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05)
205화
“좋다. 나는 이제부터 너를 따르겠다.”
“예? 그거 농담 아니었습니까?”
예상치 못한 루터 카일의 말에, 로건이 오히려 멍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이라니. 이미 네 스승과는 이야기가 되어 있다.”
“스승님과 말입니까?”
“네게 가능성이 보인다면 왕국의 미래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너를 돕겠다고 말이다.”
내전 후 그가 사면을 받은 조건은 에스페란자 기사단으로 백의종군하는 것.
그 거취를 옮기는 것 정도야 검공의 재량이다.
그러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왕국의 미래라니,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내전을…….”
“너도 인마! 장가갔는데 장인이 압박해 봐! 집안 어른에, 나보다 센 사람이 그렇게 나오면 내가 어떻게…… 하, 내가 속이 터져서…….”
눈을 가늘게 뜬 로건의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에 울컥한 루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에 피식 웃은 로건이 쓰러진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초인께서 전력이 되어 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죠. 맥라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루터 공.”
“끄응. 사람 떠보는 건 네놈 스승보다 더해. 아무튼, 딱히 네 스승 부탁 때문은 아니다.”
“……?”
“황제 앞에서 네가 한 말, 그 말이 너무도 인상 깊었다. 그런 조건을 제안한 황제의 배포에도 놀랐고, 그걸 거절한 너에게도 놀랐다.”
“고작 그것 때문입니까?”
“……고작? 네가 새 왕과 갈등 중이라는 소문을 들은 이라면 누구나 말도 안 되는 선택이라 생각할 거다. 넌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그야말로 왕국의 미래지. 이런 무위가 없더라도 말이다.”
가슴속에 쌓인 한과, 어차피 벌어질 일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대단한 일로 포장이 되었다.
로건으로서는 씁쓸할 수밖에 없는 일.
“그렇네요. 참 바보 같은 짓이네요.”
“뭐? 너 설마 다시 제국에 가려는…….”
“아닙니다. 그냥…….”
“그냥?”
“왕이 바보 같은 짓을 한다고요.”
그 말에 루터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사람의 안색이 굳어졌지만, 로건은 미처 주변을 신경 쓰지 못했다.
새삼 깨달은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끼리 부딪칠 때가 아닌데.’
로건은 다시금 제국에서의 경험을 떠올렸다.
압도적인 전력, 다수의 강력한 초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황제까지.
그가 직접 본 황제는 전생의 소문보다 더한 욕심쟁이였고, 누구의 말도 따르지 않고 자기 뜻을 고수할 고집쟁이였다.
그렇다면 전쟁의 발발 시기는 예상했던 그대로 이루어질 확률이 높았다.
‘이제 정말 4~5년밖에 남지 않았어.’
왕국 모두 하나가 되어 전쟁을 준비하기에도 부족한 시간.
로건의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은 그의 생각처럼 서둘러 갈 수가 없었다.
– 황제의 후의를 얻은 젊은 영웅.
본의 아니게 얻은 그 수식어는 줄곧 로건 일행의 발목을 잡았다. 이동하는 경로에 자리한 도시에 들를 때마다 시장들이나 영주들의 이목을 끈 것이다.
아무리 야영을 위주로 움직이더라도, 사두마차 여덟 대를 끄는 말 오십 필의 편자를 갈기 위해선 정기적으로 도시에 들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일행은 그때마다 이어지는 귀족들의 초청으로 인해 시간을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도시에 들를 때마다 적어도 하루에서 사흘의 시간을 잡아먹으니, 그들이 다시금 첫 번째로 거쳐 왔던 대도시, 루스펠하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또 한 달 반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푸르륵.
“그래도 덕분에 수련 하나는 실컷 했습니다.”
빅토르가 처음 여정을 떠날 때와는 또 달라진 기세를 보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귀족들에게 불려 가기 바쁜 로건에 비해 기사들은 시간이 많이 남았고, 이제 맥라인 기사단에 합류하게 된 루터 카일이 적극적으로 가르침을 주기 시작하자 짧은 시간임에도 성과를 보인 것이다.
“그래. 좋겠구나. 누군 팔자에도 없는 술이며 약혼 권유 따위로 무의미한 시간 낭비하고 있을 때 충실히 수련해서.”
“그래도 주군이 가장 달라지셨는걸요. ‘그날’ 이후로도요.”
이죽대는 로건의 말에 대답하는 빅토르의 표정엔 진심이 어려 있었다.
실제로 로건은 그들 중 가장 바빴음에도 불구하고 기세가 나날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로건은 경지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라 얼버무렸지만.
“너도 천재지만, 네 주군이라는 녀석은 완전히 논외의 무언가다. 저건 대체 어디서 태어난 괴물인지…….”
