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01)
201화
“제국을 보고 즐기라 했더니 처소에만 틀어박혀 있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친히 부른 것이야. 그래, 느낌이 어떠한가?”
그냥 보내 주면 서로가 편할 텐데.
하지만 속에 있는 진심을 그대로 꺼낼 수는 없었다.
“과분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그래. 넓은 세상을 보고, 느껴 봐야 생각이 달라지는 법이지.”
“새장에 갇힌 새가 세상을 보아 봤자 뭐 얼마나 더 보고 얼마나 더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저 갑갑할 따름입니다.”
로건의 뼈 있는 대답에 황제의 뒤를 따르던 이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지는데, 정작 당사자인 황제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넓게 보면 새장은 자네를 구속하는 왕국이 아닌가. 창공을 날고 싶은 새라면 보다 넓은 세상으로 와야지.”
로건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은 여전히 호의적이기만 했다.
“왜 이렇게까지 저를 붙잡으려 하시는 겁니까? 폐하의 휘하에 있는 인재 중에서도 저보다 뛰어난 이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실 텐데요.”
“당장은 그렇겠지. 지금 여기 있는 레오나드만 해도 미숙한 제롬과는 전혀 다르니 자네보다 강할 테고 말이야.”
황제의 말에 바로 뒤에서 그를 수행하던 중년의 기사 하나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로건이 그런 황제의 말에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끼는데.
“하지만 미래의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누가 뭐래도 자네지. 현 대륙제일검이라 불리는 트리스도 자네 나이 때에는 절대 그만큼 하지 못했으니까. 자네는 내가 본 이들 중 최고의 가능성을 가진 인재야.”
이어진 극찬에서 그 위화감의 원인이 명백히 드러났다.
로건이 말한 ‘저보다 뛰어난 이들’은 단순히 무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의 인재를 언급한 것이었는데, 황제의 대답은 오직 한 가지 기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초인, 개인의 무력. 황제는 인재의 기준으로 무력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어.’
로건은 황제가 정말로 자신 하나만을 보고 초청했다는 것을 그제야 믿을 수 있었다.
‘왕국의 내전에 쓰인 무기 따위엔 관심도 없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속이 쓰리면서도 슬쩍 웃음이 나왔다.
거대한 압박감이 넘쳐흐르던 황제의 빈틈을 살짝 엿본 듯한 느낌.
설령 그것이 순간의 착각일지 몰라도, 마음을 한없이 초조하게 만들던 강박이 조금은 옅어지는 것 같았다.
“미래의 최강자가 눈앞에 있다. 그러니 어찌 탐을 내지 않겠는가.”
물론 당장은 황제의 눈에 어린 이 욕심을 걷어 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제의 제롬 경만 해도 끝없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스스로 이긴 자를 높게 평가하는가. 허허,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구나.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결코 태만하지 않을 테니.”
황제의 눈에 씐 콩깍지(?)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폐하께서 저렇게까지…….”
“대체 어떤…….”
“부럽군…….”
파티장의 모든 귀가 둘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 로건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다시금 제 뜻을 확고하게 표명했다.
“폐하. 지난번에 말씀드렸듯, 저는 골수 그란디아인으로서 제 고향을 등질 수가 없습니다. 고국을 지키고자 하는 소인의 마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고국을 등지라는 것이 아니다. 내게 오라는 것이지.”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로건이 속으로 어처구니없어하는데.
“내가 바로 세상의 주인이니, 내게 충성하는 것이 곧 네 왕국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지 않겠느냐.”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이 이어졌다.
고래로 몇 번의 전쟁을 치러 내면서도, 단 한 번도 제국에 복속한 적 없었던 그란디아를 속국으로 취급하는 말.
‘어디서 궤변을……!’
울컥하는 마음이 일었지만 그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자살 행위일 뿐이라 로건은 마음을 다스리며 차분히 다시 답했다.
“저는 제 가문 하나 건사하기 힘든 몸입니다. 과분한 제의는 받아들이기 어렵사옵니다.”
가문 하나 건사하기 힘들다. 절반쯤은 진심이 담긴 이야기였다.
그러나.
“스스로를 폄하하지 마라. 내가 보기에는 자네 한 명의 가치가 그란디아 왕국 전체보다 나으니. 내가 전에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니다. 내게 충성을 맹세하면 자네가 그란디아의 왕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게 해 줄 것이야.”
