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94)
194화 ‘그래. 생각났다.’
블레이크 이븐도어.
달리 부르길, 맹격의 블레이크.
전생의 제국 전쟁 당시, 제국군의 선봉이 되어 가장 먼저 그란디아의 국경을 넘은 초인.
그리고 그가 이끄는 병력의 십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에스페란자 공작군과 검공에게 막혀 최초로 사망한 제국의 초인이 바로 그였으니까.
후에 제국 내에서는 크나큰 오명으로 남을 이름이었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생명을 바쳐 그란디아 최강의 초인을 죽이는 데 성공했고.
핵심 전력을 잃은 그란디아 왕국군은 그 이후 밀려온 후속 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기준으로 제국에 존재하는 30명의 초인 중에서도 하위권으로 평가되던 자가 말이야.’
왕국의 입장에서는 체스의 퀸을 상대의 나이트나 비숍과 맞바꾼 것이나 다름없는 손해.
물론 상쇄된 병력의 차이는 무시했을 때 얘기였지만, 로건은 어쩔 수 없이 치솟는 심중의 살의를 숨기며 애써 이 황당한 상황에 집중했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제국의 초인께서 제 호위를 자청하시다니, 너무 과한 배려십니다.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아닙니다. 황제 폐하의 손님께 혹여나 불상사가 생길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입니다.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왜 이렇게까지?
고개를 숙이는 제국의 초인을 보고 있자니 로건으로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가 제국의 초인 중에서는 약한 편이라고는 하나, 달리 말하면 제국의 정점에 있는 30인 중 한 명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고작 친필 초청장 하나에 이토록 저자세로 나온다?
‘황제…… 대체 어떤 사람이지?’
막연하게 기록으로만 접했던 정복자의 실체.
그 일부를 목격한 것 같아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때.
“이봐. 우리한테 불상사가 생긴다면 네가 있어도 별반 달라질 게 없을 거야, 말라깽이.”
쿵.
한 발 앞으로 나선 거인이 무서운 기세를 뿜어내며 블레이크를 압박했다.
자신의 힘을 여과 없이 과시하는 그란디아의 초인.
하지만 그런 루터를 보는 블레이크의 눈동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고, 그는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루터를 도발했다.
“시골 촌구석에서 대장 노릇 좀 한다고 큰 세상에서도 통하는 게 아니지, 덩치.”
“뭐?!”
“폐하의 손님 앞이라 한 번은 참아 준다. 주제를 알고 찌그러져 있으라는 말이다.”
“허?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파지지직.
초인답게 유형화된 살기가 부딪치며 대기가 일렁였다.
느닷없이 벌어진 초인들의 대립에 로건이 인상을 찡그리던 그때.
“로, 로건 공. 일행분을 말리셔야 합니다.”
“예?”
“블레이크 경은 제국의 장군이십니다. 소국의 초인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장의 그 말이 로건의 신경을 건드렸다.
블레이크의 말과 행동을 보며 찜찜했던 마음에 시장이 쐐기를 박은 것이다.
‘아무리 루터 공의 말이 심했어도…….’
황제의 손님이라 지칭하는 자신에게만 정중할 뿐, 다른 일행은 깔보고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말이었다.
루터의 말이 그저 도발이었다면, 블레이크의 말은 부러 내뱉은 도발이라기보다는 평소의 생각이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시장의 말도 같은 맥락이었다. 자신의 말이 왕국 출신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조금도 자각이 없는 것이다.
그들에겐 그저 습관처럼 뿌리박힌 사상.
‘그래, 그 잘난 제국의 초인이 어느 정도인지 전력이나 구경해 보자.’
루터 카일이라면 제국의 하위 서열의 초인 정도는 바닥이 드러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이 약간 섞이긴 했지만, 보다 전략적 선택을 위해 로건은 시장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시장님, 죄송하지만 루터 공이 저렇게 나오면 저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예? 그, 그럼?”
“시장님은 블레이크 경을 말릴 수 있습니까?”
“……그, 그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그럼 일행분이 크게 다치셔도 제 책임은 없는 겁니다? 아시겠죠?”
“블레이크 경. 루터 경을 이긴다면 그대의 호위를 받아들이겠소이다.”
갑작스러운 로건의 말에 초인들을 비롯한 주변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고.
“단, 혹시 불상사가 생겨도 국가 간의 문제는 없는 것으로 했으면 합니다. 어떻습니까, 시장님? 공증인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이, 일을 왜 크게 벌리…….”
“난 받아들이겠소이다, 시장. 촌구석 놈에게 세상 넓은 줄 가르쳐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난처한 시장의 표정을 본 블레이크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자신이 질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 듯한 표정.
그 표정을 보자 시장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사이 루터와 눈을 마주친 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며 사납게 웃은 루터가 등 뒤의 거대한 워 해머를 꺼내 들었다.
쿵.
“그럼, 세상이 넓다는 걸 한번 배워 볼까?”
“초인이 되고서도 그런 무식한 무기나 들고 다니다니. 쯧쯧. 한 수 가르쳐 주마, 덩치.”
블레이크는 허리춤에서 섬뜩한 마나가 번뜩이는 검을 꺼내 들었다.
이내 두 줄기 붉은빛 오러가 격렬하게 충돌했다.
꽈아아앙!
쉴새 없이 교차하는 붉은 빛.
그 파괴의 섬광이 만들어 내는 충격파를 막아 내며 로건이 주변을 향해 외쳤다.
