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12)
212화로건이 하마르를 연상할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충 기워 입은 리넨 상하의에 가죽조끼를 껴입고, 부상 방지를 위한 장인용 장갑을 착용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와하하하! 주인, 타렌엔 거의 8개월 만인데 어떻소. 멋지게 변하지 않았소이까?”
잔뜩 달고 온 다른 드워프들이나 호위 기사들이야 그렇다 쳐도, 살이 포동포동 오른 얼굴로 웃는 하마르의 모습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왕국의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노란 호박 단추를 단 붉은 비단옷을 멀끔하니 챙겨 입고 있었던 것이다.
부유한 상인이라면 모를까, 장인의 복장으로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모습.
조금 전까지 변화한 타렌의 모습에 완벽한 만족감을 표하고 있던 로건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움찔.
“뭐, 뭐야. 주인,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나 일 잘했다고! 뭐! 왜?!”
“그래, 그렇긴 한데…….”
“왜 그래, 자꾸 불안하게! 트집 잡을 거 있으면 빨리 말하라고!”
“일은 잘했는데…… 이젠 더 안 하나 봐? 옷에 아주 먼지 하나가 없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이제 우리 공방에 드워프만 1,103명이다! 인간 장인은 그 세 배쯤 되고! 근데 내가 뭐하러 직접 일을 하나?!”
그건 그렇긴 한데…….
‘왜 하마르가 논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불편하지?’
악마 주인 소리를 자꾸 듣다 보니 생긴 보상 심리인가?
피식.
스스로 떠올린 이기적인 생각이 한심해서 나온 웃음이었지만, 그것을 본 하마르는 한 번 더 움찔하더니 버럭 소리쳤다.
“차, 참고로 이 옷은 내가 직접 재단에 단추 세공까지 한 거다! 돈 안 들었다!”
저런.
심지어 옷까지 자체 제작이란다.
그동안 해 온 일이 있으니 적당히 사 입어도 될 텐데.
‘내가 좀 더 잘해 줘야겠다.’
로건은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며 하마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누가 뭐래냐. 그래, 잘했어.”
“……?”
“공방 내부 구경이나 해 보자. 안내나 해 봐.”
“……진짜?”
“그럼 진짜지. 가짜로 구경할까.”
“아니, 정말 그냥 넘어가…… 흐, 흐흠. 이게 아니지. 뭐, 그렇다면야. 갑시다, 직접 설계한 내가 입구부터 확실하게 안내해 드리리다.”
“그래. 그리고 광산도.”
“아! 맞다. 그, 그거 며칠 전부터 채굴 시작했는데!”
“그래. 그럼 더욱 빨리 가 봐야겠네.”
웃으며 돌아선 주인과 노예가 동시에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지나간 듯 모호하고 찜찜한 느낌.
그들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몇 달 이상의 긴 기간을 두고 다시 만났을 때 아무 트러블 없이 넘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한참을 말없이 걷던 하마르가 몇 차례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얼었다.
“거, 건설비 많이 아껴서 비단이랑 호박을 좀 사서 만든 옷이다.”
“……응?”
“몇 벌 더 있긴 하다. 그런데 건설비 진짜 많이 아꼈다!”
“……공방장 월급 인상 취소.”
“왜, 왜?!”
“지금 횡령 자백했잖아.”
“내, 내가 그만큼 더 아꼈다고……!! 아니, 잠깐만? 그 전에, 내가 월급이 있었어?”
“그러니까. 주려던 거 취소.”
“왜에?!!”
피식 웃은 로건은 하마르와 한참을 아옹다옹하다가 맥라인 최고 관리인 드웨인과 동일한 월봉을 주기로 합의했다.
물론 그간의 공과 효율을 생각한 성과급은 별도로 계산했다.
‘내 사람은 확실히 챙겨야지.’
그제야 헤벌쭉 웃는 낯으로 돌아선 하마르의 가벼운 발걸음을 보며 로건 역시 흐뭇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은 불과 몇 시간을 가지 못했다.
수백 명의 드워프가 여기저기서 오가는 마정석 광맥.
“주인. 주인이 가장 걱정하는 게 여기서 채굴되는 ‘그게’ 바깥에 소문나는 거라고 들었다.”
“그래. 그렇지.”
“그래서 여기는 나와 드워프들만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오, 과연. 그래서 작업이 빨랐군.”
“그렇다. 거기다 특별한 계약서까지 썼으니.”
