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00)
200화그 말을 듣는 순간, 스텔라의 모습이 로건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제 자신을 보면 ‘아찌’라고 짧은 발음을 하기 시작한 세상 귀여운 아기, 스승님의 딸.
그 아이의 성명식에서 보았던 광경이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다.
“흠. 저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혹시 그게 심각한 문제입니까?”
“음……. 뭐,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 체질이 있는 사람에 대한 기록은 생각보다 흔한 편이니까요.”
그런데 왜?
“체질이랄 정도면 별 의미 없는 것 아닙니까?”
“예. 신성력이 잘 받지 않는 체질의 사람들은 종종 있었지요. 저희 교단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초청하여 위대한 신들의 은혜가 좀 더 널리 퍼질 수 있도록 연구도 해 왔구요.”
연구라니…….
뭘 어떻게 연구한다는 것일까.
로건이 미간이 살짝 좁혀지는데.
“그런데 지금까진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백 년에 한둘 정도 발견되는 것이 전부였는데, 최근 그란디아에서 그런 아기들이 연달아 태어났다는 소문이……. 이런, 정말 모르시나 보군요.”
“예. 죄송합니다. 저도 우연히 한 번 본 것뿐이라서…….”
“위정자시라면 아무래도 출생이나 아이들 문제 같은 민생에도 관심이 많으실 것 같았는데…… 아, 제가 형제님의 나이를 간과했군요. 아직 후계자 신분이실 텐데.”
“아닙니다.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제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란디아에서는 대도시가 아니라면 신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변명하기에는 이미 맥라인의 영지가 너무 커졌다.
로건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자, 플렌타스 주교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아무래도 아기가 아플 때 신전을 찾는 부모들이 많다 보니, 병이 잘 낫지 않아 생긴 헛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지만 믿음과 수행이 부족한 하급 사제의 신성력은 한계가 뚜렷하니까요.”
자신의 말이 로건을 타박하는 모양새가 된 탓에 덧붙인 것인데, 로건을 달래기 위해 변명을 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단순한 소문이라면 주교가 이야기하지 않았겠지.’
스텔라의 경우도 있으니, 조금 신경은 쓰였다.
‘돌아가면 한번 알아볼까?’
플렌타스 주교의 말이 로건의 가슴속에 작은 의문을 남겼다.
* * *
“드디어 돌아왔구나, 우리의 젊은 영웅!”
별궁으로 돌아가자 루터가 로건을 보며 크게 반겼다.
팔을 벌리며 격하게 포옹하려는 듯한 자세가 마치 거인이 사냥감을 으스러트리려는 것처럼 흉포했던지라 로건은 헛웃음을 지으며 거친 환대를 슬쩍 피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루터는 이내 로건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대전에서는 솔직히 많이 놀랐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네 대답이 말이다.”
“아…….”
“황제의 제안은 내가 생각해도 파격적이었다. 네 애국심에 감탄할 수밖에 없구나.”
루터의 말에 로건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응했다 해도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겁니다.”
“뭐?”
“왕국만 한 영지와 부를 그냥 주겠습니까? 아무리 황제라 해도 그건 무리지요. 아마 그에 걸맞은 공훈을 세우라 강요했을 겁니다.”
“능력이 있으니 공이야 세우면 되는 것 아니냐. 아무튼, 새삼 네게 감탄하게 되는구나. 역시 대단한 녀석이다, 넌.”
거인의 커다란 손이 어깨를 두드렸지만, 로건은 웃을 수 없었다.
‘그 세우면 될 공훈은 아마도 왕국 정벌일 확률이 높을 겁니다.’
아무리 제국이라도 왕국만 한 영토가 갑자기 생겨날 리는 없으니.
‘내게 왕국을 정복하라 명하고 총독에 임명하면, 황제로서는 약속도 정확하게 지키고 영토도 얻는 꼴이 되겠지.’
지금은 그저 추론일 뿐이지만,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제국의 전성기를 일궈 낸 황제가 생각 없이 그런 말을 내뱉을 것 같진 않았으니까.
어쨌거나 지금은 황제의 눈에 띄었다는 것 자체가 곤란할 뿐이었다.