“기사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그 말에 따라 맥라인의 기사들과 루스펠하임의 기사들이 관저 앞의 일정 거리를 아예 둘러막고 초인들이 싸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그리고 그 안의 싸움에 모두가 신경을 집중했다.
이 순간만큼은 국적에 상관없이 그저 기사로서 그 정점이라는 오러유저들의 싸움을 감상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들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고 싸움의 형세를 파악할 수 있는 자는 아주 소수였지만.
그 소수 중에서도 그 대결의 향방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로건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밀린다. 그 루터 카일이…….’
예상외의 상황이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꽈아아앙!
루터 카일의 워 해머가 지면을 강타하며 거센 충격을 만들어 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블레이크는 어느새 루터의 옆에 나타나 있었다.
스가가각.
붉은빛 장검이 루터의 오러블레이드를 긁고 지나갔다.
“쓸데없이 튼튼하기는 하구나. 흥.”
“뭐라?!”
꽈아앙!
결투 직후부터 계속해서 반복되는 광경.
그것을 지켜보는 로건의 눈빛은 점점 굳어 갔다.
루터가 왕국 내에서 라이벌로 유명한 위켄과 싸울 때와 비슷한 패턴이기는 했지만, 조금 달랐다.
‘위켄보다 더 빨라. 대신 공격력은 좀 약한 것 같지만.’
일장일단을 따지자면 위켄 칼리아가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루터에게는 그 위켄보다 ‘조금’ 빠른 것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그야말로 극상성.
– 공간을 장악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최고는 속도다. 전장에서 가장 빠르다면 그것만으로 대부분의 상성에서 우위에 설 수 있다.
스승의 말을 그대로 체화한 것 같은 블레이크의 움직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루터 카일과는 다르게 그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그의 공격력은 루터의 방어력을 단번에 뚫어 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차곡차곡 데미지를 누적시키고 있었고.
루터의 공격은 그의 몸에 스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로건은 그 빠른 움직임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귀신 그림자처럼 특별한 운신법을 사용하는 것 같지도 않고, 위켄처럼 특별한 속성을 사용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속도에 특화된 초인일까.’
얼마 전 루터와 나눈 초인 특성에 관한 대화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갈 때.
벌건 얼굴의 루터 카일이 계속된 두들김을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모조리 부숴 주마!”
전신에 피어오르는 붉은 빛. 흐려져 가던 오러의 장막이 불꽃처럼 타오르며 그의 애병, 워로드에 집중되었다.
이윽고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르고 강하게 휘둘러진 그의 워 해머가 블레이크가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꽈아아아앙!!
강렬한 공격에 주변의 땅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고, 그 여파로 커다란 공격의 빈틈을 향해 쏘아지던 블레이크의 몸까지 뒤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워 해머가 강타한 자리에서 시작된 붉은 오러의 파도가 주변을 온통 뒤덮었다.
우르르르릉.
루터 카일의 비기, 오러웨이브.
잡을 수 없다면 범위째로 날려 버리면 된다는 루터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위력적인 일격이었다.
하지만 로건은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남다른 그의 눈에도 순간적으로 몇 겹의 잔상만이 겨우 보일 정도로 수도 없이 휘둘러진 블레이크의 검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연격이 만들어 낸 오러의 집중이 루터 카일의 오러웨이브를 뚫어 내며 움직이는 것까지.
까아아아앙!
요란스러운 폭음이 끝나고.
오러웨이브가 만들어 낸 자욱한 흙먼지가 가라앉은 후 좌중의 기사들 앞에 펼쳐진 건 루터 카일의 목 끝에 블레이크의 칼날이 다가와 있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앞을 로건이 막아서고 있었다.
지이이잉.
“이쯤이면 충분합니다, 블레이크 경.”
“허어? 이럴 수가…….”
블레이크는 루터 카일의 목을 뚫어 버릴 생각으로 휘두른 자신의 검을 오러도 없이 막아 낸 로건에게 진심으로 놀랐다.
그리고 동시에 납득했다.
“과연 폐하의 부름을 받을 만한 분이시군요. 놀랍습니다.”
감탄의 포인트가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블레이크는 바로 검을 거뒀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상대를 보며 피식 웃는 표정에 거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지기는 했지만, 다행히 그 분노를 드러내진 않았다.
“끄으응. 면목이 없다.”
“괜찮습니다. 상성이 좋지 않았어요.”
로건의 위로가 위안이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패자는 말이 없는 법.
이를 악문 루터는 블레이크의 얼굴을 한 번 노려보고는 힘없이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블레이크가 웃으며 로건에게 말했다.
“그럼 황도로 가는 여정을 제가 모셔도 되겠습니까?”
이 상황에서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로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굳이 직접 나서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폐하의 손님을 모시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그 말에 로건은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이 정도의 초인이 고작 제국의 하위 서열이라니.
그리고 그런 초인이 황제의 초청장 하나만으로도 자신을 낮추며 서슴없이 고개를 숙이다니.
‘황제…… 대체 어떤 사람일까.’
반드시 물리쳐야 할 주적.
그 그림자를 접한 것만으로도 버거운 느낌이었다.
‘아니, 아니야. 정신 차리자. 어쨌거나 극복해야 해.’
제국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황제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어쨌거나 이겨 내야 할 적일 뿐이다.
그러니 지금은 고개를 숙여서라도, 적에 대해 더 알아내는 것이 먼저였다.
“아, 블레이크 경. 경의 무용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생겼습니다.”
“예? 아, 말씀해 보십시오.”
“그게…….”
굳어진 다른 일행의 표정들과는 대비되는 로건의 미소 띤 얼굴이 블레이크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