“특별한 계약서?”
“마법 계약서. 정확하게 300명만 뽑아서 딱 300만 골드 들었다. 그래서 비밀 유지는 확실하지.”
“……300만? 마법 계약서 300장?”
로건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지는 것을 보는 순간.
고조된 기분을 반영하듯 한껏 올라가 있던 하마르의 입꼬리에 경련이 일었다.
“그, 그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돈도 많으면서 왜?!”
그렇다. 한때는 300만 골드가 맥라인의 1년 치 예산이었지만, 지금은 그리 큰돈이 아니다.
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끄응. 300장이나 되는 물량이면 왕실 마탑에서 샀겠지? 수도에 있는?”
“그, 그거야 그렇…….”
하마르의 대답을 들은 로건은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잡고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법 계약서의 효력은 4서클 이상의 마법사면 해주할 수 있고, 설령 마법사가 아닌 기사라도 최상급 수준만 되면 자기 힘만으로도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그런 마법 계약서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클래스 마법사, 위자드 학파의 왕실 마탑뿐이었다.
거기다.
‘왕실 마탑은 대대로 왕에게만 충성을…….’
끄으응.
로건은 상승하는 혈압을 가라앉히려 억지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하마르, 네가 마법사라고 생각을 해 보자고.”
“으, 으음?”
“어느 가문, 그것도 갑자기 무슨 개발을 한다는 도시에서 그런 계약서 300장을 한꺼번에 사 가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
“……그, 글쎄, 고마운 손님?”
“미쳤냐! 마법사들이 다 바본 줄 알아?!”
로건의 고함에 되는대로 핑계를 대던 하마르도 일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여기서 뭔가 강제적인 계약이 잔뜩 필요한 일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것도 새롭게 광산을 개발했다는 영지에서 말이야. 걔들이 알면 왕실에서도 알게 될 테고 말이지.”
“……아, 아으. 나, 난 솔직히 거기까진 생각을 못 하고……. 미안하다, 주인. 정말, 정말 미안하다.”
고개를 푹 숙인 드워프가 허연 수염이 성성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까지 글썽거리자, 화를 내려던 로건의 분노도 한풀 꺾이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니 어차피 크게 변할 일은 없었다.
‘어차피 10년 세금 면제는 약속받았어. 왕실 조사관이 온다 해도 못 오게 하면 그만이야. 세금 낼 필요도 없는 곳을 뭐 하러 조사해.’
더구나 믿을 만한 장치(?)도 하나 더 있었다.
‘스승님. 믿습니다. 이번엔 확실히 도와주셔야 합니다.’
수도에서 헤어질 무렵 스승의 표정을 떠올린 로건은 작은 한숨과 함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다만, 성급한 행동으로 위기를 초래할 뻔한 하마르를 단속하려고 일부러 표정은 더 엄하게 지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이제 와 어쩌겠어. 다만 외부인 출입은 철저히 통제해. 특히 여기서 ‘그게’ 채굴되어서 마탑까지 이어지는 경로는 특히나.”
“아, 알겠다. 주인.”
“소리쳐서 미안하다. 비밀을 유지하겠다는 시도 자체는 좋았어. 다만 다음번에는 미리 보고 좀 해 주고.”
“새, 생각해 보니 보고했는데? 분명 허가 서류가 왔는데?”
“……응?”
“마, 맞다! 허가가 나왔다고 해서 구입했다! 그 반란군 토벌 이전에, 영지에서! 직인이 찍힌 서류가 어디 있을 텐데? 자, 잠깐만. 이 씨, 나만 잘못한 게 아니었네. 이따 사무실 가면 서류 보여 준다! 씨, 괜히 쫄았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
피곤한 에일렌을 자리에서 밀어내고 신명 나게 도장을 찍어 대던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 ……저기, 로건 공자. 내용은 안 봐요?
– 이거 확인하기 싫어서 유능한 관리를 뽑은 건데요. 최종 확인은 드웨인이 다 했을 거예요.
‘아우, 이 등신아. 아으으.’
병신같은 소리를 지껄이던 과거의 자신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허가 서류에 도장을 찍은 게 자신이란 걸 알면 좀 전에 눈물까지 흩뿌린 이 드워프가…….
“아, 하하. 그래, 좋은 생각이었어. 아무래도 보고 과정에서 뭔가 누락된 모양이야. 다들 바쁘다 보면 이런저런 실수도 일어나는 법이지. 괜찮아.”