“아세리안의 봄 축제 기간이 한 달이었던가요? 끝나는 대로 바로 돌아가야겠군요.”
“그래. 그러자꾸나.”
일주일.
대전에서의 일 이후로 일주일이 지날 동안, 로건은 이 이상 황제의 눈에 띄기 싫어 굳이 별궁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황제 역시 로건을 찾지 않았다.
그 대신 별궁에 온갖 사람들이 다 찾아왔다.
정확히는 제국의 온갖 귀족들이.
“로건 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저는 남작 부르텐…….”
“커프스 자작입니다. 아세리안의 세무청에서…….”
“재무부의 포메인 자작이라고 하오. 로건 님 계시오?”
이 외에도 현재 아세리안에서 머무는 백작급 미만의 귀족들은 죄다 한 번씩 별궁의 문을 두드린 것 같았다.
게다가 빈손으로 오는 것도 아니었다.
“이게 다 뭐야?”
커다란 선물 더미를 본 루터 카일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별궁 한구석에 쌓여 있는 백 수십 개의 선물.
하급의 아티팩트도 있었고, 보기 드문 보석도 있었으며, 그란디아에서는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영약이나 보양식도 있었다.
적어도 수십만 골드에서 비싸면 수백만 골드는 가뿐히 넘어갈 보물들을 고작 인사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것도 제국의 ‘중하급’ 귀족들에게.
“어처구니가 없군. 이런 걸 인사 선물로 준다고?”
지금 이곳에 쌓여 있는 물건들의 값어치를 따지자면, 왕국의 백작급 영지를 몇 년은 운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제국이 부유하다고 해도 이런 일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아마도…….’
로건은 다시금 황제의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 제국의 풍요로움을 보여라.
백작급 이상의 귀족들은 자존심을 지키려는 듯 직접 찾아오진 않았지만, 대신 하인을 시켜 초청장을 보내왔다.
물론 하나하나가 다 평범한 초청장은 아니었다.
툭 하고 봉인이 뜯어지는 순간 편지에서 기이한 마나가 새어 나오더니 새하얀 수염을 기른 노년 관리의 모습이 나타났고, 곧이어 나지막한 음성이 울렸다.
[로건 공. 아세리안의 재무부 차장, 애슐리 버트만 백작이오.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 그대를 초청하여 제국의 미래와 왕국의 우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이다. 응하겠다면…….]“스크롤 형태의 마법 편지라. 진짜 돈이 썩어나는가 보군.”
“그런 초청장만 수십 개입니다. 전부 참여하셨다가는 한두 달은 훌쩍 지나갈 겁니다.”
“그래. 그럴 수는 없지.”
빅토르의 말에 로건이 한숨을 쉬며 대꾸하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던 루터가 끼어들었다.
“이제는 나한테까지 이런저런 선물이 들어오고 있다. 너와 함께 파티에 오라고 하더구나. 이거, 내가 곁다리로 취급될 줄이야. 참 어이없는 상황이군.”
말과는 달리 피식 웃는 루터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사실 제국의 정복 전쟁이 일어날 거란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보면, 지금의 상황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만한 제국의 귀족들이 숙이고 들어오는 모습 그 자체였으니까.
물론 로건의 생각은 조금, 아니 많이 달랐지만.
‘아니, 제국 전쟁이 문제가 아니지. 당장 왕국의 일만 해도 걱정거리가 태산인데.’
이곳에서는 외부의 정보를 접할 방법도 없었다.
그가 한숨을 푹푹 쉬자, 루터가 약을 올리듯 말했다.
“왜 그러느냐, 인기인. 덕분에 네 부하들도 꽤 짭짤하게 챙기고 있는데. 너도 이 순간을 좀 즐기지 그래.”
부하들?
순간 흠칫하는 핸더슨이나 다른 기사들의 모습에 로건의 미간이 좁혀졌다.
담담하게 자신의 시선을 받는 것은 오직 빅토르뿐이었다.
“너희들…….”
“그, 그냥 주군께 좋게 말씀드려 달라고 몇 푼 받은 게 전부입니다!”
