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196)
196화 30m는 족히 넘어 보이는, 믿을 수 없이 높게 솟아 있는 거대한 성벽.
그 성벽 겉면에 흐르는 일곱 가지 색깔이 뚜렷한 에너지는 그 위험함을 모르는 이에게는 오직 아름답게만 보일 뿐이었다.
“와……!”
멀리서 그 모습을 보는 일행 중 누군가의 입에서도 이런 탄성이 터져 나올 정도로.
그러나 감탄을 금치 못하는 일행과 달리, 로건의 안색은 돌처럼 딱딱했다.
‘아세리안…….’
그에게는 한없이 증오스럽기만 한 적들의 심장부.
3백 년 전 세워진 이래, 단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다는 철벽의 성채.
대륙 최대의 도시, 아세리안.
동서남북으로 난 성문으로 드나드는 인파만으로도 대륙 동부 최대의 도시라는 그랑을 압도하는 위세가 느껴졌다.
로건의 그런 복잡한 심사를 전혀 모르는 블레이크가 옆에서 웃으며 말을 걸었다.
“여기서 그렇게 감탄하시면 곤란합니다, 로건 공. 아세리안의 내부는 볼 것이 훨씬 많으니까요.”
“알고 있…….”
“예?”
“아…… 하하. 많이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겠지요.”
로건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바꿨다.
긴 여정을 함께하며 조금 친해진 후로, 블레이크는 대련 요청 대신 이렇게 종종 말을 걸고는 했다.
제국이 초행인 로건에게 제국의 문화와 문물에 대해 설명해 준다는 명목으로.
다만 문제라면.
“물론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세리안은 정말 별세계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물론 이 모두가 영명하신 황제 폐하의 은덕 덕분이지요.”
거의 모든 대화의 마침표가 황제에 대한 찬양이라는 것이었다.
‘황제에게 초인을 세뇌하는 수단이라도 있는 걸까.’
이런 허황된 생각이 들 정도.
“기대되는군요.”
“마지막까지 모시겠습니다. 그럼 움직이실까요?”
“정말 황도 안까지 호위해 주실 생각이시군요.”
“저도 온 김에 인사드릴 분들이 좀 있어서 말입니다. 하하.”
“그럼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별말씀을.”
한 달이 넘는 여정 중에 생겨난 이 관계를 무어라 정의해야 할까.
아니, 정확히는 황제의 손님이라는 이유만으로 극공경의 자세로 자신을 대하는 제국의 군단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직은 단정 짓기 이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무척 도움이 되는 자였다.
뒤쪽의 루터 카일이 굉장히 불편해하고 있다는 점만 빼면.
“그런데 아직도 황제 폐하께서 부르신 이유를 모르십니까?”
그리고 은근히 집요하다는 것도.
“예.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저야 왕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을 뿐입니다. 그 성과가 기특해 보이신 게 아닐까요?”
수없이 반복되어 온 질문과 역시나 똑같이 반복되는 답변.
다만 이번에 이어진 블레이크의 말은 이전과 조금 달랐다.
“……글쎄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분이 아니신데. 흠…… 다른 예상 가시는 점은 없으십니까?”
“그럴 분이 아니라뇨?”
“폐하께서는 소국의 정세에 큰 관심이 없으…… 아, 그란디아를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블레이크의 기저에 깔린 제국우월주의가 다시금 여실히 드러나는 발언에 로건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아, 하하. 괜찮습니다. 제국의 황제 폐하라면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튼, 그분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초인들뿐인데 조금 의아해서요.”
“초인들이요?”
“아, 직접 뵙게 되시면 알게 될 겁니다. 제가 쉽게 드릴 말씀은 아니라…….”
말끝을 흐리는 블레이크를 보며 로건은 내심 머리를 굴렸다.
황제가 자신을 부른 게 내전에서의 활약 때문은 아닐 것이다?
초인에게만 관심을 가진다?
‘흠. 혹시 무기 때문이 아닌 걸까.’
3군단에서도 연사 석궁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는 지금, 정말 5년 뒤에 제국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생에는 이 시점보다 더 미래에 석궁이 개발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아니야. 확신할 수는 없어. 왕국의 정세에 관심이 없다는 건 과장이겠지. 진짜로 관심이 없다면 정말 나 한 사람한테 관심이 있어서 불렀다는 건데…… 그게 더 이상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블레이크가 미안한 표정으로 화제를 돌렸다.
“저기 성벽에 보이는 일곱 가지 색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들은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제가 설명을 해 드릴 수 있어서 기쁘군요. 저 일곱 빛깔의 기운은 바로 아세리안을 수호하는 7가지 대마법이 발현된 흔적입니다. 그것은 아세리안에 있는 7개의 마탑이 상징하는 마법들로…….”
성벽을 강화하고, 자동으로 보수되는 것은 기본.