루터 카일이 혀를 내두르며 뱉은 말은 로건의 변명과는 다른 뜻을 담고 있었다.
로건이 새로 얻게 된 특성의 진짜 가치를 짐작하지 못하는 이상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왜 멀쩡한 사람을 괴물 취급하십니까?”
“헹. 그럼 괴물을 괴물이라 하지 뭐라고 하느냐.”
“그럼 앞으로 대련 안 해 드립니다?”
“흠흠. 그냥 뛰어난 재능에 감탄하는 것뿐이다. 뭐 그런 걸 가지고…….”
로건의 각성 이후 자신의 단점을 하나씩 고쳐 나가며 십수 년 만에 성장하는 기쁨을 맛보고 있던 루터가 황급히 태세를 전환하자, 그를 지켜보던 이들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한때는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이가 이제는 든든한 아군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들이 그렇게 잡담을 하고 있을 때.
성문 안에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나오며 수선을 떨었다.
“오오, 로건 경! 다시 오셨군요. 소식은 잘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그리 높이 보셨다니, 새삼 로건 경과 맺은 이 인연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시장 드미트리의 허리는 그때보다 조금 더 굽혀져 있었고, 목소리 또한 더욱 나긋나긋해진 것 같았다.
“덕분입니다, 시장님. 굳이 또 이렇게 나오실 필요는 없는데요.”
“어휴, 로건 님을 마중하는데 제가 직접 나오는 게 당연하지요. 자자,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로건은 굳이 사양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그 친절을 받아들였고, 일행은 실로 간만에 편안한 침상에서 피로를 풀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로건은 또다시 달갑지 않은 일정을 맞이해야 했다.
“누구라고요?”
“마침 제국 동부를 순방 중이시던 2황자님이 로건 님을 뵙고 싶으시다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허어……?”
시장이 직접 전해 준 정보에 로건은 헛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한창 황위 계승전 중인 황자들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이 조금 아쉬운 터였다.
‘특히나 2황자는 더욱.’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거절할 필요는 없는 만남.
로건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바로스 반 아레스입니다.”
검은 머리 검은 눈에 노란 피부, 황제와는 조금 다른 선이 가는 얼굴.
처음 만난 2황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제국의 황자답지 않게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황자 전하. 그런데 왜 제게 존대를 쓰십니까?”
“제국의 신하도 아니고, 황제 폐하께서 인정하신 손님을 제가 함부로 하대할 수는 없지요. 안 그런가, 플랜?”
“황자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2황자의 호위 기사가 무뚝뚝한 얼굴로 대꾸했다.
‘최상급기사. 뒤에 있는 둘도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같은 경지. 역시…….’
아무리 제국이라도 수많은 황자들 모두에게 이 정도의 호위를 붙이지는 못할 것이다.
눈앞의 2황자는 그만큼 더 특별한 존재라는 뜻.
부드러운 미소로 자신을 대하는 젊은 청년의 모습에 지독한 괴리감을 느끼며 로건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황자 전하께서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
“폐하께서 인정하신 손님이 이제는 제국의 영웅으로 불리고 계시는데, 황실의 일원으로서 어찌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만나 뵙고 인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에게요?”
“그럼요. 안 그래도 그란디아 내전의 영웅을 한번 뵙고 싶기도 했거든요.”
그래, 나도 만나고 싶었다.
로건은 무의식적으로 심중에 일어나는 살기를 통제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회귀 전, 전생에서 반드시 죽여야 할 목표 중 하나였던 이의 얼굴이 눈앞에 놓여 있었으니까.
바로스 반 아레스.
황위 쟁탈전이 진행 중인 지금은 그저 2황자지만, 결국 그 경쟁에서 승리하여 황태자가 되는 이.
즉, 제국의 차기 황제.
그리고.
‘미친 살인마 새끼.’
제국의 정복 전쟁 이후 10년 뒤에 제위를 이어받은 이놈은 그란디아를 비롯한 여러 정복지의 ‘무능력자’ 백성들을 다수 끌어들여 알 수 없는 마법 실험에 실험체로 ‘사용’한다.
현 황제가 정복 전쟁을 일으킨 난폭한 정복자라면, 이놈은 그 후에 정복지를 지옥으로 만든 악마.
로건이 임무 수행 끝에 폭사하던 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5년 후의 그날까지도 이놈이 대체 무슨 실험을 위해 천만이 넘는 인명을 갈아 넣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제국직할령 내에서는 성군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괴물.
그런 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영혼에 각인된 기억에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손이 계속해서 움찔거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감정을 숨기긴 쉬웠다.
‘참아야 한다. 2황자는 제국의 정복 전쟁이 끝난 10년 뒤에나 황제가 된다. 지금은 최우선 목표가 아니야.’