“주인, 지금 되게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안 되겠어. 보고가 잘못된 것 같으니 그놈을 찾아서 나랑 그놈이랑 같이 책임을…….”
“하하.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어차피 방비할 수단은 있…….”
억울함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마르를 똑바로 보기 힘들어 하염없이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는데.
번쩍.
“……응?”
멀리 시선을 두고 있던 그곳.
마탑의 꼭대기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 * ‘제발, 제발, 제발, 신이시여.’
클레이튼은 오늘도 푸른 빛을 머금기 시작한 강철판을 보며 시선을 하늘, 아니 천장으로 던졌다.
기도를 너무 많이 올리다 보니 이제는 자신이 마법사인지 성직자인지도 구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완벽한 이론을 만들고 실험에 돌입하기 직전에 맥라인을 출병하게 만든 저 썩어 문드러질 반란군 놈들에게는 직접 천벌을 내려 주고 왔다.
하지만 이제 속 편히 실험할 수 있겠거니 했던 생각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최초로 채굴된 마정석을 깡그리 인계받았음에도 삼 일간 실패만 일곱 번째.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이론은 사흘 만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수정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수정도 불가능한 수준까지 와 버렸다.
‘이번에 실패하면 기존의 이론을 전부 그냥 뒤엎어야 해. 처음부터 다시.’
그 막연한 연구 일지에서 새로운 이론을 뽑아내야 한다.
그래, 마도사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어쩌면 처음 연구 일지를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일 년이면 이론을 완성할 수 있겠지.
그리고 다시 실험에 몇 년…….
‘안 돼. 그래서야 로건 공자를 볼 면목이 없어.’
물론 당사자는 괜찮다고 했다.
– 성공하면 좋지만,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적에게만 안 가…… 아하하. 이 말은 잊어 주십시오. 헛나왔습니다.
– ……아닙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렇게 자존심을 건 게 벌써 몇 번이던가.
아무리 타박을 받지 않는다고 한들, 그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이 실험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정신이 큰 타격을 받으리라는 것을.
단순히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지 모를 사람, 아니 집단이 만들어 낸 그 연구 일지를 파악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마도사의 상징인 마력(Mana force)에 힘을 더하는 것은 결국 마도사의 영혼. 그리고 그 영혼은 신들이 사람을 만들 때 기초로 삼았다는 최초의 사료 같은 실체 없는 것이 아니야.’
마도사에게 있어 영혼이란 자신의 삶을 통해 쌓아 올린 가치를 의미하는 것.
‘스스로 한 말을 지키고, 발전시키고, 행함으로써 삶의 궤적에 방향성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마도사의 경지를 상승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연구 일지는 이를 일컬어 언령(Power word : 言靈)이라 칭했다.
그리고 수년간 연구를 지속해 온 지금은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냥 최대한 정직하게 살려 했던 것뿐이지만.’
그 삶의 태도가 자신을 이른 나이에 마도사의 경지로 이끈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이 나라 유일의 마도사이자, 세기의 천재라 불리던 후안 더글라스가 어느 순간부터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야 해.’
이 연구의 성공 여부를 떠나 마도사에게는 연구 일지 자체가 세기에 다시 없을 보물이었다.
자신과 자신의 학파에게 이런 기회와 보물을 준 은인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그 간절한 염원이 통했던 걸까.
우우웅.
푸른 빛에 둘러싸여 있던 강철판이 묘한 진동과 함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마나에 민감한 마도사는 그 미묘한 진동만으로도 앞으로 이루어질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성공했다! 드디어!!’
하급 아티팩트의 대량 생산을 위한, 가장 중요한 고비를 넘어섰다.
그렇기에 클레이튼은 그 순간 내려놓게 된 마음속 무거운 짐 하나를 디딤돌로 삼아 한 단계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내전 당시 마도사의 경지인 6서클에 올라 비기너(beginner)가 된 지 불과 2년 만에, 그 바로 다음 단계라 할 수 있는 6서클 익스퍼트(Expert)로 도약한 것이다.
‘지키기 어려운 일을 뱉어 내고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제자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영혼에 새겨졌다.
자신의 몸에서 시작된 따스한 황톳빛 빛살이 주변에 퍼지는 것을 느끼며 클레이튼은 절로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높은 경지에 올랐던 고대의 마도사들이 오히려 신심이 깊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