위기에 따라 발현된다는 대마법 보호막에, 성안 인간들의 활기를 북돋아 주는 생명 마법까지.
“외부에 알려진 효과는 이렇게 네 가지뿐입니다. 나머지 세 가지 마법은 철저히 비밀이라 저로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중에도 한 가지는 오직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만 알고 계실 정도죠.”
블레이크는 로건도 익히 알고 있는, 그리고 관심이 있는 식자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자랑스레 늘어놓았다.
그 목소리에 적당히 맞장구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동쪽의 성문.
“뭐야, 저 거인은?”
“괴물인가?”
“기사들 같은데?”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일.
루터 카일이 인근의 모든 시선을 끌어모으고, 아득하게 이어진 줄을 관리하는 병사들이 일행에게 다가왔을 때.
블레이크가 품 안에서 황금빛 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서부 3군단장 블레이크 이븐도어다. 황제 폐하의 손님을 모시고 왔으니 길을 열어라!”
황금패를 보며 식겁한 병사들에게 당당히 소리를 치는 블레이크.
그로부터 얼마 후.
로건 일행은 수만은 될 듯한 대낮의 인파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아세리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황궁에서 사람이 올 겁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상급기사로 보이는 이가 고작 수문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성문.
연신 고개를 숙이는 기사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지만, 로건을 제외한 일행의 관심은 그 기사가 아닌 성문 안으로 보이는 거리를 향해 있었다.
“우와…….”
다른 이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좀처럼 놀라지 않는 빅토르의 음성마저 나직이 귀를 파고드는 바람에 로건 역시 한숨을 쉬며 ‘보기 싫은’ 화려한 거리를 다시 눈에 담았다.
루스펠하임처럼 정형화된 건물이 아닌 각양각색의 건물들, 최소 5층은 넘어갈 듯한 높은 건물들이 저마다 다른 색상과 형태로 들어서 대로의 좌우를 장식하고.
폭만 50m는 넘을 듯한 대로의 가운데에는 잘 가꿔진 화단과 분수가 놓여 눈을 즐겁게 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은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한 쌍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옷차림을 한 채 각자의 볼일을 보고 있었다.
그란디아라면 적어도 귀족이거나 중소 규모 이상의 상인은 되어야 입을 법한 비단옷을 입은 이들이 내륙 한가운데의 대도시에서 신선한 생선을 사고 있었다.
그 하나의 장면만으로도 제국의 위상과 아세리안의 부유함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듯했다.
다만 일행과는 달리 그 모습을 본 로건의 미간은 절로 찌푸려졌다.
‘이렇게 잘 살면서, 결국 더욱 큰 욕심을 위해 정복 전쟁을 일으켰지.’
그리고 그란디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재원과 자원을 착취하여 자국의 중심부로 집중시킨 것이 제국이었다.
전생의 기억에 점점 얼굴이 굳어지는데.
“뭐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로건 공?”
“아, 아닙니다. 제 좁은 식견으로는 도무지 모를 물건들이 많이 보여서 뭔가 하고 궁리 중이었습니다.”
“보고 계신 게…… 아, 분수군요. 상수도 시설을 이용한 거리의 장식이죠. 마실 수도 있는 물입니다.”
“아! 그렇군요. 역시 제국입니다.”
“그 또한 영명하신 황제 폐하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이죠.”
로건이 놀라는 척하며 엄지를 들어 올리자, 블레이크가 다시금 익숙한 미소로 응답했다.
“황도에 얼마나 머무르실지는 모르지만, 기회가 되신다면 아세리안의 중앙시장에 한번 가 보십시오. 그곳에 없는 물건은 세상에 없다는 말이 나오는 곳입니다.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
“소문으로는 들었습니다만,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곧 황궁에 들어가시게 되면 더 놀라실 겁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계셔야 할 겁니다.”
촌놈 티를 단단히 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바쁜 일행과 사람 같지 않게 거대한 루터를 한 번씩 쳐다보고는 티 나지 않게 비웃으며 성문을 오가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복잡한 심사를 숨기며 블레이크와 한담을 나누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대로 저편에서 화려한 마차와 일단의 기사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오, 왔군요.”
“황실 근위대 5분대장 윌리엄, 블레이크 군단장님을 뵙습니다.”
화려한 금룡이 새겨진 은빛 갑옷.
블레이크에게 인사를 하는 기사는 무려 최상급의 기사였다.
게다가 그 뒤를 따르는 30여 명의 기사도 최소 중급, 아니면 상급의 강자들.
‘황실 근위대. 여전하군.’
평기사조차 중급 이상의 기사로만 이루어진, 대외적으로 알려진 황실 최강의 전력.
왕국의 에스페란자 기사단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런 질적 수준에도 불구하고 그 숫자만 천 명이 넘는 집단이라는 것.
마치 에스페란자 기사단과 발터마임 기사단의 장점만 합쳐 놓은 듯한, 진정한 의미에서 최강의 기사단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단장은 미래에…….