황제의 평가는 그의 생각보다 더욱 후했다.
그들의 대화를 숨죽이며 지켜보던 귀족들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 왕국보다 너 하나가 낫다.
세상의 어느 누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며, 한다 해도 이리 설득력 있게 들리겠는가.
극찬 속에서 다시금 황제의 배포를 느낀 로건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다시금 마주친 황제의 검은 눈동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가득했다.
평생 양보를 해 본 적도, 해야 할 이유도 없었던 자.
인재에 대한 집착도 이렇게 강한 자가 정복을 포기할 리가 있을까.
‘귀화를 대가로 정복 전쟁을 하지 말라는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야. 오히려 어찌 알았냐고 심문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로건은 황제의 눈빛을 보며 가슴속에 남아 있던 미약한 미련조차 남김없이 털어 낼 수 있었다.
혹시나 자신이 전생의 원한만으로 힘든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닌가 하는 미련을.
‘귀화하면 나를 선봉장으로 세워 왕국을 칠 사람이야.’
이전에 추론한 대로 그것이 그와의 약속, 왕국만 한 영토와 권세를 보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테니까.
마음을 다잡은 로건은 다시금 황제의 눈을 보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저에게는 왕국과 가문이 전부이옵니다. 소인의 좁은 마음을 이해해 주시고 제안을 거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주변에서 연달아 들려오는데.
피식.
“그래. 조금 더 생각해 보거라. 제국의 위대함을 좀 더 경험하고 나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황제의 고집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그란디아의 젊은이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 주마. 내 옆자리로 오라.”
황제가 좀 더 적극적인 구애를 펼치기 시작했다.
또르륵.
“포스를 정순하게 만들고 정신을 맑게 해 주는 술이다. 황실에서 일 년에 100병 정도만 생산하는 명품이지. 기사들에게는 보약과도 견줄 만할 것이다.”
황제가 직접 따라 준 술잔을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시립한 기사들의 부러움에 찬 눈길이 로건으로선 그저 부담스러울 뿐이었지만, 우선은 순순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황금빛 금룡이 새겨진 병에선 신경을 곤두세워야지만 느낄 수 있는 은은한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술병이 아티팩트라니…….’
로건은 그 터무니없는 낭비에 속으로 헛웃음을 짓고는 단숨에 술을 삼켰다.
본래도 술을 즐기지 않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황제의 반응을 살펴볼 생각이었는데.
입 안 가득 퍼지는 황홀한 향과 달콤한 맛에 일차적으로 놀라고, 목으로 넘기자마자 느껴지는 몸 전체가 시원하게 풀리는 듯한 개운한 고양감에 두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에겐 보약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허허. 자, 이리 와서 이것도 한 점 먹어 보거라. 황궁의 자랑인 요리로, 북부 야생 순록의 넓적다리로 만든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조리법으로 만들었으니 내 너의 반응이 실로 궁금하구나.”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 갈색 소스에 버무려진 고기 요리.
야생동물 고기 특유의 잡내 대신 향긋한 내음만 가득한 그 요리 역시 로건의 시선을 끌었다.
황제가 먹는 요리이니만큼 접시가 아티팩트라는 것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소스나 고기에서까지 느껴지는 미미한 마나의 향기.
황제의 설명에는 없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했다.
‘요리를 하는 마법사도 있다고?’
이 무슨 끔찍한 인력 낭비란 말인가.
한 입 집어 먹은 요리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맛있기까지 했기에 로건은 더욱 한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황제가 씩 웃었다.
“넓은 세상을 보란 말이 거창한 것을 말함이 아니다. 저 아래를 보거라.”
황제의 손짓을 따라 로건이 시선을 내리자, 파티장의 상석에서 힐끔힐끔 그와 황제를 바라보는 제국의 수많은 귀족이 보였다.
그중에는 그란디아의 왕 이상의 권세를 누리는 제국의 고위 귀족들도 여럿 있었지만, 그들 대다수의 시선이 담고 있는 것은 노골적인 부러움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는 것을 상상해 보거라. 모든 것은 네 선택에 달려 있으니.”
황제의 옆자리에서 상상치도 못한 귀한 음식과 술을 먹으며 많은 귀족을 내려다보는 자리.
황제의 말은 그런 뜻이었고, 그만큼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로건은 그래서 더욱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생의 원한과 현생의 의무를 차치하더라도.