“특별히 발설한 정보는 없습니다, 주군! 맹세합니다!”
그래, 없겠지.
‘아는 게 없을 테니까.’
절로 한숨이 나오는데.
“너무 뭐라 하지 말거라. 황제가 대놓고 꼬시겠다고 지목한 너의 부하들인데, 접근하는 이들이 왜 없겠느냐. 그래도 너에게 그 부탁을 전해 주는 놈은 없었잖느냐.”
그거야 그렇지.
만약 그랬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그 정도면 기특하지. 상대방이 보기엔 뇌물만 받아먹고 배 째라 한 것이나 다름없겠지만.”
킬킬대는 루터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로건이 실없는 대화를 종식할 마법의 단어를 꺼내 들었다.
“자꾸 그러시면 확 귀화해 버립니다?”
“에헤이! 자네, 어른이 좀 놀렸다고 뭔 그런 심각한 농담을 하나. 다만 여유를 좀 가지라는 말이야. 급한 일도 없잖은가.”
“……급한 일 많습니다만.”
자신도 모르게 나온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아. 뭐, 그렇다면야…… 흠, 흠.”
그에 시종일관 유쾌하게 놀려 대던 루터 역시 흠칫하며 말수를 줄이고, 기사들 역시 로건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머무는 공간은 삽시간에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
그리고 로건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강박이야, 강박. 알고는 있는데…….’
황궁에 발이 묶인 지 이제 고작 2주.
자신도 이 정도로 초조한 마음이 생기는 건 비정상이라는 걸 자각하고는 있었다.
지루한 시간을 견디기 위한 수련조차 집중이 잘 안 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제국의 힘을 다시 한번 실감하고, 황제라는 거인을 눈앞에서 본 상황에서 어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자신이 해 둔 모든 준비가 너무나도 빈약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마음이 급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
‘그냥 돌아가 버릴까?’
황제의 뜻을 무시하고 그대로 귀환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신은 공식 외교사절도 아니니, 그것을 무례로 보아 공식적으로 따지지는 못할 테지만.
‘아예 아무 일 없길 바라는 것은 너무 안일한 생각이겠지.’
공식적인 방문 기준으로 삼았던 아세리안의 봄 축제는 아직 3주가 남아 있다.
그것이 끝나는 대로 바로 돌아가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을 애써 달래 보는데.
황제가 초청장을 보냈다.
* * * 황궁의 파티.
황제가 직접 초대한 자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로건은 그저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파티에 참석한 직후부터 자신의 실수를 통감했다.
“붉은 머리, 붉은 눈. 당신이 바로 소문의 그자로군요. 이름이 뭐였더라?”
“로건이라고 합니다, 부인.”
“아, 맞다!”
천여 평도 넘을 듯한 황궁의 대연회장이건만, 로건의 주변에만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몰려 있어 마치 그가 파티의 호스트가 아닌가 싶은 진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으니까.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 화려한 샹들리에와 듣도 보도 못한 고급 음식들.
한 모금만으로도 짜릿한 향과 맛이 입 안 가득 퍼지는 이름 모를 비싼 술들에 느긋하게 즐길 만한 멋진 공연까지.
그야말로 호화스러운 파티였지만, 로건의 마음은 가시밭길 속에 있었다.
“저게 그…….”
“왕국의 촌놈…….”
“폐하의 은총이 과하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인사라도 해 둘까?”
“잘 보여 놔서 나쁠 건 없겠지.”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접근하는 이들.
제국에 대한 적의를 한층 더 깊게 만드는 얼간이들을 웃으며 상대하느라 진이 다 빠질 무렵.
그제야 로건이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황제 폐하 듭시오!
좌중의 시선이 몰리고, 연회장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곧이어 십수 명의 기사와 수행원을 거느린 황제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모두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순간.
황제는 그를 위한 상석의 자리로 바로 향하지 않고 로건을 향해 다가왔다.
“로건 맥라인, 그란디아의 별. 파티는 잘 즐기고 있는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담긴 새로운 칭호.
‘그란디아의 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건의 얼굴이 살포시 찡그려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