지금 이놈을 죽여서도 안 되지만, 죽인다 해도 제국 전쟁에는 별 영향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비로소 로건은 편안히 웃을 수 있었다.
“황자님께 그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운이 좋았던 것뿐인데 말입니다.”
“아하하, 그럴 리가요. 압도적으로 불리한 내전의 전황을 뒤집어엎고 왕국을 손아귀에 넣은 영웅이 그저 운만 좋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하. 과찬이십니다.”
의외였다.
황도의 제국 귀족들은 별로 관심도 없었던 그란디아의 내전에 대해 황자가 잘 알고 있다니.
로건의 표정이 다시 어색해지는데, 더 놀라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런 로건 경이 새로운 왕과 대립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예?”
“아, 왕국에 소문이 파다하던데 혹시 소문일 뿐이던가요?”
그런 소문에까지 관심을 가진다?
황자가?
‘왜지?’
로건은 머리를 굴리면서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입니다. 제가 폐하와 대립할 일은 없으니까요.”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인 거군요. 충신이십니다. 하긴, 그러니까 황제 폐하의 제안도 거부하신 거겠지요.”
“하하…….”
헛짚어도 단단히 헛짚은 황자의 말에 로건은 그저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서로 웃음이 오가는 가운데, 로건이 물었다.
“그런데 저희 왕국 사정에 밝으시네요. 제국 분들은 타국에 별로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제가 제국보다 역사가 깊은 그란디아에 관심이 많아 귀를 기울이다 보니, 최근에 들리는 소문이 죄다 로건 경에 관한 얘기더군요. 그러다 보니 궁금증이 생겨서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혹시 불쾌하셨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만연한 미소로 칭찬만 늘어놓는 얼굴.
그 얼굴을 보며 어찌 침을 뱉을 수 있을까.
로건은 본의 아니게 전생의 암살 순위 1위와 화기애애한 저녁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다시 뵙게 될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군요.”
“저 역시 같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때 네 목을 칠 수 있었으면 좋겠군.
흉흉한 마음을 숨긴 채 건넨 훈훈한 인사로 식사 시간이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아, 아까 제가 말씀드린 소문 말인데요.”
“예?”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지만, 그래도 혹시나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신다면 황제 폐하의 제안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무슨?”
“황제 폐하께서는 매우 관대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한 번 뱉으신 말은 꼭 지키는 편이시죠. 꼭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로건 공께서 귀의하시기만 하면 이전의 약속을 그대로 지키실 겁니다.”
제국으로 오라.
결국은 황자의 말 역시 황제와 같았다.
다만 좀 더 구체적으로 왕과의 갈등을 언급하는 것이 달랐을 뿐.
“관대한 제의, 호의로 가슴 깊숙이 새겨 두겠습니다.”
“하하. 무례한 말일까 걱정했는데 좋게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제가 폐하보다 더 큰 것을 드릴 수는 없지만, 약소하나마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황자가 내미는 작은 구슬.
그 안에 담긴 마나를 알아본 로건이 의아한 기색을 내비치자, 황자가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요즘 일 때문에 제국 동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란디아와 가까운 편이니 혹시나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그것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단 한 번이라지만 제게 직통으로 연락이 오는 통신구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요?”
“물론 왕국에서야 그런 일이 없겠지만요. 그냥 로건 경과의 인연을 더 좋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으로 여겨 주십시오.”
황자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로건의 의혹은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이상해. 이렇게 친절한 캐릭터가 아닐 텐데?’
황제가 된 이전과 그 이후의 인격 변화야 있을 수 있지만, 황자의미래를 알고 있는 로건으로선 이 살가운 태도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지만 조심해야겠어.’
이 통신구는 가능한 한 절대 사용하지 말아야겠다.
그런 결심을 하며 로건은 싱긋 웃었다.
“다시 한번 깊은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다시 뵙게 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2황자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로건은 돌아 나오는 길에 좀 더 확실한 각오를 다질 수 있었다.
‘제국의 황자도 알 정도라. 확실히 지금 내가 왕과 대립할 때가 아니야.’
그리고 그날 저녁.
루스펠하임의 맥라인 상단 지부로 로건의 결심이 더욱 굳어질 만한 통신이 날아들었다.
“테러?”
[예. 왕국 곳곳에서 테러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놈들이 이전에 놓쳤던 1왕손 클래비스의 수하를 자청하고 있습니다. 테러의 명목도 정당한 왕위계승권자인 1왕손에게 왕위를 넘기라는 어처구니없는…….]드웨인의 익숙한 목소리가 전해 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게 무슨 개소리야?”
로건은 황당한 표정으로 통신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