‘아, 지금은 제롬이 아니려나. 이때 단장이 누구였더라?’
로건이 자신의 상식을 다시 점검하는 순간.
블레이크가 나서서 인사를 받았다.
“윌리엄, 오랜만이네. 그런데 오늘 먼저 예를 취해야 할 곳은 이쪽이네. 내가 수행해 온 폐하의 손님이시지.”
“예, 알고 있습니다. 로건 맥라인 공과 그 일행이시죠? 마차에 오르십시오. 황궁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윌리엄이라 불린 기사가 한 발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까지도 생각에 잠겨 있던 로건은 그제야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다.
“크군.”
그 화려한 외관에 묻혀 느끼지 못했던 마차의 크기가 일반적인 규격을 꽤 벗어나 있었다.
앞에서 끄는 말만 여덟 마리라는 것도 이제야 이해가 될 정도로.
“일행 중에 그란디아의 오러유저 루터 카일 님이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맞춰서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호오?”
“강도를 보강하는 마법이 기본으로 새겨진 아티팩트 마차입니다. 끄는 말들도 준마들로만 준비했으니, 루터 님이 타셔도 충분하실 겁니다.”
“멋지군.”
제국행 내내 말도 없이 자신의 두 발로만 뛰어온 불쌍한 초인이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것에 생각이 미쳤는지 눈이 커졌다.
“그럼 이 화려한 마차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인데……. 고작 나 하나 태우려고?”
“폐하께서는 로건 공뿐만 아니라 일행분들에게도 큰 신경을 쓰고 계십니다. 계시는 동안 최대한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최상급기사가 마치 손님을 응대하는 상인처럼 유연하게 고개를 숙이는 광경.
그 광경이 도통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거리와 마차에 압도된 탓인지 그 루터조차 입을 벌린 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로건이 루터의 팔을 툭 치고는 앞으로 나섰다.
“안 가실 겁니까, 루터 경?”
“아, 아. 가야지.”
아마도 평생 제대로 된 마차를 타 본 적이 없을 거인이 그제야 몸을 움직이고.
“블레이크 경,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별말씀을. 폐하의 충실한 신하로서 의무를 다한 것뿐입니다. 부디 좋은 인연으로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한 달간의 긴 인연은 그렇게 가볍게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일행을 실은 거대한 마차가 달그락거리며 달린 지 한참 후.
‘황제라…….’
로건이 황제에 대한 전생의 소문과 현생의 소문, 블레이크의 반응 등을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상상만 해 왔던 주적에 대해 그리고 있는데, 루터 카일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긴장되지 않느냐?”
“예?”
“대륙 최강국의 군주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긴장해야 정상인데, 아예 눈 감고 잠이라도 잘 듯 보여서 물었다.”
열심히 긴장하면서 생각 중이었습니다만.
황당한 오해에 말문이 막히는데.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 루터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배짱이 좋은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조금은 긴장하거라. 지금 제국의 황제는 제국 역대에 꼽힐 정도로 확고한 권력을 구축한 지배자로 소문이 나 있다.”
“블레이크의 태도만 보아도 그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좀 과하기는 했지만 말이지.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다. 군사력 최강의 나라를 문화적, 경제적으로도 부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군주야. 다행히 정복욕은 없어 보인다만.”
그 엄청난 착각에 눈가가 씰룩였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지금 수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
“하나 그 강력한 권력만큼,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참지 않는다는 모양이야. 정책에 관한 조언이 기분에 거슬렸다는 이유만으로도 제국의 명문가가 몰살되었다는 소문도 있어.”
황당한 소문에 헛웃음이 나왔다.
“에이, 황제가 바보도 아니고 그런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큰 나라일수록 인재가 많아야 하는 법.
정책 조언이 좀 거슬린다고 명문가를 멸문시켰다면, 제국이 후에 그렇게 커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도 소문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소문이 날 정도면 그만큼 권위에 대한 도전을 엄벌하는 지배자라고 봐야겠지. 예의를 지키고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이다.”
그 말을 하는 루터 카일의 얼굴엔 그야말로 걱정이 가득했다.
“하하. 지금 제 걱정을 해 주시는 겁니까? 사실상 원수나 다름없는 저를? 천하의 루터 경이?”
“너는 이미 왕국의 기둥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네게 문제가 생겨서는 안 돼. 노파심에 하는 말이다.”
한때는 적이었던 초인이 보내는 진심 섞인 염려.
그것이 황제를 생각하면 답답해지기만 하던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루터 경.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제가 직접 초청한 자리니, 그 권위를 위해서라도 별일은 없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만.”
로건의 말에도 루터의 얼굴에서는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대화가 그렇게 끝날 무렵.
마차가 마침내 황궁에 도착했다.
정복 전쟁을 주도한 주적, 황제의 보금자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