‘오직 황제의 뜻에만 맞춰서 사는 삶이라니. 더구나 내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의 재능이 부족함을 동생에 대한 화로 풀었던 못난이.
가족을 잃고, 속죄할 기회마저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20년을 끝없이 싸워 온 미친놈.
그리고 현재는 위기를 극복하고 간신히 살아난 가문의 힘으로 제국을 막기 위한 싸움을 준비하는 무모한 놈.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스스로가 보기에 자신은 절대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황제의 새장은 어울리지 않았다.
전생과 현생의 모든 원한과 의무를 잊는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흔들리던 그의 눈빛이 변한 것을 느꼈는지 황제의 눈매가 가늘어지는데, 그들이 있던 상석 바로 아래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돌리자, 흰 수염에 흰머리가 가득한 푸근한 인상의 노년 신사가 보였다.
“음? 트레비스 공작, 무슨 일이지?”
“제가 그란디아 왕국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사온데, 폐하께서도 관심을 가지실 만한 이야기인 것 같아 조심스레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그란디아? 호오? 그래, 말해 보게.”
황제의 시선이 잠시 로건을 스치고 다시금 공작에게 향하자, 노년의 공작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로건을 바라보았다.
“그란디아 왕국의 내전을 평정한 영웅, 로건 맥라인 경의 소문은 이곳 황도에도 종종 들려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조금 특이한 이야기가 있사옵니다.”
“특이한 이야기?”
“예. 로건 경이 기존에 없던 특이한 무기들을 만들어서 내전을 평정하였다는 이야기지요.”
“……무기?”
황제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자, 공작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 무기가 실로 대단하여 제국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이옵니다.”
“그래서?”
“……제가 로건 경과 이야기하여 그 무기를 제국에도 들여오면 어떨까 싶어 말을 꺼내 보았습니다.”
황제의 시선이 차가워짐에 따라 공작의 노안에 식은땀이 맺히고.
“술맛 떨어지게…….”
탁 소리를 내며 술잔을 내려놓은 황제의 한마디에 공작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감히 내 손님을 앞에 두고 거래를 말하는 것인가?”
“요,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소신이 공훈에 눈이 멀어…….”
쯧.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마음은 이해한다. 그러니 이번 한 번은 무례를 용서하겠다. 오늘은 내 앞에 얼굴을 보이지 말도록.”
짧게 혀를 찬 황제가 공작의 말을 끊었다.
로건으로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를 꺼낸 공작이 사라졌으니 마음이 편할 뿐이었지만, 한편으론 공작의 지위를 가진 자도 저리 쩔쩔매게 만드는 황제의 권위가 새삼 무겁게 느껴졌다.
“쓸데없는 말을 듣게 했군. 로건 맥라인, 그대는 그저 즐겨라.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고, 누릴 만큼 누린 뒤에 그 감상을 듣고 싶구나.”
“폐하, 제국의 위대함은 소인의 짧은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느끼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제국에 귀의할 생각은…….”
“하하하. 서두를 것 없다. 축제의 기간은 아직 남아 있으니, 내 말대로 천천히 제국을 즐긴 다음에 다시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
황제는 빙긋 웃으며 로건의 말을 잘랐다.
“하나만 염두에 두거라. 네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 재능은 더욱 큰 세상 속에서 그대 못지않게 빛나는 이들과 부딪쳐 가며 갈고 닦아야 의미가 있는 법이야.”
황제는 영롱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잔을 들어 그 안에 담긴 술을 가장 커다란, 대접 같은 잔에 옮겨 부었다.
“잔이 클수록 담을 수 있는 것이 많아지는 법. 작은 나라 안에서 재능을 썩히는 것이 진정 스스로를 위하는 길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거라.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순간, 길은 뻔히 보이겠지.”
그 말에서 로건은 황제와 자신의 생각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오직 자신만을 보는 자.
황제가 보여 준 배포와 너무 커다란 존재감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그의 한계.
그것을 느낀 것이 미래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장 가슴속에 드리워진 거대한 황제의 그림자를 조금은 덜어 낼 수 있었다.
“깊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그리고 이렇게까지 자부심이 넘치는 황제라면 자신이 축제의 기간이 끝난 후에 돌아가 버린다 해도 발목을 붙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약간 남아 있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