 밀린 것이다.
‘……이거 잘못하면 개망신을 당하겠는데.’
생각보다 더한 속도의 차이에 그가 안색을 굳히는데, 그것은 로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러를 전신에 두르는 건 반칙 아닙니까?”
그가 자신했던 스네이크 블레이드는 루터의 급소를 가격했음에도 조금의 상처도 내지 못하고 튕겨 나왔고, 적의 공격은 한 방이라도 맞으면 부상이 아니라 그대로 황천을 건널 것처럼 무시무시했다.
“흥. 억울하면 오러 쓰던지.”
전신에 상서로운 붉은 빛을 두른 루터가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으며 다시 워 해머를 들었다.
한 수의 교환만으로도 상대의 움직임이 자신보다 빠르다는 것은 확인했다.
‘아무리 내가 느린 편이라고 해도 그건 초인급에서나 통할 말인데.’
경지를 초월하는 로건의 움직임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대처할 방법이 있었다.
평생을 그 비슷한 방법으로 제 약점을 노린 맞수와 경쟁해 온 경험이 있었으니까.
“받아 봐라!”
번개처럼 다가가 수직으로 내려친 워 해머.
하지만 내려치는 순간 적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동시에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는 검격을 느꼈지만, 루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려치던 공격에 힘을 더했다.
꽈아아아아앙!
루터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가 다시 뒤를 노리려던 로건은 흔들리는 지면 때문에 ‘아주 잠시’ 균형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반전한 루터 카일의 워 해머가 다시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칫!’
간신히 피해 낸 공격은 다시금 지면을 거세게 강타하며 소규모 지진을 일으켰고.
몇 번이고 반복되는 움직임 끝에 로건은 공격 직후의 흔들리는 지면을 피해 살짝 뛰어올라 곧바로 루터의 목을 노렸다.
완벽한 카운터.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루터의 워 해머가 이제까지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로건의 전면으로 쇄도했다.
“윽?!”
본능적으로 풍신의 부츠를 발동, 허공을 딛고 가속하자 그 바로 앞으로 붉은 오러의 덩어리가 지나갔다.
뻐어어엉!
터져 나가는 공기의 여파에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는 느낌이 드는 순간, 로건이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흐른 땀이 그대로 증발하고 있는 듯 전신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루터가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시는 것이 보였다.
“일부러 공격 속도에 차이를 두는 겁니까?”
“느리면 느린 대로 타이밍을 교란하는 방법이 있는 거지. 눈에 익으면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을거다”
“……재미있군요.”
“글쎄. 너한테는 재미없을걸?”
“아니요. 재미있을 겁니다. 저한테도 숨겨 둔 수가 있거든요.”
“뭐?”
루터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로건의 애검 룩스에 맺힌 포스블레이드가 검 끝에 모여들더니.
번쩍.
우우웅.
어느 순간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상서로운 황금빛으로 화했다.
“……오러?! 너, 설마?”
“제대로 한 수 배워 보겠습니다, 루터 공.”
지켜보던 루터의 눈이 두 배로 커지는데.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로건이 창백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